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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토홍)홍씨족보서문모음(인제공홍섬)

어풍대08 2017. 7. 30. 22:40

남양홍씨중앙화수회(南陽洪氏中央花樹會)



남양홍씨세보 권지일(南陽洪氏世譜 卷之一)에 수록되어 있는 전 보서문(前 譜序文)을 수록

하니 많이 읽고 읽어 우리의 뜻을 알아 조상(祖上)에대한 숭조정신함양(崇祖精神涵養)에 기여(寄與)하였으면 합니다.



○ 丙子新刊世譜序(暹) -- 병자신간세보서(섬)

○ 丁卯重刊世譜序(宇遠) -- 정묘중간세보서(우원)

○ 世譜小識(履元) -- 세보소지(이원)

○ 己亥重刊世譜序(梓) -- 기해중간세보서(재)

○ 名字排行圖(檍) -- 명자배행도(억)


○ 壬子重刊世譜序(疇) -- 임자중간세보서(주)

○ 重刊排行圖(健厚) -- 중간배행도(건후)

○ 行列字統一序(瑨善) -- 항렬자통일서(진선)

○ 己亥重刊世譜序(瑨善) -- 기해중간세보서(진선)

○ 庚申重刊世譜序(思觀) -- 경신중간세보서(사관)

○ 庚午重刊南陽洪氏世譜序(思弼) -- 경오중간남양홍씨세보서(사필)




1. 병자신간남양홍씨세보서(丙子新刊南陽洪氏世譜 序)



옛날부터 양반의 집에서 모두 족보를 모셔 온 것은 위로 그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고 아래로 자손들로 하여금 조상을 높이고 일가간에 화목하는 도리를 알게 하여 은연한 속에 국가(國家)의 교화(敎化)를 도와서 아름다운 풍속을 이룩하려는 것이니 소 명윤(蘇明允)의 미산족보서(眉山族譜序)를 보면 알 수 있다.

남양 홍씨는 우리 나라의 대성으로 대대로 유명(有名)한 분들이 있어서 좋은 벼슬을 해 온지가 거의 수백년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만이 족보가 없으니 아마도 전에는 있었는데 중간에 실전(失傳)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몇 해 전에 족질(族姪)인 현령(縣令) 박 정립(朴挺立)이 그의 외증조(外曾祖)인 홍 승지(洪承旨) 식(湜)이 손수 쓰신 소첩(小帖)을 싸가지고 와서 보여주는데 선세(先世)의 휘자(諱字)와 본토(本土)의 호적(戶籍)이었으니 이것은 내가 옛날부터 보기를 원하던 것으로 아직 보지 못한 것이다.

육대조 전서부군(典書府君)으로부터 그 아래는 홍 문광공(洪文匡公) 귀달(貴達)이 지은 왕부(王父) 갈문에 자세히 기록 되었고 남양에 계신 여러 산소에는 모두 묘표가 있어서 상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십이대조 휘 선행(先幸)이하는 정립이 보여 준 소첩을 본 뒤에야 비로소 우리 선조가 아무 아무이신 줄을 알게 되었다.

종조(從祖) 승지공(承旨公)이 연산군(燕山君) 갑자년에 혹화(酷禍)를 당하여 집안에 보관해오던 서적(書籍)이 모두 몰수(沒收)를 당하고 이 소첩(小帖)만이 상자 속에 남아 있은지도 거의 칠십여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우리 몇 사람의 눈에 뜨이게 되었으니 이것은 어떤 사람의 지헤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혹은 숨어 있다가 혹은 나타나는 것이 아마도 어떤 운수가 그 가운데서 작용(作用)을 하는 것만 같다

아!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지금 병사(兵使) 할아버님 이상의 남녀와 형제와 자손을 모두 기록하지 못한 것은 생략(省略)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실은 문적을 상고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조상의 내력을 내가 다행하게도 알게 되었으니 여러 자손들이 우리 할아버지의 자손이 되는 사람들의 조상의 내력을 알려고 하는 마음이 어찌 나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드디어 그 내력을 엮어서 홍씨의 족보를 만들고 인쇄(印刷)에 붙여서 오랜 후세에 전하게 하여 여러 제질(弟姪)들과 함께 즐기는 바이다.

만력(萬曆) 병자년 여름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섬(暹)은 머리를 조아리고 서(序)함.



◎ 인재 부군(忍齋府君)께서 박 정립(朴挺立)이 싸가지고 온 소첩을 얻어서 족보를 편찬하시고 인하여 이 서문을 지어 손수 써서 붙이고 인출(印出) 하셨는데 그 목판(木板)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없어지고 오직 인본(印本)만이 있었다.

증왕고(曾王考)께서 수십통을 모사(模寫)하여 제종에게 분배해 주었고 왕고(王考)께서 또 구본(舊本)같이 판각(板刻)을 하려다가 결국 완성하지 못했었다.

 지금 종인(宗人) 봉사(奉事) 호(灝)가 내외손(內外孫)들에게 돈을 거두고 또 판목(板木)도 마련하여 각수(刻手)에게 맡기는 한편 외손(外孫) 허변(許 土弁)은 타인(他人)의 족보까지 모아들여서 자세히 대조(對照)하여 잘못 된 것을 교정하였다.

그런데 승지공(承旨公)이 기록해 놓으신 소첩이 사화(史禍)에서 없어지지 않고 칠십여년만에 인재부군의 손에 돌아와서 인재부군이 족보로 편찬하시고 서문도 지으신 것이 또 난리 속에 없어진지가 일백 십이년이나 되는 오늘에 다시 나오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랴.

그러나 호(灝)씨와 허 변(許 土弁)의 정성이 아니면 어찌 능히 우리 조상님의 뜻을 이어 받들어 이런 일을 했겠는가

아! 사람이 일가간에 서로 친애(친애)하지 않는 것은 그 근본을 알지 못해서이다

이 족보를 보고 인재공의 『우리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모신』다는 교훈을 본받으면 아무리 먼 일가라도 어찌 화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문(序文)이 너무 오래 되어서 결획(缺화)이 많으므로 오대손 가상(可相)은 손씻고 조심 조심 보충하고 그 일을 기록합니다.



