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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금씨 시조 영열公 금의琴儀 연보

어풍대08 2017. 8. 7. 11:09

시조 영렬공 연보>

 우리 금씨의 시조(始祖)는 고려 개국공신 태사 금용식(琴容式)이나 그 후의 세수가 불분명하여 고려중엽의 영렬공 금의(琴儀)를 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영렬공은 고려중엽 묘청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시대인 서기 1153년에 탄생 하셨고 정중부등의 무신정권과 농민의 봉기로 국내치안이 극도로 불안할 때인 23세 때 처음으로 벼슬길에 들었다.
32세 되는 해에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최충헌의 무단정권하에서도 임금님의 지극한 신임으로 빛나는 요직을 두루 거치었으며 여러차례의 진사시(進士試)와 대과(大科)를 맡으면서 많은 문인을 선발하니 이들은 모두 당대의 훌륭한 명사들이었다.
공(公)은 오왕조(고려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45년간 벼슬을 하셨으며 고종 7년(서기1220년)에 “벽상삼한대광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리부사”로 취임하고 시(詩)와 술(酒)과 거문고와 바둑을 즐기시다가 고종17년(서기1230년)에 향년 78세로 졸서(卒逝)하시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봉황산(김포)에 예장하도록 하였고 시호(諡號)를 내리어“영렬(英烈)”이라 하였다.

1. 서기1153년 고려 의종7년 계유(癸酉) 출생
초명(初名)은 극의(克儀)이고 뒤에 고쳐서 의(儀)로 하였으며 자(字) 는 절지(節之)이고 본관(本貫)은 봉화(奉化)이며 사적(賜籍)을 김포 (金浦)로 받았다.

(서기 1170년 8월 정중부의 난으로 무신이 정권을  잡았다.)
2. 서기1175년 명종5년 을미(乙未) 23세 때
처음으로 청도감무(淸道監務)의 벼슬을 하고 당대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에 들어갔다.
군(郡)을 다스릴때는 행실을 바르게 닦고 청렴결백하며 굳세고 정직하여 정사(政事)에 흔들림이 없었으므로 그 지방에서 청도철상공(淸道 鐵相公)이라 불리었다.
3. 서기1183년 명종13년 공 31세 때
청도감무(淸道監務)에서 팔관보판관(八關寶判官)으로 전보되다.
4. 서기1184년 명종14년 갑진(甲辰) 공 32세 때 9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문극겸이 지공거(知貢擧), 지주사(知奏事) 임민비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31인에게 급제를 하사할 때 영렬공(英烈公)은 장원으로 급제를 하셨고 내시(內侍)에 적을 두었다.
5. 서기1196년 명종26년 병진(丙辰) 공 45세 때 최충헌이 국정에 당(當)하여 문사를 구할때에 이종규(李宗揆)라는 이가 공을 추천하였다.

(무신 최충헌가(家)는 이로부터 62년간 집권하였다.)
6. 서기 1198년 신종 원년 무오(戊午) 공 46세 때부터 서기1203년 신종6년 계해(癸亥) 51세 까지의 벼슬은 합문지후, 이부원외랑, 보문각직강, 기거사인, 한림시강학사, 동궁시강학사, 상서우승, 우간의대부,
태자찬선대부를 역임하셨다.
7. 서기1208년 희종4년 무진(戊辰) 공 56세 때 4월에 우부승선(右副承宣)인 공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황보관 등 41인에게 급제를 내리셨다.
8. 서기 1212년 강종 1년 임신(壬申) 공 60세때 6월에 지주상(知奏事)인 공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전경성, 최자 등 25인에게 급제를 내렸다.
동년 7월에 금나라 사신이 와서 의봉정문(儀鳳正門)으로 들어오려하므로 임금이 공에게 명하여 효유(曉諭 : 알아듣게 타이름)케 하니 금나라 사신은 공의 말에 크게 감복하여 서문(西門)으로 들어 왔다고 한다.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다.

