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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호군공파黔澗公諱靖行狀.

어풍대08 2016. 6. 10. 14:43

풍양조씨호군공파黔澗公諱靖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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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검간선생의할머니는南陽洪氏洪彦慶의따님이요..

검간선생의어머니는바로南陽洪氏중랑장파12世도승지洪汝剛선생의고손자,幽谷察方洪胤崔公과缶溪洪氏홍언충선생의따님,南陽洪氏슬하의따님이시다.

즉,검간선생의어머니는南陽洪氏시며 검간선생의외옹은유곡찰방홍윤최公이시고...검간선생의진외조부는부계洪氏彦忠.진외증조부는大提學文匡公洪貴達선생이시다.

公의 靖 字安仲이요 黔澗이다

嘉靖 乙卯年(明宗 10,西紀 1555) 822일 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神采拔俗하였고 겨우 말을 배울 무렵에 이미 文字를 알아 말을 하기만 하면 奇特함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같이 있을때면 우뚝하여 動作法度가 있었고 능히 집안에서 떠드는것을 禁止 시켰으니 육,칠세부터 이미 그랬었다.

乙丑年(宣祖 20,西紀 1565)嶺南의 선비들이 上疏하여 妖僧 普雨마침 하려고 直長公()을 서울 蓮池洞으로 訪問 하였을때 直長公承旨公(光憲)은 시골에 내려 갔으므로 이 아우인 可跬公 翊과 더불어 迎接節次禮法되로 하고 酒食을 대접하니 諸公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感歎하기를 참으로 楊氏家門設果兒와 같다 하였다.

 그해에 直長公이 아주 尙州로 돌아왔다.

公 兄弟家庭敎育을 잘받아 文藝早成하였으므로 십팔세때에 이미 鄕試合格하였고 이로부터 시볼때마다 優等을 차지하게 되니 소문이 자자하여 당시의 인사들이 趙氏 雙璧이라 指稱하였다.

 이십시절에 寒岡 鄭逑先生門下遊學하여 小學心經같은 글을 배웠는데 先生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이름을 지어주고 격려하기를 남달리 하였다.

藥峰先生 金克一의 집안에 장가 들고나서는 鶴峰先生 (金誠一 藥峰)에게서 朱子書를 배웠는데 더욱 親炙하여 服膺하였다.

임진년(선조25,서기 1592)의 난리에서는 母夫人을 모시고 聞慶蘆洞으로 避難을 갔었으나 오히려 倭賊이 혹시라도 接近할까 염려하여 두 아우들로 하여금 俗離山 골짜기 속으로 모시고 가서 寓居하게 하고 蘆洞에 머물면서 모든 供養에 소요되는 物資를 힘을 다해 周旋해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오월에 尙州 사람들이 성안에 머물러잇는 을 치고자하여 山谷間檄書를 돌리므로 이 삼십여인을 糾合하여 引率하고 塗步城下에 이르러보니 한사람도 모인자가 없었다.

칠월 정해일에 공이 權公 景虎, 鄭公 經世, 李弘道, 蔡有喜등과 더불어 咸昌黃嶺 僧舍에 모여 奇兵을 일으키려 하는데 淸州사람 李逢이란 자가 武略이 있다는 이름이 있으므로 推戴하여 上將을 삼고 參謀가 되어 書記兼掌하였다.

서로 더불어 北向拜谷하고 誓約하기를 臨賊하여 먼저 도망하는자는 한다.

이미 誓約하고나서 물러가기를 꾀하는 자는 한다.

 을 어기고 失期한 자는 한다.

 流言蜚語를 퍼뜨리어 群衆眩惑 시키는 자는 아울러 軍法으로 다스린다.

하니 群衆慴伏하엿다.