2. 정묘중간남양홍씨세보서(丁卯重刊南陽洪氏世譜 序)



홍씨는 남양의 대성으로 자손도 많고 인물도 많이 낳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선세(先世)의 족보를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지 못하고 홍 승지 식(洪承旨湜)이 일찍이 만들어논 소첩(小帖)이 비록 여러 파(派)의 갈래를 수록(收錄)하지 못했으나 그 직조(直祖)의 계통을 이어 당신까지를 기록하여 집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연산(燕山) 갑자년에 혹화를 당하여 돌아가시고 가장집물(家藏什物)은 모두 몰수(歿收)를 당했는데 홀로 이 소첩만이 몰수에서 빠져서 그 뒤 칠십여년만에 홍 상국(洪相國) 섬(暹)이 이 소첩을 얻어 보게 되므로 해서 시조(始祖)에서부터 시작하여 내려오면서 족보를 간행(刊行)하였던 것인데 임진(壬辰倭亂) 때에 그 족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 뒤 백여년만에 정랑(正郞) 정씨(淨氏)와 그의 종제 호(灝)씨는 우연히 옛날 족보를 얻어보게 되자 대단히 다행으로 생각하고 서울에 있는 여러 일가들에게 널리 알려서 중간(重刊)할 것을 논의했으나 현재 우리 일가 사람들 가운데는 능히 혼자서 간행(刊行)할 능력을 가진자가 없으므로 몇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각자 자손들에게 통문을 돌려서 수단(收單)을 하게하는 한편 또 그 집안의 현편에 따라 돈을 내서 판각비(板刻費)를 충당(充當)하게 하고 또 타성(他姓) 백여 집의 족보를 모아서 서로 대조(對照)하여 잘못 된 것을 정정(訂正)하였다.

그리하여 전서공이하(典書公以下)의 전해 내려오는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에 의(依)하여 휘자(諱字)와 생졸년(生卒年)과 문무과(文武科)의 년(年)과 관직(官職)과 묘소(墓所) 및 배(配)의 모씨(某氏)의 생졸년이며 부와 조와 외조(外祖)의 관직(官職)을 모두 자세히 썼고 자손(子孫)에 있어서는 자(字) 및 생년(生年)과 모씨(某氏) 모관(某官) 모(某)의 녀(女)에게 장가든 것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여서(女서)에 있어서도 관향(貫鄕)과 문무관작(文武官爵)과 부(父)는 모관모(某官某)라 하며 여(女)의 후손은 사세(四世)에 끊었으니 대개 자세히 된 것이다

 돈을 거두어 가지고 공사(工事)를 시작했으니 호씨(灝氏)는 종인(宗人)들에게 재정(財政)을 모아 출납(出納)을 담당한 분이고 제종(諸宗)들의 수단(收單)과 타인의 족보를 모아서 교정(校正)을 맡은 허 변씨(許 土弁氏)는 외손(外孫)으로서 고금(古今)의 일을 많이 알아 보학(譜學)에 능한 사람이다

 이렇게 여러 달을 지나서 홍씨보(洪氏譜)가 완성 되었으니

아!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승지공이 만들어 놓으신 소첩이 그 무서운 사화중(史禍中)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나서 상국(相國)으로 하여금 족보의 밑절미가 되게 하였고 상국이 만들어 놓으신 족보가 그 난리 통에 다 없어지지 않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근거(根據)가 되게 하였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니냐!

대체 족보는 조상을 높이고 일가를 단합하는 것이다.

조상을 높이고 일가를 단합시키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오

천리(天理)의 당연한 것이니 사람이 하는 일은 대개 시기와 환경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천리는 하늘이 자연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니 이것이 홍씨의 족보가 결국 이룩된 것이다.

 여러 종인들이 지금 내가 옥중(獄中)에 가쳐 있는 신세임을 생각지 않고 족보의 서문을 지으라고 명령하니 나는 너무나 늙어서 겨우 목숨이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무슨 말로서 우리 일가들을 격려하겠는가

그러나 하늘에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나의 소원이다.

그러므로 삼가 우와 같이 쓰노라.

금상(今上) 십사년 정묘 삼월 십오일에

후손 우원(宇遠)은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서(序) 합니다.



3. 남양홍씨세보소지(南陽洪氏世譜小識)



일찍이 들으니 인재공(忍齋公)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안에 족보가 옛날에 참판공(참判公)이 자세히 편찬(編纂)해 놓으신 것이 있었는데 고려 말년(高麗末年)에 병화(兵禍)에 없어졌고 부제학공(副提學公)이 대강 모아 놓으신 것이 있었는데

선세(先世)의 휘자(諱字)와 직명(職名)과 대수(代數)가 자세히 되지는 않았으나 또 연산 갑자 사화(燕山甲子士禍)때에 없어졌고 그 뒤로 칠십여년을 지나 만력(萬曆 :明의 神宗의 年號)때에 이르러 승지공(承旨公)이 손수 쓰신 소첩(小帖)이 나와서 비로서 족보 한권이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인재공이 최초로 발간(發刊)하신 족보가 되는 것이다.

천계(天啓 :明의 僖宗의 年號)때에 증조고(曾祖考) 만봉공(萬峰公)이 중간(重刊)할 것을 계획하시고 상하 이책(上下二冊)으로 편찬하여 미쳐 인쇄하기 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상책(上冊)만이 남아 있었다.

