高麗太師洪公墓表사진
(번역문!)
南陽洪氏의鼻祖이신 고려개국익대18자功臣號를받으신고려태사諱殷悅公之碑!
본카폐지기가운영하는다음블로그에高麗開國翊戴의功이있어서 광익효절헌양 정난 홍제 분용 양채보예경제공신이라는18字功臣號를받으신 우리南陽(唐城) 洪氏의鼻祖 太師公墓表文이 올려저있었는데 알수없는이유로없어져버렸다.
봉화춘양에있는 南陽(唐城)洪氏인주도령中郞將派 大宗家사당 唐城祠경내의太師公之碑와인주도령중랑장파派祖公之碑!!
태사廟앞의인주도령중랑장파派祖公之碑!!
한문을컴으로올리기힘들고시간여유가없어서사진으로.....
이건틈날때 원문으로올릴생각임
윗사진은 南陽洪氏大觀의번역문인바!글씨와번역의묘미가 이십여년전에 南陽洪氏 해봉公宗中에서 발간한 南陽洪氏顯祖유사록의번역문이더읽기가수월하여 남양홍씨현조유사록의번ㅇ역문을올리는바이다.
(번역문)
公의諱는 은열이요.
성은홍씨시니 우리남양홍씨의비조이시다.
족보에는 그선세가 불명하여 기록이없으나 역대로 전해오기를 당에서 고구려의 교화를위하여 보낸8학사중의한분이 홍씨로 당곶은수포에 처음도착하여 살았다고한다.
당곶이 뒤에 남양부로개칭되었으니 공은그후손이시다.
공의사적을고려사나 가승에선찾아볼수 없지만 보첩을살펴보면 공께서 고려태조를보좌하여 익대의공이커서 *광익효절헌양 정난 홍제 분용 양채 보예경제*공신의훈호를받으시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 가되셨다.
세대가 아득하게 멀어서 그덕업과 공열은 고증할수가없고 지금은 오로지 훈호만을살필수있지만 이를미루어 公의 많은功德과 높은충렬의 개략을추상할뿐이다.
공의묘택은 보첩에 토산에있다고했으되 어느곳인지?알지못했다.
토산현 동쪽20리쯤에 있는취적봉에 고총이하나있었는데 노인들사이에서는 홍정승 무덤이라고 전해져왔으나 지석이나 비석등 증명할물증이없었다.
숭정기원후 두번째무신(1728년영조4년)가을에 산하에살던 후손 우상이 묘옆에 사태난곳에서 비석조각을 발견했는데 아래위가없어진 중단의조각인데 첫행에는*헌양정난홍*다섯글자.
제2항은*공휘은열자*다섯자
제3항*인10월17*다섯자
제4항*적봉병자임*의다섯자가완연하다.
즉시 서울에사는종인 들에게알려져서 후손우정(구만공)상빈등이급히가서 살펴본즉 무덤의모양은 토총(석관총이아니라는듯)이나 그기초는 매우웅장하며 근방에 딴무덤이없고 좌향이 비갈에써있는바와같음으로 공의묘임이 틀림없었다.
다음해봄에 묘를 개축하고 수석을갖추어 비갈을세워서 영구보존을도모하였다.
슬프도다 공의묘가인몰하여 수백년을알지못하고있었다가 비석조각이허물어진 무덤가에서 다시발견됨이 타인이아닌 후손의손에얻어졌구나.
아래위는없어졋으나 홀로 그휘자가 남아서 사당으로모셨다가 복고하며 공의요원한 행적을살피건대 그많은 적덕이 신명의도움으로 되찾게 되었으니 이또한 기적이아니겠는가?
수년전에 공의손자 진주에있는 복야공의묘가 역시 밭가운데서 단갈(비석조각)이 발견되어 두무덤이밝혀진 일과같을진대 어찌 이적이라 아니하겠는가!
부인김씨는 사찬원보공남의따님인데 묘역을 개축할때보니 광중이넓고매우큰것으로보아 합장인것같다.
아드님은태부경 동주요. 태부경의자는우복야의 와 정보척,부정호 란이요.
우복야의아들은 태자첨사호 와 봉어 복이다.
첨사의아들은 군기감사 덕승과상서 덕성, 덕위이고,군기감사의아들은 상주국충평공관이다.
충평공의아들은 상서 지유다.