 


9. 서기 1213년 강종 2년 계유(癸酉) 공 61세 때
승진하여 벼슬이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에 이르렀다.
이때에 이인로(李仁老)가 고문(誥文)을 지어 임금께 바쳤다.
12월에 공작(孔雀)을 시제로 삼고 공께서 사십여운을 부르는 시회(詩會)에서 이규보가 잠시도 붓을 멈추지 않고 쓰니 진강후(최충헌의 작위)가  감탄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0. 서기 1215년 고종 1년 갑술(甲戌) 공 62세 때
5월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인 공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산기상시 채정이 동지공거가 되어 김신정 등 30인에게 급제를 내렸다.
11. 서기 1215년 고종 2년 을해(乙亥) 공 63새 때
상부에 들어 “금자광록대부 정단문학 좌복사 보문각대학사 수국사(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左僕射 寶文閣大學士 修國史)”가 되었다.
12월에 이규보, 진화, 혜문 등이 바둑에 대한 시를 짖고 한림승지인 공이 심사를 하였는데 이규보가 으뜸이고 진화가 다음이었다.
13. 서기 1216년 고종 3년 병자(丙子) 공 64세 때
5월부터 약 1년반 동안에 한림별곡을 지어졌다고 보며 나라에서는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위하여 학사연(學士宴)을 열거나 추천희를  열어 주는 것이 항례(恒例)였다.
이때 공의 문생(지공거(知貢擧)를 급제자를 문생으로 하였다)중에서 한사람이 일어나 별곡을 불렀다고 한다. (김동욱 “동국이상국집” 해제중)
14. 서기 1217년 고종 4년 정축(丁丑) 공 60세 때
벼슬이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 中書侍朗平章事)가 되었다.
15. 서기 1218년 고종 5년 무인(戊寅) 공 66세 때
벼슬이 문하시랑, 수문전대학사(門下侍郞 修文殿大學士)에 올랐다.
16. 서기 1219년 고종 6년 기묘(己卯) 공 67세 때
9월에 최충헌이 향년 71세로 졸(卒)하고 그 아들 최우가 집권하였다.
12월에 팔관하포(팔관회 행사 축하문)를 미쳐 올리지 못한 외방 수령들을  이규보가 탄핵하려 했으나 공이 굳이 그만 두도록 만류하였다.
17. 서기 1220년 고종7년 경진(庚辰) 공 68세 때
정월에 공은 벽상삼한대광,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리부사(壁上三韓大匡 金紫光祿大夫   守太保 門下侍郞 同中書問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判吏部事)를 치사(致仕:나이많아 벼슬을 내어 놓음)하고 덕망있는 원로들과 기로회를 만들어 날마다 향연을 배풀어 시와 술 그리고 거문고와 바둑으로써 스스로를 즐겼다.
18. 서기 1225년고종 12년 을유(乙酉) 공 75세 때
7월에 공의 子 대장군(종3품 벼슬) 금휘(琴暉)가 동북병마사가 되었다.
19. 서기 1227년 고종 14년 정해(丁亥) 공 75세 때
3월에 최우가 김회선, 노지정, 아윤위, 신작정, 주연지, 금휘 등 장군들이 전왕(前王)을 받들기로 모의하였다 하여 모두 교동 바다에 빠뜨려 죽였으며 처자와 형제를 원지에 나누어 유배하였다.

20. 서기 1230년 고종 17년 경인(庚寅) 공 78세 때
1월 26일 향년 78세로 생을 마쳤으며 고종이 매우 슬퍼하여 당해관청에 명하여 장사를 치르게 하니 봉황산 기슭에 장사지내고  시호(諡號)를 내려 영렬(英烈)이라 하였다.

추밀원사 김광식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6남 3녀를 두었다.

 (서기 1231년에는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서기 1232년에는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겼다.)

 


21. 서기 1627년 조선조 인조 5년 정묘(丁卯) 공 死後 397년
휘(諱) 상현(尙絃 :동래공 후손 18세 號 반천 문과급제 현감) 祖가 김포(金浦) 장릉전사(章陵典祀)에 참례(參禮)한뒤 전(前) 김포현리(金浦縣吏)이며 당시84세 되는 공 희철의 증언으로 장릉경내의 영렬공 묘소를 찾아서 재물과 축문을 갖추어 제사를 올렸다.

심분영록(尋墳塋錄)이 전한다.
22. 서기 1727년 영조 3년 정미(丁未) 공 사후 497년
봉화 추원재 재사 후강(奉化 追遠齋 齋舍 後崗)하고 봉화에서는 처음으로 제사를 올렸다.
23. 서기 1784년 정조 8년 갑진(甲辰)
문계서원(文溪書院)에 입향(入享)하였다.
24. 서기 1898년 광무 2년 무술(戊戌)
가을에 단소(壇所)에 비를 세웠다.
25. 서기 1972년 10월 12일
단비를 개갈(改碣)하였다. 비문은 금기풍이 썼다.
26. 서기 1986년 11월 1일 단비를 개갈하였다. 비문은 금용국 근서
27. 서기 1987년 10월 12일
대종회에서 영열공 신도비를 추원재 재사 입구에 건립하였다.
비문은 금병훈이 근찬하고 김충현, 금기풍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