할아버님 충정공(忠靖公)께서 여기에 대강 손을 보셨으나 끝을 마치지 못하셨고 그 뒤 사십여년만에 아버님께서 계속해 손을 대셔서 이책(二冊)으로 나누어 놓으시고 그 뒤 오육년(五六年)만인 숙종(肅宗) 경오년에 이르러 인쇄에 부쳤으니 이것이 둘째번으로 나온 족보로서 옛날 족보에 비교하여 자못 자세하게 되었으나 전서공(典書公) 이상의 육대(六代)는 과명(科名) 관함(官啣) 및 묘소(墓所)의 소재(所在)와 형제(兄弟)간에 퍼져나간 것이며 외손(外孫)의 성씨(姓氏)는 알아낼 방법이 없어서 다만 최초본(最初本)에 의거하여 편차(編次)를 겨우 끝내시고 미쳐 정서(精書)하기 전에 아버님이 외직(外職)으로 나가시게 되어서 교정(校正)과 정서(精書)하는 일을 인재공의 외손(外孫)인 허 변(許 土弁)에게 맡겨서 결국 출판(出版)하고 보니 선세(先世)의 과명(科名)과 관함(官啣)이 간혹 잘못 되었으며 각파(各派)의 자손과 형제의 항렬도 또한 잘못 된 곳이 많이 있고

그밖에도 잘못된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선군(先君)께서 벌써부터 개수(改修)하려 하셨으나 그럭저럭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런데 지금 연대(年代)는 점점 멀어지고 사적(事蹟)은 차츰 없어져 가고 있으니 나는 이것이 걱정이 되어서 지식(知識)이 고루(固陋)한 것을 생각지 않고 전의 두차례의 족보를 바탕으로 하여 여러 성씨(姓氏)의 족보를 참고하고 고증(考證)하여 초고(草稿)를 만들기는 했으나 식견(識見)이 부족하여 허술함이 없지 않으니

이 뒤에 다시 증수(增修)하는 것은 후인(後人)에게 맡길 뿐이다.

숭정(崇禎 :明의 思宗의 年號) 일백 이십 일년 정묘에 

     후손 이원(履元)은 삼가 씀



4. 기해중간남양홍씨세보서(己亥重刊南陽洪氏世譜 序)



항렬(行列)을 따지고 족보를 만드는 것은 씨족(氏族)을 보호하는 큰 일인 것이다.

주역(周易)에는 『일가를 모은다』했고 서경(書經)에는 『구족(九族)의 친(親)을 후(厚)하게 대우한다』했고

 주례(周禮)에는 『일가 간에 화목함으로써 민심(民心)을 얻는다』했으니 이것이 모두 족보를 두고 한말이다

그리고 한(漢)의 사마천(司馬遷)은 자서(自序)를 지었고

 반고(班固)는 자전(自傳)을 지었으니

 송(宋)의 소 순(蘇洵)의 족보가 인용(引用)하여 짓게 된 것이다 후세(後世)에 종법(宗法)이 해이(解弛)하고 족보를 명확히 하지 않아서 공자(孔子)의 후손(後孫)도 세대(世代)가 여러번 끊어졌으므로 성인(聖人)의 자손들도 종통(宗統)의 분쟁(紛爭)이 있어서 소송(訴訟)까지 제기함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족보를 간행하지 않은 실수에서 생긴 일이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

우리 홍씨의 족보는 상국(相國) 인재공(忍齋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시조의 고려(高麗) 금오위위(金吾衛尉) 휘 선행(先幸) 부군(府君)은 공의 십이대조이시다.

 금오공 이상은 전혀 징빙 할 것이 없고 금오공 이하는 대대로 유명한 분들이 계승하셨는데 십일세손 부제학(副提學) 휘 형(泂) 부군과 그 아우 승지(承旨) 휘 식(湜)이 연산조(燕山朝)에 혹화(酷禍)를 당하여 집안의 문적(文籍)이 모두 몰수(沒收)를 당하여 하나도 남은 것이 없는데 승지공이 손수 쓰신 소첩(小帖)이 간신히 그 외증손(外曾孫) 박 정립(朴挺立)의 손을 거쳐 나와서 상국께서 이를 근거로 하고 선세 묘소(先世墓所)의 여러 비갈(碑碣)들을 참고하여 족보를 출간(出刊)하였으나 널리 반질(頒帙)하지 못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모두 산질(散帙)이 되었다.

최후에 정랑공(正郞公) 정(淨)이 구간 완본(舊刊完本)을 얻어서 경향 제종(京鄕諸宗)에게 통문(通文)을 돌리고 중간(重刊)하기로 계획을 세우니 너무 오래간만에 하는 일이어서 그간에 자손이 많이 번창하여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우리 종형(宗兄) 도정공(都正公) 저(樗)와 족조(族祖) 첨지공(僉知公) 이원(履元)이 꼭 중간하려고 애를 쓰시다가 성사(成事)를 못했던 것이다.

지금 종중(宗中)의 제공(諸公)들이 다시 모임을 갖고 돈을 모으며 수단을 거두어서 즉시 출간(出刊)에 이르렀으니 대개 처음에 족보를 출판하므로부터 지금 이백 삼십사년이 되는 동안에 무릇 서번째로 중간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어려우며 그다지도 중간(中間)이 떴는가 소 노천(蘇老泉)이 이른바 『한 사람의 몸이 나누어서 나중에는 서로 보고도 알지 못하는 정도에 이르는 것은 내가 마음으로 대단히 슬퍼한다』는 것이다.

슬퍼하기만하면 어찌 하나 그저 우리 족보를 만들 것 뿐이다.

진실로 족보를 만들고 또 만들며 수세(數世) 만큼씩 반드시 틀림없이 중간하면 비록 백대(百代)가 지나더라도 다 알 수가 있어서 조상을 높이고 일가간에 화목하여 구족(九族)을 친하게 지내는 도(道)가 여기서부터 생겨 나게 될 것이니 그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대개 들으니 그 제도(制度)는 구보(舊譜)를 바탕으로 하여 편찬(編纂)하는데 간이(簡易)한 방법으로 알아보기에 편리하게 만들었으나 재력(財力)이 넉넉지 못하여 위선 활자(活字)로 인쇄(印刷)하여서 비록 판본(板本) 같이 오래 보관하지는 못하나 비유하면 잘하는 노래는 능히 계승(繼承)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도 계승해 내려가면 대대(代代)로 이런 일을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래오래 전해 내려갈 것을 누가 알 것이냐.

