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220권, 19년( 1488 무신 / 명 홍치(弘治) 1년) 9월 28일 무자 3번째기사 |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성준(成俊)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
“신(臣)들이 듣건대, 최세보(崔世寶)·신영철(申永澈)의 죄를 형조(刑曹)에서는 《대전(大典)》에 ‘차술(借述)19941) ·대술(代述)19942) 하면 장 1백(杖一百), 도 3년(徒三年)에 처하고 두 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정지시킨다.’한 것으로 의계(擬啓)하였으나, 《대전》에 실려 있는 차술·대술은 시장(試場)에 들어가게 되어있는 거자(擧子)로서 대술한 자가 있으면 이 조문(條文)에 따라 논하여야 마땅한 것이고, 이제 최세보는 들어가게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인데 신영철의 종을 첩으로 얻기를 바라고 법을 어겨 감시(監試)에 들어간 자이니, 다른 대술의 예(例)가 아닙니다. 신영철은 신정(申瀞)의 아들이므로 종신 폐고(廢錮)되는 것이 제 분수입니다.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야 비로소 벼슬길에 통하는 것을 바랄 수 있으므로, 자신이 자력으로 입신(立身)하도록 삼가서 행실을 고치는 것이 반드시 여느 사람들보다 몇 등급 더하여야 옳을 터인데, 아비의 행실을 뉘우치지 않고 곧 그 자취를 밟았으니, 그 간사하게 속이는 것이 형용할 수 없는데, 두 번의 과거가 지난 뒤에 신영철이 입격된다면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이 두 사람은 영구히 정거(停擧)하여 간사하게 속이는 무리를 징계하소서. 그러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
“최세보는 이미 죄를 정하였고 《대전》의 법도 이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법을 어기고 더 죄주어야 하겠는가?” |
하였다. 권경희(權景禧)가 다시 차자의 뜻으로 반복하여 논계(論啓)하니, 전교하기를, |
“《대전》에는 다만 ‘차술·대술한 자는 장 1백, 도 3년에 처하고 두 번의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정지시킨다.’ 하였고, 생원의 장옥(場屋)에 두 번 들어간 자의 죄를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 한 사람의 일 때문에 시법(試法)을 무너뜨려야 마땅한가?” |
하였다. 권경희가 아뢰기를, |
“《대전》에 이른바 두 번의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정지시킨다 한 것은 생원시(生員試)에 두 번 들어가 대술한 생원을 이것으로 죄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
“《대전》의 법은 이뿐인데, 미워할 만한 사람 때문에 법을 무너뜨린다면, 법이 미덥지 않아서 백성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
하였다. 권경희가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
“신들이 임희재를 다시 시험하고 그 부형을 추국(推鞫)하기를 바라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임희재 등이 간사하게 속인 자취를 밝혀서, 온 나라 안의 사람들이 문형(文衡)의 공기(公器)로서의 중함을 환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공정한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대간(臺諫)과 함께 이 3인을 강서(講書)시키소서. 그러면 하루 안에 간사하게 속인 것이 저절로 드러나서 죄를 벗어날 데가 없어져서, 뭇사람의 의심이 절로 풀리고 공론도 쾌하여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간사한 사람에게 징계되는 것이 없어서 나라 사람이 다들 과거(科擧)는 속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은 간사한 계책은 임희재 따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부형이 앞장선 것입니다. |
임원준(任元濬)은 본디 남의 손을 빌어 글을 지었기 때문에 폐고(廢錮)되었다가 외람되게 죽게 된 목숨을 다시 살려 주신 은혜를 입어 지위가 1품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간사하고 교활한 옛 버릇을 고치지 않고, 일찍이 제 아들 임사홍(任士洪)을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게 하여 물의가 떠들썩하였는데, 잇달아 임희재가 젖비린내 나는 아이로서 으뜸을 차지하여 물의가 또 떠들썩합니다. 임원준 부자는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하여 겨레붙이인 청주 목사(淸州牧使) 최연(崔堧)에게 부탁하여 임희재가 문과 향시(文科鄕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으나, 이는 임원준의 간사하고 교활한 짓일 뿐더러 임사홍이 주모(主謀)한 것입니다. 임사홍은 자신이 큰 죄를 지었으니, 행실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야 진실로 마땅한데, 스스로 이처럼 삼가지 않습니다. |
구수영(具壽永)·정숭조(鄭崇祖)는 왕실(王室)과 혼인을 맺거나 문음(門蔭)19943) 의 적(籍)을 이어받아 지위가 숭품(崇品)19944) 에 이르렀으나, 다 식견과 도량이 없는 자입니다. 저 임가(任家)를 보면 간사하고 교활한 것으로 대대로 이어서 급제하여 현직(顯職)에 통하였고, 배우지 못한 아들 구숭경(具崇璟)·정승충(鄭承忠)이 차술(借述)로 이미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게 하고 또 급제하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속이는 일을 행하니, 이 사람들은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덕숭(李德崇)은 제 아들 이귀수(李龜壽)가 그 도(道)의 향시에 나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은 외람된 것입니다. 신들이 또 듣건대, 이뿐이 아니라, 제 사위 남인(南麟)과 처남 홍귀손(洪貴孫)과 형의 아들 이철수(李鐵壽)도 그 도의 향시에 나아가 문과(文科)에 입격하거나 감시(監試)에 입격하였다 합니다. 이는 이덕숭의 일가의 자제가 충청도에 모여 응시한 것인데, 선거를 맡은 수령(守令)도 감사 때문에 그 사이에서 사사로운 짓을 용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덕숭은 뻔뻔스레 방목(榜目)에 서압(署押)하여 예조(禮曹)에 이보(移報)하였으니, 이는 이덕숭의 자제가 있는 것만을 알고 국법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임희재 등을 다시 강서(講書)시켜 선비의 풍습을 바루고 부형을 추국하여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징계하소서. 또 이덕숭은 잘못이 매우 크므로 벼슬에 있기에 마땅하지 않으니, 체차(遞差)하고 추국하여 선비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그러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
“임희재 등은 절로 내년 봄에 다시 시험할 것인데, 지금 어찌 부형을 의심하겠는가? 이덕숭의 일은 아뢴 대로 따르겠다.” |
하였다. 권경희가 아뢰기를, |
“이제 분부에 ‘절로 내년 봄의 강서가 있을 것인데, 어찌 부형을 의심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임희재 등을 내년 봄에 관례에 따라 다시 시험한다면, 이는 간사하게 속인 자취를 구명(究明)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특별한 영으로 다시 강서시켜야 그 간사함이 나타날 것입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
“그대들은 반드시 임희재 등이 재상(宰相)의 자손이거나 척리(戚里)19945) 의 사람인데 마침 시관(試官)도 그 겨레붙이이기 때문에 이토록 극진하게 미워하는 것일 것이다. 만약 반드시 다시 강서시켜야 한다면, 무릇 원점(圓點)이 있어서 관시(館試)에 나아가야 하는데 향시(鄕試)에 나아간 자를 다 다시 강서시켜야 할 것이지, 어찌하여 이 3인만을 뽑아내겠는가?” |
하므로, 권경희가 반복하여 논계(論啓)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처음에 최세보(崔世寶)가 신영철(申永澈)의 종을 간통하고, 신영철을 위하여 대술(代述)하려고 외람하게 생원 한성시(生員漢城試)에 들어갔다가 일이 발각되어 죄를 받았다. 신영철은 신정(申瀞)의 아들인데, 신정이 차술(借述)하여 급제하였고, 그 아들이 또 본뜨려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였다. |
【영인본】 11 책 376 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