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溪先生逸稿 (古枕 810.819 홍53ꑁ)
洪世恭 (1541∼1598) ; 字 仲安, 號 鳳溪, 本貫 南陽.
木板本. - [發行地不明事項].
2卷1冊 ; 31.7x21cm.
四周雙邊. 半匡 ; 17.5x15.8cm.有界.10行18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문신 홍세공의 시문집이다. 홍세공은 1573(선조 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였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해도사, 해운판관(海運判官), 강계부사(江界府使), 호조참의, 우부승지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순찰사가 되고 이듬해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이어 1594년 전라도관찰사로 전주부윤을 겸했다. 그 후 평안도절도사로서 군량미 조달에 힘쓰다가 죽었다.
이 문집은 12세손 홍학종(洪學鍾)이 1900(광무 4)년에 간행했다. 「청명상벌계(請明賞罰啓)」와 「청파간남수재계(請罷奸濫守宰啓)」는 함경순찰사 때 올린 것으로 북방의 방비지구(防備之具)가 한심하다는 사실과 왜적이 입북(入北)했을 때의 각 수령이나 군민(軍民)의 공과(功過)가 상이(相異)한데 북도(北道)의 경우 부적(附賊)한 자들은 이미 정배(定配)했는데도 남도(南道)에서는 이를 거론치도 않았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또한 함흥(咸興) 이남의 7읍은 진황(陳荒)과 수재(水災)로 아사지경에 빠져 버렸는데도 문천군수(文川郡守)는 휼민은 하지 않고 오로지 탐학(貪虐)함으로써 그 폐가 대단하고 경흥군사(慶興軍士) 김광국(金匡國)은 호적(胡賊)이 약탈해 갈 때 굽히지 않고 의(義)를 세웠으니 표창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조도군민(調度軍民)」에는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지역의 군민(軍民)과 양곡의 수집 상황이 기술되어 있으며 「청포상납곡인계(請褒賞納穀人啓)」에는 양곡 수집 현황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평안도조도절목(平安道調度節目)」은 전세(田稅), 두승(斗升), 모곡(募穀), 군량(軍糧), 노비신공(奴婢身貢), 실직첩(實職帖), 영첩(影帖), 수미지사(收米之事), 군역(軍役), 강변포사수(江邊砲射手), 묘향사승묘엄(妙香寺僧妙嚴), 안주승(安州僧) 현탄(玄坦) 등의 납곡(納穀), 공가인(公家人) 등의 면직(免職), 승군(僧軍), 염세(鹽稅), 산염(産鹽) 등 평안도내의 당시 해야될 일들 50여 가지를 조목으로 적어 놓은 것이다. 예를 들면 1)두승다수(斗升多數), 별조일양(別造一樣), 교정치각참사(校正置各站事). 2)계사갑오양연(癸巳甲午兩年), 각사노비미수신공(各司奴婢未收身貢), 병위작미보양사(竝爲作米補糧事). 3)군역지인(軍役之人), 개원금군(皆願禁軍), 이불원영참봉(而不願影參奉), 강변군사(江邊軍士), 우위원수금군첩(尤爲願授禁軍帖). 4)묘향사승묘엄차지비변사보미오십석(妙香寺僧妙嚴次知備邊司報米五十石), 신백준상하미이십석영승도이납어평양사(申伯峻上下米二十石令僧徒移納於平壤事). 5)산염각관(産鹽各官), 고염부다소(考鹽釜多少), 거정염석무미사(據定鹽石貿米事). 본집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군량조달 관계 연구에 가치 있는 자료이다. 이 문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내용은 임진왜란 당시의 양곡 모집에 관한 것이다. 또한 평안·함경 양도의 수령 및 군관들이 왜적의 침입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문제의 고찰에도 참고가 된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수록된 「평안도조도절목(平安道調度節目」은 50여 가지의 당면 사항들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를 전체적으로 연구하는 데 있어서나 어느 특정 문제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는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目錄.
卷之 1. 詩(6首).
啓狀 ; 明賞罰, 罷奸濫守宰, 全羅監司告病傑免, 治土豪, 調度軍民, 淑賞納穀人, 治運糧遲緩罪.
書 ; 答或人, 寄子時述, 寄從子時勉.
雜著 ; 平安道調度節目.
卷之 2. 附錄 ; 敎諭 ; 全羅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全州府尹巡察使洪世恭, 全羅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全州府尹巡察使洪世恭, 咸鏡道巡察使洪世恭.
行狀, 諡狀, 墓誌銘, 祭文.
贈遺 ; 送洪書狀仲安赴京, 送巡察使洪仲安還 朝, 亂中雜錄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