족보 역사가 끝날 무렵에 일가분들이 나에게 서문을 지으라 하니 내가 감히 늙었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씨족을 보호하는데 큰 줄거리를 써 주면서 우리 일가들의 후손 여러분에게 격려(激勵)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금상(今上) 삼년 기해 맹동에

가선대부 원임 사헌부 대사헌 재(嘉善大夫原任司憲府大司憲梓)는 삼가 서함



이름자 항렬도

도원량이 장사공에게 준 시서에 이르기를『공은 나의 일가 할아버지로서 대사마 할아버지의 자손인데 댓수가 이미 멀어짐에 따라 서로 보고도 일가인 줄을 모르고 마치 지나가는 사람처럼 상대하게 되었다』

그 시에 『같은 근원의 물이 줄기가 나뉘어 흐르니 사람도 바뀌고 세대도 멀어졌다.

 아! 저 지나가는 사람처럼 서로 보고도 우물쭈물 하는구나』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한탄한 말이다

아! 슬프다

 한몸이 형제로 나뉘고 사촌 육촌 팔촌으로 나뉘고 여기서부터 먼촌 일가로 퍼져 나가니 나의 자신이 볼 때에는 가깝고 먼 일가가 있지만 우리 할아버지로 보실 때에는 꼭 같은 자손들이다 꼭 같은 우리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끝에 가서는 마치 길에 지나가는 사람처럼 보게 되어서 길에서 서로 만나도 같은 성의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인 줄을 모르게 되니 이것이 도 원량이 한탄한 바다

우리 일가들이 시조로부터 지금 이십여세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살면서 일평생에 서로 보지도 못한 사람이 열에서 일곱 여덟이 되고 항렬자도 각파마다 각기 달라서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을 듣고도 어떤 항렬에 속하는 일가인지를 모르기도 하고 혹은 항렬자가 같아도 세대(世代)가 다를 수도 있으니 아무리 길에 지나가는 사람처럼 대우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기해보(己亥譜)를 중간(重刊)할 때에 어떤 일가 사람이 말하기를 『일가들을 한데 묶고 화목하게 지내려면 족보의 계렬(系列)을 밝히고 미리 항렬자를 만들어서 온 종중에 세대(世代)를 일정(一定)하게 하는 것이 먼 세대에까지 화목을 도모하는 요소(要素)가 되지 않겠느냐?』

하니 모두들 『좋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십사세(二十四世)서부터 이십팔세까지 항렬자를 의논해 결정하고 보책(譜冊) 끝에 기록해논 것이다

 아! 우리 일가들은 진실로 능히 대대로 이 법을 틀림없이 지켜나가면 지금부터 우리 일가의 대수(代數)는 환하게 순서(循序)가 있어서 길에 지나가는 사람처럼 보게 되지 않을 것이다.

기해년 중동 상완(己亥仲冬上浣檍題)

二十四世 ○후(○厚), 二十五世 화(火), 二十六世 사○(思○), 二十七世 의(衣), 二十八世 ○익(○翊).



5. 임자중수남양홍씨세보서(壬子重修南陽洪氏世譜 序)



대대 족보는 한집안의 문헌이다

족보를 만들면 대수(代數)가 명확하게 되고 대수가 명확하게 되면 일가 간에 친애(親愛)하는 덕(德)이 생기기 마련이다.

 친애하는 덕이 생기므로 해서 조상들의 마음을 따르게 되고 조상들의 마음을 따르게 되므로 해서 자손들의 법규(法規)는 여기서 생기게 되는 것이니 족보를 간행하는 것이 어찌 무의미한 일이라 하겠는가.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너의 할아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나 꼭 힘써야 한다』하였으니

아! 우리가 족보를 간행한 것은 전후(前後)를 합하여 겨우 삼차(三次)에 불과했는데 지금부터 올해년까지는 칠십사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을 지냈으니 어찌 그리 어렵기도 하고 그동안도 많이 떻는가

아! 상국(相國) 인재공(忍齋公)께서 족보를 처음 출간(出刊)하신 뒤로부터 지금 기해 중간(己亥重刊)에 이르러서 삼편(三編)이 되었으니 그 규모(規模)의 근엄(謹嚴)하고 상략(祥略)함을 알 수 있다.

지남번에 종중(宗中)이 많이 모여 중지(衆知)를 모으고 명하전(命下錢)을 거두며 수단(收單)을 받아서 원근(遠近)의 촌수(寸數)를 표시하고 계통을 밝혔으니 대개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예(禮)요 두루 돌보는 의(義)요 조상을 사랑하는 경(敬)인 것이다.

 금년에 와서 출간 한 책이 칠권(七卷)이 되었으니 자손의 번창함과 종족(宗族)의 신중(愼重)함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표현(表現)되었다.

그런데 경향의 여러 일가들은 세월이 오랠수록 촌수가 멀어지고 종강(宗綱)이 점점 해이해짐에 따라 마치 길에 지나가는 사람같이 서로 보고도 모르게 될까 걱정이 되어서 여러해 계획한 끝에 비로소 준공(竣功)을 보게 된 것은 아마도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지금에 와서야 조상의 마음을 따르고 자손의 법을 세우게 되었으니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을 끝내고 여러 일가들이 나에게 그 일의 줄거리를 간추려 기록하라는 부탁이 있었다

지금 나는 늙기도 했고 또 글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이 글을 쓸 수 있으며 더구나 우리 족보의 본말(本末)이 구보(舊譜)에 자세히 기록 되어 있는 즉 다시 군더덕이 말을 붙일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끝까지 한말을 써서 뒤에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疇)도 이번 일에 참여한 것을 알리지 않을수 없다.