그런데 咸昌縣監 李國弼山中으로 避難하던길에 監司에게 거짓 報告하기를 李逢등이 年小儒生들을 引率하여 義擧冑稱하고 官軍으로 義兵을 삼아 官軍捕斬首級까지 몰래 가져다가 자기들의 공으로 삼고 있는데 縣監으로서는 손을 댈수가 없다 하였다.

 공은 생각하기를 이자들이 妖邪하고 陰凶한짓을 되풀이 하면 불칙한 화가 있겠으니 營門에 고하여 알리지 않을수 없다.

하였다.

그때에 鶴峯先生方伯으로서 居昌에서 駐節하고 있었고 金山知禮에 있는 들이 그 사이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李逢으로 하여금 찿아가게 하였으니 이 사잇길로 가서 謀紙를 올려 常況을 말하니 方伯이 마음을 기울여 淸納하였다.

 이 인하여 時務相議하여 確定하고 또 廣範하게 召募官을 둘것을 要請하니 方伯이 크게 기쁘하여 鄭愚伏으로 尙州 召募官을 삼고 權景虎에게는 咸昌을 맡기고 申譚에게는 聞慶을 맡기어 각각 鄕兵募集하게 하되 官軍에 구애될것없이 아울러 義兵長指揮를 받게하고 關門三邑(尙州 聞慶 咸昌)에 들려 軍糧弓矢를 많이 補給토록하고 또 監營의 비축물자를 출고시켜 군수품을 조달케하니 진중에 크게 기뻐하였다.

공은 말씀하기를 義兵이 다소 完璧하게 되었으니 軍中事朝廷報告하지 않을수 없다.

 하여 드디어 起兵 末上疏文으로 지어 全 沙西 湜으로 하여금 巡營에 갖다 올리고 그곳에서 다시 行在所傳達토록 하였다.

십이일에 方伯咸昌聞慶 두고을의 經報에 의하여 義兵陳에서 募集官軍本縣駐屯시키게하니 募軍들이 모두 흩어지려 하였다.

이 또 巡營에 가되 癸巳年(선조 26,서기 1593)정월 초하룻날에 밤을 무릅쓰고 山陰에 다달아 方伯을 뵈옵고 利害에 관하여 陳設하니 方伯本陣과 두 현에 傳令하여 合勢하여 左右衛兵이 되어 가지고 다같이 尙州判官 鄭起龍指揮를받도록 하고 또 兵糧器械를 보급하여 주는지라 공이 徒步進入하여 陣中에 이르니 群衆들이 좋아서 날뛰었다.

李逢이 말하기를 完山君 李軸牙山에서 우리 陣中으로 오고자 한다니 이제 權景虎蔡有喜등을 보내서 맞아오는것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이 말하기를 은 우리 義兵陣三邑侵害를 받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는것이나 完山君으로 말하면 一代勳臣으로서 下邑에서 멈칫거리고 있는것은 妻子를 위한 計劃에서이고 그가 여기에 오자 하는것은 後日의 처지를 위함에 불과하다.

우리가 倡義한 것은 名分이 바르고 일이 순조로우니 이들의 손을 빌리는것을 중하게 여김은 불가하다 하였다,

 이월에 공이 淸州放出米要請하였으나 許可하지 않음으로 드디어 建義陣에 가서 빨리 주리란 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으니 前後해서 얻은 軍糧이 여러 白石이었고 弓矢器械등은 셀수가 없엇다.

食糧이 넉넉하고 兵器가 이로우니 士卒들이 모두 能力을 다하여 捕斬首級이 매우 많았다.

공이 비록 一線에 나가 激戰을 한 功勞는 없었으나 敵陣中出入하면서 어렵고 험한것을 피하지 않고 周旋應燮하여 하는 일마다 機會에 들어 맞앗다.

공의 能力忌疾하는 守令들이 그들의 長技를 팔아주지 않앗으나 義兵陣에서는 한결같이 討賊에만 힘써서 要衝掌握하고 賊路遮斷하였으니 三邑遺民들이 生命保存할수 있었던것은 의 힘이었다.

