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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 초기 문신 홍원용(洪元用)의 기록으로 본 영종도

어풍대08 2006. 6. 25. 23:56

원용(洪元用)은 

 

 

?∼1466(세조 12)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판서 여방(汝方)의 아들이다.
지평· 호조참의를 거쳐 1454년(단종 2)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1455년(세조 1) 경창부윤(慶昌府尹),  3년 후 한성부윤 으로 전임되었다.

이어 공신의 적장(嫡長)으로 1462년 강녕군(江寧君)에 습봉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1445년 7월  사복시 소윤(고려, 조선시대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리)으로 있다가 인천지군사(조산대부/문관 종4품 , 현재의 인천광역시장)로 부임하여 49개월동안 (1449년 7월) 인천의 상황을 직접 본 인물이다.

 

그가 명나라 경봉원년 경오 9 월에 보공장군(保功將軍) 용기시위사(龍騎侍衛司) 대호군(大護軍)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로 있을때의 기록을 보면

자연도와 제물포 앞바다의  상황이 기록되어있다. 

그 기록을 찾아 적어보았다.

조선 초기(1450년 전후)의   영종도 주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기록내용으로 추측해 볼때

당시의 인구수는  영종,용유지역에  70여 호가 살았던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인구수는 어림잡아 한 호당 대가족 개념으로 보아  평균 10 명 전후라고보고  최대 약 700 여명에서  최소 200명정도가 거주한 것으로 볼수있을것 같다.

 

또한  앞바다의 어족도 지금의 상황과는  다른 오징어, 조기 등을 포함해 많은 어종이 분포했었던것으로  추측할수있으며 서서히 멸종한것으로 볼수있겠다.

 

 

기록을 적어본다.

 

 

인천은  바다와 멀지않은 관계로 바다에서 나는 산물이 많다.

 

곧, 숭어, 조기, 홍어,농어,병어,오징어, 넙치, 전어,상어,준치, 갈치,가물치, 소어,설대어,망어,미거이, 장어,수청어들이 모두  인천 영종도 주변 앞바다에서 나는 것들이다.

 

조개 종류로는 대합, 모시조개, 오합등이 있고

새우는  큰새우, 중새우, 쌀새우 등 각기 3가지 종류가 있다.

미네굴, 석화 등의 굴 종류도있다.

나머지는 일일이 다 기억 할수 없다.

 

남쪽 해안으로는 어량(漁梁 통발)을 설치한 곳이 3 군데 있다.

거기서 잡은 것으로 궁중에 진상하는데 쓰인다.

 

제물포에서 자연도는 10 리, 용유도는 30 리, 용유도에서 무의도는 2 리 떨어져있다.

이 세 섬들에는 모두 목장을 설치하여 나라에서 쓰는 말을 기르는데 상당히 번식하였다.

 

자연도와 용유도에는 민호가 70 호 가량 거주하며

소금굽는 동이를 설치하고  소금을 구워 팔아 이익을 남기는데 관아에서는 그 소금을 공물로 가져간다.

 

또한 그 3 군데의 섬에서는 사자발 쑥이 많이 나서 역시 공물로 바친다.

출처 : 허허벌판
글쓴이 : beolp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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