금상(今上) 삼년 임자 중하(仲夏)에

전 상주 목사(尙州牧使) 주(疇)는 삼가 서함



중간 항렬도

항렬을 가지고 일가를 단합(團合)시키는 것은 옛날 제도(制度)다

우리 일가는 본래 많지를 못하여 부제학공(副提學公)

참의공(참議公) 장민공(莊敏公) 시정공(寺正公) 사파뿐이다

각파의 항렬이 달라서 그 항렬자를 듣고도 어떤 파인 줄을 몰라 길에 지나가는 사람과 같이 대우 하게 되기가 쉬우니 기해보(己亥譜) 중간(重刊)때에 항렬자를 제정(制定)하게 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건데 그 때에 제정한 항렬자(行列字)에 불화변(火邊)도 있고 옷의변(衣邊)도 있으니 화자(火字)와 의자(衣字)는 그다지 많지 못하여 이름마다 그 글자를 붙이기가 어려운 것을 제종(諸宗)들이 항상 걱정해 왔었다.

임자보(壬子譜) 중간 때에 제종들이 회의 끝에 항렬도를 다시 고치게 되었으니

아! 너희들에게 후하게 물려주었으니 여유(餘裕)있게 후세에 물려주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으므로 유자(裕字)로써 받고 여유있게 물려 받았으면 효도(孝道)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으므로 사자(思字)로써 받고

효도를 생각하면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으므로 선자(善字)로써 받고

착한 일을 했으면 계승(繼承)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으므로 승자(承字)로써 받고

계승했으면 화(和)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으므로 화자(和字)로써 받고

화화게 된 뒤에는 인도(人道)가 확립(確立)하여 천명의 성(天命之性)을 따라 갈 수 있으므로 성자(性字)로써 받고

시경(詩經)에 『너의 자식을 가르쳐서 착한 것으로 이어 나가라』했으므로 교자(敎字)로써 받게 했다.

여러분들이 『좋다』하여 배행(排行)의 이유를 우와 같이 삼가 기록하오니 지금부터 계속해 배항도를 따라 이름을 지어서 어김이 없으면 먼 일가도 찿을 수 있고 화목을 도모하는 일도(一道)가 될 것이니 제종(諸宗)들의 계승(繼承)하는 사람들에게 심심한 부탁을 드리는 바이다.

임진년 중하(仲夏)에 전 현감 건후(健厚)는 씀

二十四世 ○후(○厚), 二十五世 ○유(○裕), 二十六世 사○(思○), 二十七世 ○선(○선), 二十八世 승○(承○), 二十九世 ○화(○和), 三十世 성○(性○), 三十一世 ○교(○敎).



6. 기해중간남양홍씨세보 서(己亥重刊南陽洪氏世譜 序)



개보지불폐(盖譜之不可廢)와 불가불명(不可不明)은 자상국인재부군창수병자보(自相國忍齋府君創修丙子譜)로 지상주목사공주씨종성임자범사보(至尙州牧使公疇氏踵成壬子凡四譜)에 기지차진즉감불췌론(旣至且盡則敢不贅論)이오나 세강속말(世降俗末)하여 민속(民俗)이 귀후(歸厚)치 못함으로 자감갈궐수보(玆敢竭蹶修譜)하여 온 바입니다.

그러나 수보(修譜)만으로 효과(효果)를 얻는 것이 아니오

피람(披覽)하여야 소목(昭穆)이 분명(分明)하고 종지(宗支)가 자별(自別)하나니 고인소위십문(古人所謂十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함이 독실(篤實)한 격언(格言)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소씨소운람오보자(蘇氏所云覽吾譜者) 효제지심(孝悌之心)이 유연(油然)히 생(生)이라 함이 간절(懇切)한 경고(警告)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금번재편(今番再編)된 보책(譜冊)은 거번종간(去煩從簡)되어 피람(披覽)이 더욱 편의(便宜)하오니 념차경고(念此警告)하고 체차격언(體此格言)하여 수시고찰(隨時考察)함으로써 아국고유문화(我國固有文化)인 인륜문명(人倫文明)을 수호(守護)하는 동시(同時)에 위로 조선(祖先)의 유덕(遺德)을 계승선양(繼承宣揚)하며 아래로 자손(子孫)의 돈목(敦睦)을 영세불체(永世不替)케 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희(噫)라 - 오가세보(吾家世譜)가 자임자(自壬子)로 영지백유팔사(令至百有八祀) - 라 기간중간지론(其間重刊之論)도 불무(不無)이었으나 논의(論議)가 귀일(歸一)되지 못하여 각자파보(各自派譜)에 지(止)하였든 것을 호상자차(互相咨嗟)하든 중월재을미(中월在乙未)(一九五五年)동십월(冬十月)전서부군향사일(典書府君享祀日)에 원근제종(遠近諸宗)이 순모첨동(詢謀僉同)하여 화수회(花樹會)가 창립(創立)되자 수보지론(修譜之論)이 재기(再起)되었으나 남북분단(南北分斷)의 유감(遺憾)과 사거력면(事巨力綿)의 난관(難關)으로 거이(遽爾) 취역(就役)치 못하였다가 세정유정기총회(歲丁酉定期總會)에서 만난(萬難)을 배제(排除)하고 첨종(僉宗)의 탄심갈력(탄心竭力)으로 대동보간행(大同譜刊行)을 의결추진중(議決推進中) 이남(以南)에서도 누단(漏單)이 불무(不無)하오니 여등(余等)의 성박소치(誠薄所致)인지 홍씨지천(洪氏之天) 불우소관(不佑所關)인지 알 수 없으나 유감지의(遺憾之意)를 난금(難禁)이오며 간행과정(刊行課程)에 있어서도 시이고금(時異古今)이라 이론(異論)이 없지를 않았으나 반복검토(反復檢討)한바 고지은례(古之殷禮)의 탕탕평평(蕩蕩平平)과 주례(周禮)의 존존귀귀(尊尊貴貴)와 결승(結繩)과 서계(書契)가 각의기시(各宜其時)한 것이므로 시의(時宜)를 참작(참酌)하고 중론(衆論)을 순응(順應)하였을 뿐입니다. 불민(不敏)한 나로서 사역(斯役)에 첨감(첨監)케 되어 첨종시(僉宗氏)의 열성(熱誠)을 힘입어 이주년(二周年)만에 근근(僅僅)히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게 되오니 우리의 흔행(欣幸)만이 아니라 제(諸) 선군자(先君子)의 유의미취(有意未就)하셨던 숙원(宿願)이 계성(繼成)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갔습니다. 불문(不文)한 여(余)로도 일언(一言)의 소감(所感)이 없을 수 없어 전말(顚末)을 여우약기(如右略記)하오며 간세속수(間世續修)하여 이보금일미진(以補今日未盡)을 공사(恭사)하는 바입니다.