그러나 공은 자신의 공으로 삼지 않앗으므로 세상에서도 이를 알수가 없었다.

乙未年(선조 28,서기 1595)에 비로소 故鄕에 돌아왔는데 들이 아직도 海邑駐屯하고 있었으므로 공은 時事悚懼하게 여겨 근심하면서 요행으로 살려는 뜻이 없었다.

丙申年(선조29,서기 1596) 겨울에 再次 動하니 朝廷에서는 다시 避難갈 뜻을 가졌었다.

공은 同志들과 倡議 陣蔬하여 상감의 親征請願하였다.

 공이 스스로 上疏文起草하였는데 嚴正하고 短折하여 상감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것이 있었었다.

 를 전후 세차례 올려 모두 상감에게 報聞되었고 이래저래 避難議論도 가라앉고 말앗다.

공이 를 올리기 전에 朝廷에서 別科를 보였는데 親舊들이 공에게 應試하기를 勸告하엿으나 공은 不可하다.

하였고 故鄕 尙州判官 權吉壬辰亂에서 戰死事蹟秦上하여 (表彰)을 가할것을 請願하였으며 얼마후에 白衣體察使 李公 元翼從事官이 되어 晉陽으로 갔다.

 乙亥年 (선조32,서기 1599)薦擧禧陵(中宗繼妃 章敬王后 尹氏 陵)參奉除授되었고 庚子年 (선조33,서기1600)廣興倉 副奉事로 옮겼다.

그때 새로이 大亂을 겪고 난후라서 國庫會計廢棄된데다가 出納할때에 들은 文書弄奸하는 것이었다.

 倉庫門의 자물쇠를 굳게 잠그고 감시를 철저히 함에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여 國庫貯蓄이 남아돌게 되었고 興論이 좋았음으로 상감의 특명으로 昇飯하였다.

 계묘년(선조 36, 서기 1603)에 군기사 注簿로 옮겼고 겨울에 司馬試에 합격하여 12월에 戶曹佐郞에 임명되엇으나 當路者들에게 거슬려서 罷職되었다.

 을사년에 다시 戶曹佐郞으로 임명되었는데 謝恩肅拜하기전에 大科에 올라 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고

 司憲府 監察로 옮겼다가 北評事에 제수되었는데 赴任하지 않았다.

정미년(선조40, 서기 1607)慶州提督에 제수되어서는 직임을 소홀하게 여기지않고 돌아다니면서 學業賊課를 매우 부지런하게하니 諸生들이 머리를 숙여 종아리를 맞아도 감히 업신여기지 못했다.

무신년(선조41, 서기 1608)海南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현에는 옛날부터 斗米法이라는 것이 있어서 봄,가을로 백성에게서 거두어 上貢과 고을의 費用에 공급하여 왔다.

그런데 縣監이 여러번이나 사람다운 사람을 얻지못하여 假貸漏落되면 다시 그 다음해의 所納督責하여 왔으므로 그 고을의 痼疾的弊端이 되었다.

공은 생각하기를 斗米法이 백성들에게 매우 편리한데도 그 를 받는것은 씀씀이가 節制없기 때문이라하여 鄕人들과 約束議定하되 위에 貢納하는것이 아니면 州官이라도 침범하지 못한다.

하니 시행한지 얼마안되어 민력이 차차 펴지게되었다.

 監事가 이를 좋게여겨 그 條列後面跋文을 지어 붙이고 여러고을에 令布하여 한결같이 通用하는 規例로 삼았었다.

