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朝鮮이야기(7)] 명나라 영락제의 총애를 받은 조선여인 현인비 | ||
이때부터 현인비 권씨와 광록시 경 권영균이 누리게 되는 권력은 조선의 국왕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오히려 조선 국왕도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할 지경이었다. 현인비에 대한 영락제의 총애는 남달랐다. 현인비 또한 고려 말 원나라 황후가 되었던 공녀 출신 기황후와 달리 현명한 처신으로 크게 신망을 얻었다. 반면 그 오빠 권영균은 조선에서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게 되자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던 것 같다. 1424년 세종 6년 권영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갑자기 귀하고 부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권력자와 교제하여 자못 교만하였으며 주색(酒色)을 좋아하여 일찍 죽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현인비가 누린 권세는 너무나도 짧았다. 현인비에 봉해진 지 불과 2년도 채 안된 1410년 10월 24일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권영균이 이듬해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조선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병사(病死)가 아니라 독살(毒殺)이었다. 황후에 준하는 예로 현인비를 대했던 영락제는 조사에 착수했고 황엄을 비롯한 측근인사들은 여씨가 현인비를 시기질투하여 독살한 것처럼 사건을 조작했다. 여씨란 태종이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으니 그게 무슨 인물이야”고 했던 바로 그 여귀진의 딸이다. 그 바람에 태종 14년 9월 19일 명나라에서 돌아온 통사 원민생이 그 같은 사실을 보고하자마자 태종은 여씨의 어머니와 친족들을 모두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기도 했다. 여씨는 명나라 조정의 한 달여에 걸친 단근질형(烙刑)을 당한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이어 임첨년의 딸도 불려가 목을 매 자살했고 이문명의 딸은 모진 국문 끝에 참형을 당했다. 결국 최득비의 딸을 제외한 4인의 진헌녀는 모두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다. 당시 현인비 독살사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만 3000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조선에서 간 환관이나 몸종들도 대거 포함돼 있었다. 태종 10년 10월 2차 진헌녀로 뽑혀갔던 정윤후의 딸도 임첨년의 딸처럼 목매 자살했고 3차 진헌녀 둘 중 하나인 황하신의 딸도 참형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국인 궁녀 어씨와 여씨가 황엄과 손잡고 벌인 무고사건이라 하여 ‘어여의 난’이라고 한다. 이때의 여씨는 조선인 여씨가 아니라 중국 상인의 딸 여씨이다. 3차 진헌녀 두 사람 중 또 한 명은 한영정의 딸이자 한확의 누이다. 당시 한영정의 딸도 죽을 뻔했으나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그러나 결국 10여년 후인 1424년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자 30여명의 궁인과 함께 순장을 당했다. 역시 비명횡사를 했다. 그러고 보면 3차에 걸쳐 모두 8명이 진헌녀로 가서 최씨의 딸을 제외한 7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세종이라고 해서 진헌녀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세종 10년 이번에는 광록시 경 한확의 막내 여동생이 진헌녀로 뽑혀 갔다. 권영균과 달리 늘 조심하고 처신이 뛰어났던 한확은 세종 세조대를 거치며 좌의정에까지 오르고 그의 딸은 세조의 큰며느리가 된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바로 그다. 이로써 한확은 명나라 황실과 조선 왕실을 동시에 사돈집안으로 두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