단기사천이백구십이년기해음구월 일

(檀紀 4292年 己亥 陰 九月 日) 

  남양홍씨화수회장 진선 근서(南陽洪氏花樹會長 瑨善 謹序)



항렬자통일 서(行列字統一 序)

국지족제(國之族制)는 항렬자(行列字)로 소목(昭穆)을 엄정명백(嚴正明白)하게 하여 어느 성(姓)이라도 그 명자(名字)만 보면 모조(某祖)의 기대손(幾代孫)임을 다 알 수 있게 된 최고(最高)의 인륜문명(人倫文明)이다.

우리는 국내(國內)의 대성망족(大姓望族)으로 선세(先世)에서 보첩(譜牒)을 수행(修行)하사 후세(後世)에 수범(垂範)하셨으나 세강속말(世降俗末)하고 지분파별(支分派別)하여 대동보간 출사업(大同譜刊出事業)이 너무 거창(巨創)함으로 유의막수자(有意莫遂者) - 우금육십여년(于今六十餘年)에 파보(派譜)가 각출(各出)함에 지(至)하여 그 주견(主見)과 주장(主張)이 부동(不同)함으로 그 항렬자(行列字)로 각이(各異)하니 보학(譜學)을 심구(深究)한 자(者)가 아니면 항렬(行列)의 모자(某字)가 모자(某字)와 상통(相通)하여 기숙여형(其叔與兄)을 난분(難分)이오 더구나 당성홍씨(唐城洪氏)와 혼동(混同)될 우려(憂慮)가 불무(不無)한지라 내어세(乃於歲) 을미동(乙未冬)에 남양등동(南陽登洞) 전서부군묘향일(典書府君墓享日)에 각파제종(各派諸宗)이 참집(참集)하여 화수회(花樹會)를 창립(創立)하고 화수회제일차사업(花樹會第一次事業)으로 대동보간행전(大同譜刊行前)에 위선 항렬자통일(爲先 行列字統一)에 순모(詢謀)가 첨동(僉同)하여 시월이십팔일(是月二十八日)에 이항렬자통일(以行列字統一)로 사파대표(四派代表)가 회우화수회본부(會于花樹會本部)하니 구보소정(舊譜所定) 교자이상(敎字以上)은 불감개론(不敢改論)이오 이단승성(以但承性)이 기음(其音)이 근사(近似)하여 불무어혐고(不無語嫌故)로 성자(性字)를 이용자(以容字)로 개정(改定)하고 현자이하(鉉字以下)는 대호군공(大護軍公) 문희공양파(文僖公兩派)의 파보소정(派譜所定)이 각이(各異)하여 취사비변고(取舍非便故)로 신정배행도(新定排行圖)가 여좌(如左)하니 비감훼양파지정제(非敢毁兩派之定制)요 내통일지책야(乃統一之策也)라 자자이왕(自玆以往)으로 삼십년이(三十年而) 일보대동즉(一譜大同則) 무령일여시구급지거(無令一如是救急之擧)요 이존조서족지도(而尊祖서族之道)는 자유소명정불체자의(自由所明正不替者矣)리라.

단기사천이백팔십팔년을미소춘(檀紀 4288年 乙未 小春) 

    남양홍씨화수회 회장 진선 배수 근서

(南陽洪氏花樹會 會長 瑨善 拜手 謹書)



항렬자배행도(行列字排行圖)



二十五世 ○裕(○유), 永○(영○). 二十六世 思○(사○), ○秀(○수). 二十七世 ○善(○선), 顯○(현○). 二十八世 承○(승○). 二十九世 ○和(○화), 宜○(의○). 三十世 容○(용○), 性○(성○). 三十一世 ○敎(○교). 三十二世 鉉○(현○), 鎭○(진○). 三十三世 ○源(○원). 三十四世 柱○(주○). 三十五世 ○熙(○희). 三十六世 世○(세○). 三十七世 ○鎭(○진). 三十八世 漢○(한○). 三十九世 ○求(○구). 四十世 炳○(병○). 四十一世 ○圭(○규).

※ 1990년 8월 25일 족보보정심의위원회의(族譜補正審議委員會議)에서 25세 永○, 26세 ○秀, 27세 顯○, 29세 宜○을 병용(倂用)하기로 추인의결(追認議決)하였음.



7. 경신중간남양홍씨세보 서(庚申重刊南陽洪氏世譜 序)



우리가 문화민족(文化民族)임을 자타(自他)가 공인(共認)하는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그 문화(文化)의 표준(標準)과 한계(限界)는 어떤 방법(方法)으로 측정(測定)해야 할 것인가 물론(勿論) 그 민족(民族)의 역사(歷史)와 문명(文明)의 척도(尺度)로서 계정(計定)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반만년(半萬年)의 역사(歷史)가 있고 독립(獨立)된 문자(文字)가 있으니 누구라도 우리가 문화민족(文化民族)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역사(歷史)는 다만 국사(國史)에만 의존(依存)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個人)이나 씨족(氏族)의 전통(傳統)으로 내려오는 사적(事蹟)이 더욱 큰 비중(比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 즉 그 민족(民族)의 전통과 사상(思想)을 고루 담은 책자(冊字)는 족보(族譜)보다 더 구비(具備)된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