 신해년(광해 3,서기 1611)에 공은 洪道(忠淸道) 都事가 되어서는 風裁(品格)自持하니 首領들이 두려워하였고 권력있는 자가 防納을 하는데 上貢藥材品質이 매우 나빴으므로 공이 받아들이지않아 씹히는바 되었더니 사건으로 罷職되었다. 겨울에 淸道郡守除授되었는데 맨먼저 金節孝(克一),濯纓(金馹孫),三足堂(金大有) 三賢慕所參拜하고 守墓할 묘지기 몇집을 두어 주었으며 三足堂軍役에 당한자가 있었으므로 공이 公文으로 이를 免除시켜 香火를 받들게 할것을 請願하니 監事가 그 建議를 따랐다.

의 인사들이 바야흐로 三賢詞 建立을 경영하는데 財力이 부족함으로 祿俸을 떼어 公費에 제공하고 院齊를 세워 諸生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講讀 하도록 하였다.

 雲門山이 잇었는데 水石이 좋은 名勝地이다.

공이 公務餘暇에 흥이 나면 의례 찿아가니 吏隱이란 이름이 있었다.

정사년(광해 9,서기 1617)滿期가 되어 돌아왔다.

 계해년(인조원년,서기 1623)에 인조가 登極하자 元老들과 俊才들이 모두 進出하였는데 공은 外任으로 金堤郡守補職되었다.

金堤郡에는 土豪右族들이 많았는데 공이 한결같이 法令으로 다스리어 巨室들이 함부로 侵略하지 못하게하니 약한 백성들이 살아낫다.

갑자년(인조2,서기 1624)李适大亂하여 상감이 公州行幸하자 공은 扈從하였다가 御駕還京하자 本郡으로 돌아왔다.

병인년(인조 4,서기 1626)에 기용되어 刑曹正郞 兼 春秋館 紀注官이 되었는데 謝恩肅拜 하기전에 通禮院 相禮 兼 春秋館 編修官에 옮겨지고 司瞻寺正으로 옮겨졌다.

정묘년(인조5,서기 1627)奉常寺正에 임명되었다.

奉常寺는 제사의 용도를 管掌하는 곳인데 貯藏所에 널판도 깔지않고 제수로 쓰는 물품들을 濕氣찬 바닥에 함부로 쌓아 두었기 때문에 축축하고 不淨하여 腐敗하기까지 하므로 쓸수가 없었다.

은 생각하기를 신에게 바치는 物品을 이처럼 더럽게 하여서는 안된다 하고 새로이 널판을 만들어 貯藏하고 奸吏들이 축낸 물품을 모두 徵收하여 옛모습되로 還元시켰다.

 北派入冠(姜弘立亂)했을때는 江道 江華島扈從하였었고 滿期가 되면 에따라 通政으로 昇進되게 되어 있었는데 공이 昇進을 바라는것 같이 嫌惡하여 무진년(인조 6,서기 1628)謝病環家하였다.

임신년(인조10,서기 1632)에 다시 軍資監正除授되었으나 就任하지 않앗고 병자년(인조14년 서기1636) 721일에 正寢에서 考終하였으니 春秋 82세였다.

 공은 氣稟을 타고남에 매우 완전하였고 骨格淸潔하엿다.

 젊어서부터 음식을 배부를때까지 먹은적이 없고 60이후로는 果實같은 것만 먹었다.

겨울에도 솜을 얇게 튼 덧저고리를 입고서도 健康이 더욱 좋아 八十高齡에도 다닐때 지팡이를 짚지 않았고 온종일 登山散步하여도 倦怠를 느끼지 않았고 말을 타고 먼길을 가도 疲勞하다 하지 않았다.

촛불아래 에서도 능히 細字를 보앗으며 筆力稭正하도 힘차서 소시와 다름 없었으니 남들이 이르기를 地上仙이라 하였으며 돌아가던 날에도 정신이 錯亂되지 않고 웃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공은 天分이 매우 곧은데다 學力으로 濟度하였으므로 剛正方嚴하고 忠厚敦挌하여 人倫篤實하고 職事勸勉하였다.

 居家處鄕이나 修己治人에 잇어서 각각 그 分數에 맞도록 하고 貧富 險易 內外 尊卑 등으로 해서 加損하는 바는 없었다.

