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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리뽕나무

어풍대08 2015. 4. 23. 21:46

조선시대양잠(養蠶)은국가지대사였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약 1.4m에 이르는 거목 으로 고사되었다.

수령과 식수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세종이 각 도마다 상전을 만들어 누에치기를 장려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세종대에 심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신동면()잠실리() 였고 조선조 세종임금 때부터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한 뽕나무 밭으로 설정하고 뽕나무묘를 양성해서 농민에게 시범을 보였던 곳일 뿐만아니라 왕실의 잠소()가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이에서 잠실리라는 동명이 얻어지게 된 것이다.

성현()의 ≪용재총화 ≫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 잠원동 잠실 외에도 아차산 밑에 동잠실()과 한강 아래 원단동()에 신잠실을 설치하고 별좌()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잠실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현재 나무의 상태는 원줄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자랐는데 가지 중간에서 절단되었고 나무의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다.

지금 이 나무 주변에는 옛 잠소의 상전지()였음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에 10여 그루의 뽕나무를 심어 가꾸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잠실리뽕나무 [蠶室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시기념물1호라네요...

뽕나무아래서男女가자주만나면,남여상열지사(男女相서로상기쁠열之事)가있게마련인즉.   지금도여인네들이가슴에뽕?을넣는건  옛부터뽕나무아래서의相悅之事때문이아닌가?

하는생각이든다.

잠실 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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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뽕나무
(蠶室 뽕나무)
대한민국 서울특별시기념물

 

종목 기념물 제1호
(1973년 1월 26일 지정)
수량 1주
시대 조선시대
위치
잠실뽕나무
잠실뽕나무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1-54번지
좌표 북위 37° 30′ 50.32″ 동경 127° 4′ 54.56″ / 북위 37.5139778° 동경 127.0818222° / 37.5139778; 127.0818222좌표: 북위 37° 30′ 50.32″ 동경 127° 4′ 54.56″ / 북위 37.5139778° 동경 127.0818222° / 37.5139778; 127.0818222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잠실리의뽕나무
<del>대한민국 대한민국천연기념물</del>
종목 천연기념물 제77호
(1962년 12월 3일 지정)
(1962년 12월 3일 해지)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잠실 뽕나무(蠶室 뽕나무)는 한남대교 남서쪽, 서울신동초등학교 북서쪽 잠원로변에 있는 뽕나무이다.

 1973년 1월 26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뽕나무(Morus alba Linnaeus)는 뽕나무과 뽕나무속에 속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 또는 관목(灌木)으로서 오디나무ㆍ새뽕나무라고도 한다.

중국ㆍ우수리ㆍ몽고코카사스중앙아시아유럽 등지에 넓게 분포하며 북위 59도 55분까지 식재한다.

 가지에 가시가 있으며 소지(小枝)에 털이 있다.

잎은 3개로 갈라지는 것과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난형(卵形)인 것이 있다.

3개로 갈라지는 잎은 둔두(鈍頭) 원저(圓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한 것은 예두(銳頭)이고 넓은 예저(銳底)이며 길이 6∼10㎝, 나비 3∼6㎝로서 표면에 잔털이 있고 뒷면에 융모(絨毛)가 있다. 엽병(葉柄)은 길이 15∼25㎜로서 털이 있다.

 꽃은 이가화(二家花, 암수의 꽃이 각각 다른 나무에서 핌)로서 5∼6월에 피며, 열매는 취과(取果)로서 둥글며 지름 2∼3㎝ 정도로서 육질(肉質)이고 9월에 적색으로 익으며, 수과는 5㎜정도로서 흑색이다. 과육(果肉)은 달고 먹을 수 있다.

산뽕나무에 비해 암술대가 짧고 잎의 톱니가 둔하다.

《잠실 뽕나무》는 한남대교 남서쪽, 서울신동초등학교 북서쪽 잠원로변(한신아파트 120동 앞)에 위치하며, 가슴높이직경〔胸高直徑〕65㎝로서 조선 초기에 심어진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식수시기와 수령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종∼연산군 재위기간에 이 지역 일대에 신잠실(新蠶室)이 설치될 때 심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고사된 상태로서 원줄기가 1.2m 높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고 3.5m 높이에서 잘린 상태이다.

이 나무의 뿌리에서 싹터 자란 듯 수고 4m, 흉고직경 9㎝에 달하는 나무가 바로 옆에 서 있다.

 이 뽕나무 주변에는 수고 10m, 흉고직경 30㎝에 달하는 큰 나무로부터 수고 1.5m, 흉고직경 4.5㎝에 달하는 어린 것까지 8주 정도가 길이 11m, 폭 7m의 화단에 심겨져 있고 단지 주변 곳곳에 어린 것들이 식재되어 있다.

이 뽕나무가 잠실리뽕나무로 불리는 것은 이곳이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였기 때문인데

1963년 서울에 편입될 때 이미 현 송파구 (당시는 성동구)에 잠실동이 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잠」자와 신동면 신원리「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칭한 것이다.

 따라서 지하철 잠원역도 잠실역과의 혼동을 막기 위해 잠원역으로 불렀다.

 흔히 잠실이라 하면 민간에서 잠종을 받아다가 뽕잎을 먹이고 누에를 치는 곳을 일컫는다.

그러나 조선전기 각종 문헌에서 볼 수 있는 잠실은 일반 민가의 잠실이 아니라 국립양잠소 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의미한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의 예에 따라 우선 궁중에 잠실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궁중에 잠실을 설치한 목적은 중전과 세자빈이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 치는 일의 공들임을 익히도록 하며 백성에게 길쌈의 시범을 보이는 데에 있었다.

태종은 양잠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잠실도회를 설치·운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왕 16년(1416) 2월 우선 지방에 시범 잠실도회를 설치하니 이것이 잠실도회의 효시이다.

그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양잠법을 견문시키고 이를 본받아 양잠 기술을 익히도록 함에 있었다.

 서울지역에 잠실을 설치한 시기는 세종 때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3개의 잠실이 설치되었다.

즉 연희궁의 서잠실과 아차산 아래 동잠실(현 송파구 잠실동) 그리고 잠원동 지역의 신잠실이 있었다.

신잠실의 설치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용재총화》에 신잠실 기사가 수록된 것으로 보아 성종∼연산군 재위 때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신잠실은 동·서잠실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 초까지 잠원동에는 뽕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잠종을 보급하였으며 잠업강습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자금의잠원동삼거리에 조선조때부터심어져서길려졌던뽕나무가보존되어있으니.....서울기념물1호잠실리뽕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