족보(族譜)는 중국(中國)에서 먼저 시작(始作)되었으나 우리가 그 제도(制度)를 수입(輸入)한 이래(以來) 극도(極度)로 발달(發達)되여 타국(他國)의 추종(追從)을 불허(不許)하고 있으니 모(某) 성(姓)을 막론(莫論)하고 항렬(行列)의 제도(制度)가 완비(完備)되여 성명(姓名)만 보면 모조(某祖)의 기대손(幾代孫)임을 당장 알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모조(某祖)의 외손(外孫)이 되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조직적(組織的)으로 발달(發達)된 문헌(文獻)인가 그러나 국사(國史)와 족보(族譜)는 반드시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선세(先世)의 사적(事蹟)을 자세히 알고서 좋은 점을 사모해 배우고 나쁜점이 혹시 있으면 경계해 고치는데 큰 의의(義意)와 목적(目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문권(漢文圈)에 속(屬)하는 국가(國家)이기 때문에 일찍이 그 영역(領域)을 벗어나지 못하고 각종문헌(各種文獻)의 기록(記錄)이 거의가 한자(漢字)로 되어서 족보역시(族譜亦是) 순한문(純漢文)이 아닌 것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문(漢文)을 숭상하지 않고 국문(國文)을 사용(使用)하는 시대(時代)로 접어들어서 앞으로 후진(後進)들은 집집마다 족보(族譜)를 모신다해도 독해(讀解)하기 조차 곤란(困難)한 처지(處地)에 도달(到達)하였으니 이것은 족보(族譜)가 있어도 없는 것과 별(別)로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제종(諸宗)들은 이 점을 감안하여 여러 해를 두고 논의(論議)해

오던 나머지 무오(戊午)(一九七八年)년 화수회총회석상(花樹會總會席上)에서 대동보 중간(大同譜 重刊)이 거론(擧論)되어 휘자(諱字) 밑에 국문(國文)으로 음(音)을 붙이고 사유란(事由欄)에 국문(國文)으로 토(吐)를 달며 묘소(墓所)는 산(山)의 번지(番地)까지 기입(記入)하고 간지(干支) 밑에 서기(西紀)를 괄호내(括弧內)에 표시(表示)하여 연대순(年代順)에 참고(참考)의 편의(便宜)를 도모(圖謀)하며 현물가(現物價)를 참작(참酌)하여 관이천동일천(冠二千童一千)원으로 단금(單金)을 의결(議決)하고 동년십일월(同年十一月)부터 중간사업(重刊事業)에

착수(着手)하여 경향제종(京鄕諸宗)의 지대(至大)한 협찬(協贊)과 열성(熱誠)으로 금년팔월(今年八月)에 양장본(洋裝本) 상·중·하(上·中·下)삼책(三冊)이 완성(完成)되었으니 오종(吾宗)의 일대혁신적(一大革新的)인 거사업(巨事業)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여러 집무자제위(執務者諸位)의 노고(勞苦)에 감사(感謝)를 드리고 아울러 제종(諸宗)과 함께 돈목(敦睦)의 의(誼)와 봉선(奉先)의 도(道)를 일층앙양(一層昻揚)할 것을 재삼(再三)다짐 하는 바입니다.

西紀 一九八○年 庚申 八月 日 (서기 1980년 8월) 

     종손 사관(宗孫思觀)은 배수근서(拜手謹書)합니다



8. 경오중간남양홍씨세보 서(庚午重刊南陽洪氏世譜 序)



구원(久遠)한 인류사(人類史)나 민족사(民族史)가 기록(記錄)을 바탕으로 하여 밝혀 가듯이 한 씨족사(氏族史)도 혈통상(血統上)으로 이어 내려온 헤아리기 어려운 유구(悠久)한 내역(來歷)에 대하여는 논외(論外)로 하고 역시 그 씨족(氏族)에 관한 기록(記錄)을 전거(典據)로 하여 그 시원(始源)을 조명(照明)하고 또 연면(連綿)히 혈통(血統)을 이어 내려온 기록(記錄)의 시말(始末)을 조명(照明)한 것이 씨족사(氏族史)라고 하겠다.

또 족보(族譜)는 비조(鼻祖)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혈통(血統)을 대대(代代)로 종(從)과 횡(橫)으로 접맥(接脈)하여 한 씨족(氏族)의 시말(始末)의 전모(全貌)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밝혀 놓은 것이며 여기에는 조상(祖上)의 거룩한 얼과 위대(偉大)한 공적(功績)이 낱낱이 담겨져 있으므로 후생(後生)에게는 가승(家乘)인 동시에 지상지고(至上至高)의 보전(寶典)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남양홍씨(토홍)(南陽洪氏 土洪)는 고려(高麗) 중엽(中葉) 금오위(金吾衛) 휘(諱) 선행부군(先幸府君)이 창족(創族)의 시조(始祖)이시며

이래명철(爾來明哲)한 자손(子孫)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현인(賢人) 군자(君子) 현관(顯官) 청백리(淸白吏) 석학(碩學) 등(等) 출중(出衆)한 어른이 많이 배출되어 국가(國家)에 크게 공(功)을 세운 명문(名門)으로 그 명성(名聲)이 널리 세상(世上)에 알려져 내려왔거니와

다만 칠백여년(七百餘年)의 긴 역사(歷史)를 가진 우리 씨족(氏族)이 수적(數的)으로 너무 미미(微微)하여 크게 번성(蕃盛)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 그지 없다.

화수회(花樹會)의 존립(存立)에 대한 그 취지(趣旨) 목적(目的)은 대체(大體)로 숭조상문(崇祖尙門) 수족(收族)과 화합돈목(和合敦睦) 및 후생(後生)의 계도(啓導) 등(等)을 그 대강(大綱)으로 하거니와 우리 홍씨(洪氏)는 우리가 자긍(自矜)하는 혈통(血統)의 순수성(純粹性) 역시(亦是) 앞으로도 하자(瑕疵)없이 엄정(嚴正)하게 그 법도(法度)와 전통(傳統)을 수호(守護)해 나가야 할 것이다.