 弱冠시절부터 이미 律己로서하여 논의가 정직하엿으므로 臺閣의 물망이 있었으나 時輩들에 의하여 되었고 늦게야 科第에 올랐으나 항상 祿俸父母奉養에 미치지 못한 이잇어 忌日을 당하면 悲號涕泣하면서 追慕不己하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적시게 했다. 家衆들 다루기를 溫和하고도 嚴正하게하고 宗族에게는 그 恩惠敦睦을 다하였으며 朋友들과는 반드시 誠信으로 하였다.

 居鄕接物함에 忠厚資祥하고 親疎로해서 文嗣를 두지않았으나 마음가짐은 철석과 같고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니 鄕吏 사람들이 畏敬하여 그들의 집에서는 어떤일이 생기면 반드시 말하기를 黔澗선생이 들으시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시지나 않을런지 하였다.

 登科하던날에 柳文忠公(成龍)이 말을 恭遜하게 하고 입을 다물라는 警戒를 하였으니 그 平生努力을 알만하다.

그러나 을 즐기고 를 좋아하되 지난날 잘잘못은 생각하지 아니하여 남의 過失을 보면 正色하고 規責하다가도 작은 조그만 長點만 보면 誠心으로 기뻐하여 남들이 듣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사람들과 酬酌하노라면 和氣碣然하였으니 사람들이 容接을 받을수 잇었던것을 으로 여겼으며 모든 鄕中의의론은 공에게서 나왔고 비록 官府政事일지라도 瑕疵가 있어면 반드시 이해를 具陳하여 極言하되 말은 곧고 理論은 밝으니 守令된 사람들도 屈義하고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尙州에는 원래 書院이 없었고 亂離를 치른 뒤에는 學校頹廢되었었다. 공은 諸賢들과 더불어 道南書院設立하여 五賢尊祠하니 士者들이 學業을 익힐곳이 있게되었다.

 長川書堂을 옮겨다 세우고 蒙士引導하였으며 書堂城東 魯谷 丹丘 등처에서 修稧하며 呂氏鄕約하였는데 모든 施設이나 講明하는 바의 규모나 科條(規程)등이 크고 작고간에 모두 完厚하여 模範 될만하였다.

尙州 고장의 士風江右에서 가장 훌륭한것은 실로 이때에 倡導에 힘입은것이다.

日常生活에서 自奉談泊하게 하여 먹는 飮食하기가 寒土와도 같앗으나 그 한 사람을 賑恤하고 급한 사정을 救濟하는 것은 天性에서 우러난 것이어서 貧寒한 이웃과 親族들이 혜택을 받지않는 이가 없었으므로 街巷에는 飢餓로 쓰러지는 사람이 없었고 境內에 피난왔던 인사들도 모두 달려가서 혜택을 받았다.

공은 읽지않는 書籍이 없었으나 더욱 四子書(,,,)著力하여 일상생활에서 經驗하는 자료로 삼았다.

晩年에는 朱子書 읽기를 좋아하여 그 수용에 切實한것이면 반드시 券面笏記하여두고 스스로 警省하였다.

공은 天人利慾分別是非義理의 분간에 있어서 論理를 다투면서 세밀히 분석하여 결정할때에는 一刀兩斷하였으므로 그 出處去就를 오직 에만 견주어 卓越한 여유가 있었다. 문장을 지음에는 精深純約하여 그때 情流들의 推眼하는바 되었으나 공은 또한 文藝自居하자 않았으므로 著述한 것이 散秩되어 전하지 않고 子孫들이 募集한 것으로서 다만 詩文 若干編辰巳錄 時文 若干券이 있을뿐이다.

공이 돌아간지 95년후인 경술년(영조6,서기 1730)에 사림들이 공을 涑水書院合享하였다.

 

洗馬平原 李光庭 謹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