이밖에 후손들이 고려시대 크게번창하고찬연하였다.
조선조에들어와서는 높은벼슬과석학이많았으니 일일이 가려서 다 기록하기가 어렵다.
그중에서는 고관과 덕망이높아 뚜렷한 후손만을기록하고자 한다.
사윤은 복야요,진은 상서,예는 한림학사요,규는 광정공, 자번은충정공이다.
융은장간공, 경은 양순공, 주는좌사요, 언박은 남양후 언유는 남양군, 언수는판중추다.
승찬은시중, 승조는 상서, 운수는익산군,징은당성군.사범,사우는지밀직, 복기는판서 해는당성위 한 판서 사석은장양공, 약은판중추,원철은당성부원군, 일동은대제학 달손은좌상 경손은수동지성균관사,귀손은판서 응은 좌상,흥은대사헌,상은 당양위,경림은판서 춘경.춘년은감사 천민은도승지 성민은판중추문정공서봉은영상이다.
식은대사헌 사효는 판결사 명원,명일은감사 명구는 충렬공 명형은 의열공 명하는 영상문간공이고 우경은 당원위이고득일,위,처후,처윤은 감사 처대는 지중추 처량은 정정공이다. 중보는 우상이고 전은 좌윤 득기는익평위 득우는 감사 수헌은 행판서 수주는 도승지 우령은 감사 우전은 참판 우서는 대간 계적은대헌이다. 온나라를뒤덮은 대가와 이름난 큰인물이 모두 공의외손이아닌자가없으니 이를다기록할수가없다.
25世孫 영의정 치중이삼가밝히고,
전부정 우정(목사공)이썻으며,
26世孫 생원계우가 팔분체로 썼다.(남양문헌록원문)
***유택을찾은후2년여의 봉개축을끝내고비갈을세우고 고사를올린것은1730년(경술,영조6년)여름이었다.
이때고유문을지어올린인주도령중랑장파27세손 洪相朝公은 당시 황해도 박천도사로 계셨으며 중랑장파 익성부원군 후손상주문중의문헌록에 당시의고유축문이전해오고있다***
태사공묘봉개축고유제문(번역문)
********제 문 번역문
봉분을개축하고 삼가 조촐한제물을올려 고 하오니
우선신령은 흠격 하소서
경술년여름 27世孫 상주의 홍상조 는 황해도 도사 로서 제문을짓읍니다
우리洪性은 公 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공은바로 당의8학사중의 한분이십니다
공의업적은고려역사에 기록 되어있읍니다
태조의개국공신이므로 태조묘에 배향받아 고려와함께
시종을 함께한것은당연한일입니다
뿌리가 무성하면 가지가 번성한다고하였읍니다 우리남양종족은
그수가 헤아릴수없이번성하여 더러는고관에 더러는훌륭한자리에올랐으니
이는 우리선조들이 적덕한 결과 가 아닐수없읍니다
그러나 대수가 멀어지면소원해지는 법이므로
이따금 종족의내력을 알지못하여경사를축하하지 못하며
우환에조문하지못하는경우가 있읍니다
이는 필시 공의 묘역에 아직까지 시제를 올리지 못하고있고
종족의 화수회가 폐헤져 종사를 닦지않은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 스럽게도 금년 봄애 땅속에서비석조각을 발견하였읍니다
이는 필시 공의 신령이 영적으로 후손을 도와
우리후손으로하여금 지나간 먼일을 그리워함을 보본하도록 한것입니다
오호
비석 조각에 새겨진 관함과 자호 가 명백하여 의심할것이없읍니다
고려에서 오늘까지800여년 이지만 공렬이 더욱 빛나고 바로 어제의
일과 같읍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홍문의영광일뿐이겠읍니까
내가요행으로 천은을입어 이땅에오게되었읍니다
사당을지어 영모 할수있게되기를바랍니다
개축을하고나니 추모의 정이 더 해집니다
삼가 잔을 올려 미약하나마 정성을표합니다
상향
'내생각이머무는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원용일기 (0) | 2019.06.05 |
---|---|
2018무술년남양(당성)홍씨 (0) | 2018.11.11 |
무술년봉화홍장군전설돌다리 (0) | 2018.10.27 |
2018무술년용인선영벌초사진 (0) | 2018.10.20 |
남양홍씨 익산군파 휴휴당선생계열이춘양에세거한기록 (0) | 2018.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