一九五五年 陰十月一日(1955년 음 10월1일) 화수회(花樹會)가 창립(創立)된지 어언 삼십오년(三十五年)의 성상(星霜)이 흘러 갔거니와 그 긴 세월(歲月)동안 몇 차례의 발전(發展)할 수 있는 계기(契機)가 마련되어 가는 고비마다 뜻하지 않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으면서 결국(結局)은 제자리 걸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挫折)과 실의(失意)에 싸여 오늘에 이르러 왔다.

이러한 심체(沈滯)한 상태(狀態)로 아무 대책(對策)도 없이 차일피일(此日彼日) 허송세월(虛送歲月)만 할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과오(過誤)를 뉘우치고 반성(反省)하면서 앞으로의 선후책(先後策)을 안출(案出)하여 착실(着實)하게 실천(實踐)에 옮기는 것만이 현안(懸案) 해결(解決)에 첩경(捷徑)이므로

一九八八年 二月(1988년2월) 신기원(新紀元)을 이룩할 수 있는 방안(方案)의 하나로 우선 회관(會館)을 건립(建立)할 것을 발의(發議)하고 종인(宗人)과 더불어 공고(鞏固)한 의지(意志)를 가지고 다시 출발(出發)하여 좋은 성과(成果)를 거두어 가고 있다.

 바야흐로 진행중(進行中)에 있는 대동보(大同譜) 중수간행(重修刊行)도 그 목표(目標) 달성(達成)에 큰 몫을하여 주리라

기대(期待)하는 바이며 무엇보다 절감(切感)하는 바는 오래 오래 종사(宗事)를 위하여 봉사심(奉仕心)이 돈독(敦篤)한 분이 많이 참여(참與)하여 진솔(眞率)하게 희생적(犧牲的) 정신(精神)으로 실효성(實效性)있게 운영(運營)해 나간다면 멀지 않아 탄탄대로(坦坦大路)를 달리듯 일취월장(日就月將) 건전(健全)하게 발전(發展)하여 나갈 것이며 또 첨종(僉宗)의 화수회(花樹會)에 대한 심기(心氣)도 일전(一轉)하여 흐뭇한 마음으로 화수회사업(花樹會事業)에 기여(寄與)하는 바 지대(至大)하리라 예견(豫見)하는 바이다.

이번에 중수(重修) 간행(刊行)하는 경오보(庚午譜)는

 경신보(庚申譜)(一九八○年版)를 간행(刊行)한지 만 십년(十年)만에 다시 간행(刊行)하게 되어 년수(年數)로 볼 때 빠른 감(感)이 있으나 경신보(庚申譜)의 오류(誤謬)나 첨삭(添削)할 부분을 시정(是正)하여 후생(後生)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후대(後代)에 가서는 그 잘못된 부분(部分)의 수정(修正)이 어려울 것으로 추찰(推察)되기 때문이며

그 수정(修正)의 정확(正確)을 기(期)하고자 수정(修正)할 부분을 발췌(拔萃)하여 족보보정심의위원회(族譜補正審議委員會)에서 엄정(嚴正)한 심의(審議)를 거쳐 그 완전(完全)을 기(期)하였다.

또 새로 계보도(系譜圖)를 작성(作成)하여 자기(自己) 계통(系統)의 색인(索引)을 쉽게하고 역대(歷代) 선조(先祖)의 비갈(碑碣)도 원문(原文)을 번역(飜譯)하여 그 해독(解讀)에 편리케 하였으며 묘소(墓所) 묘비(墓碑) 등(等) 묘역(墓域)의 경광(景光)스러운 모습을 실어 체재(體裁)와 품격(品格)을 높이는 등 나름대로의 성의(誠意)와 노력(努力)을 기울였다.

따라서 앞으로는 족보(族譜)의 모든 참조(參照)는 이 경오보(庚午譜)(一九九○年版)을 정본(원본)((正本(原本))으로 하여 참조(참照)할 것이며 아울러 다시 가필(加筆)이나 수개(修改)는 단호(斷乎)히 불용(不容)할 것을 언급(言及)해 두는 바이다.

근래(近來)의 젊은 세대(世代)의 경향(傾向)이 극도로 물질(物質)에 편중(偏重)하고 환락적(歡樂的) 성향(性向)으로 전락(轉落)하여 윤리(倫理)와 예절(禮節)을 중시(重視)하여 온 우리 민족(民族)의 양속(良俗)이 하나 하나 사라져 감으로 해서 정신생활(精神生活)에 일대수난(一大受難)을 겪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社會的) 병폐(病弊)의 치술(治術)은 국가적(國家的) 차원에서도 쉬운 일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거니와 이러한 혼란상(混亂相)을 성과(成果)도 거두지 못하는 학교교육(學校敎育)에만 의존(依存)하여 수수방관(袖手傍觀)할 것이 아니라 계도(啓導)해 나갈 방향(方向)을 설정(設定)하고 여건(與件)이 조성(造成)되는 대로 육영사업(育英事業)과 더불어 윤리(倫理)와 도덕적(道德的) 가치관(價値觀)을 높일 수 있는 정신교육(精神敎育)도 병행(倂行)하여 문중(門中)에서 출중(出衆)한 인재(人才)가 많이 나오도록 지향(志向)해 나가기를 기망(冀望)하는 바이다.

제언(諸彦)이 출연(出捐)하여 주시는 성금(誠金)과 지원(支援)의 덕택(德澤)으로 멀지 않아 우리 화수회(花樹會)가 건첩(健捷)한 보조(步調)로 화수(花樹) 배양(培養)의 대업(大業)을 충실(充實)하게 완수(完遂)하며 영원(永遠)히 영원(永遠)히 전진(前進)해 나가기를 심혼(心魂)을 경주(傾注)하여 기원(祈願)하며 삼가 붓을 놉니다.

西紀 一九九○年 陰 九月 日(서기1990년 음 9월 일)

     이십오대손 사필 배수근서(25代孫 思弼 拜手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