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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달의처節婦安東金氏旌石.

어풍대08 2014. 11. 20. 21:35

내촌면사무소에서 동추공(諱 宗淑) 묘소 방면으로 10여분 올라가다 보면 동추공 재실(俱 慶齋) 못미처 길 왼편에 안동김씨 열녀비가 있다..

이 비석 앞면에는 成化十二年九月十四日

(성화십이년구월십사일)

故行成均館司成

 (고행성균관사성)

洪義達妻(홍의달처)

 節婦安東金氏旌石 (절부안동김씨정석)’이라고 쓰인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부인은 문정공(諱 礩)의 누이다.

부인은 홍씨 문중에 출가한 이후 어질고 착한 아내로 살았다.

그런데 남편 홍의달이 자식도 없는 상황에서 일찍 죽고 말았다. 이에 부인은 크게 애통해하며 내촌면 음현리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 부인은 여종 한 명을 대동하고 남편의 묘를 돌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며 묘를 돌보는 와중에 땅에 닿은 무릎이 썩기도 하였다.

그런데 부인은 이에 개의치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곡을 하는 와중에 어느 날 묘 옆으로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여종은 두려운 빛으로 이 사실을 알렸으나 부인은

죽는 것이 소원인데, 이제 무엇이 두렵겠느냐하고 오히려 태연하였다.

  그 후 호랑이는 매일 찾아와서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가곤 하였다.

이렇게 묘곡(墓哭) 3년을 마치고 부인이 집으로 돌아오던 날 호랑이도 집 근처까지 배웅해 주고 산속으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홍의달은 조선 세조 때 목사(牧使),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한 분이다.

그의 아내 김씨 부인의 절개와 행적을 기리기 위해 535년 전인 성종 7(1476) 나라에서 왕명으로 세운 열녀비가 바로 이 비석이다.

  이 비는 초선초기의 양식인 옥개를 갖추었으며, 화강암의 높이는 비신 210cm, 70cm, 두께 40cm의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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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義達;남양(당성)홍씨중랑장파12世大宗孫조선개국추성협찬2등공신,자헌대부,호조판서,집현전대제학,남양군,諡文景諱吉旼公의손자요,

역시 자헌대부이조판서보문각대제학, 남양군 으로 인수대비의외옹으로좌의정에증직되신,諡文良諱汝方公의3男이신,司直洪亨用公의次男이시며 성균관사성을지내셨다.

***성균관사성( )!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 둔 종삼품(從三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지사(: )가 1원으로 대제학(大提學)이 정례대로 겸직하며,

동지사(: ) 2원, 대사성(: ), 좨주(: ) 각 1원이 있고, 아래로 사예(: ) 2원, 사업(: ) 1원, 직강(: ) 4원, 전적(: ) 13원, 박사(: ), 학정(: ), 학록(: ), 학유(: ) 각 3원이 있다. 대사성 이하 성균관에 소속된 관원을 총칭하여 관직()이라고 하였다.

1392년(태조 1) 좨주, 1401년(태종 1)에 다시
사성(司成)으로 고쳤다.

경국대전에는 정원 2원으로 증원되었으나, 1658년(효종 9)에 1원을 감원하고, 좨주 1원을 새로 두었다. 문묘() 외 제례()가 있을 때는 이를 주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네이버 지식백과] 성균관사성 [成均館司成] (관직명사전, 2011.1.7,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