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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사초下와忠憲公.洪世恭기록들..

어풍대08 2014. 7. 16. 14:02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1(壬辰日錄一) 만력 20년 4월 13일부터 5월 29일까지 쓰고 그쳤는데, 1개월 남짓이 된다.

4월


13일 일본 국왕 수길(秀吉)은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嘉)와 평행장(平行長)ㆍ정성(政成)ㆍ청정(淸正) 등을 보내 대거 침범하여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첨사 정발(鄭撥)과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을 죽이며 성중의 사람들을 도륙(屠戮)하였다.

 수사 박홍(朴泓)과 병사 이각(李珏)은 변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진(鎭)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며, 각 고을의 수령들도 소문을 듣고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4ㆍ5일도 못 되어 여러 군이 함락당하였다.

별록(別錄) : 이때에 부산 첨사 정발은 수군을 거느리고 마침 절양도(絶洋島)에서 수렵을 크게 벌였는데, 전날의 취기(醉氣)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13일 사시(巳時)에 어떤 사람이 와서 해종도(海宗島)에 정체 불명의 배가 나타났다고 하자 정발은 말하기를,
“세견선(歲遣船)이 오랫 동안 오지 않더니, 이제 오는 모양이다.”
하고, 개의하지 않았다.
 배가 가까워짐에 따라 왜선에서는 연달아 총을 쏘아댔다.
 정발은 비로소 적임을 알고 정신 없이 진(陣)으로 돌아왔다. 성에 들어오자마자 적은 이미 상륙하여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정발은 한 발의 화살도 쏘지 못하고 계책도 내놓은 것이 없었는데 적은 벌써 배에 올라 정발의 목을 베어 매어 달고, 노소 가릴 것 없이 성 안의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앞에는 정발이 성에 들어 왔다고 했으나 뒤에는 적이 배에 올라 정발의 목을 베었다고 하여 전후의 문의(文義)가 모순됨.

14일(계묘) 동래가 함락되니,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별장 홍윤관(洪允寬)은 모두 전사하였으며, 절도사 이각(李珏)과 수사(水使) 박홍(朴泓)은 진을 버리고 도망갔다.

적은 부산으로부터 동래성 밑에 들이닥쳐서 곧장 저돌적으로 대들어 형세가 극히 창궐하니, 성중 사람들은 겁에 질려 어떤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송상현은 원래 선비인데 장수의 재질이 있어 현관(縣官)에서 뛰어올라 본직(本職)을 맡게 되었다.

 성(城)과 기계의 수리가 대략 끝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데도 날이 부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성 밖의 사면에 극히 견고히 참호(塹壕)를 파고 목책을 설치하였으며, 그 주위에 잡목을 많이 심었다.

 이 날에도 성을 순시하여 부하들을 독려하고 스스로 남문을 지켰는데 적이 침범하여 성 밖의 잡목 숲속으로 들어 와서는 화살과 돌을 막아내다가 묘시(卯時)에서 사시(巳時)말까지 대거 쳐들어왔다.

 별장 홍윤관은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송상현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태가 이토록 험악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부(府) 뒤에 소산(蘇山)이 있는데 견고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하오니, 나와 함께 나가서 그곳을 지키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송상현은 대답하기를,

“성을 사수하지 않으면 비록 다른 곳을 확보하더라도 조정에서 나를 살려 주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가 보았자 또 무슨 방도가 있겠느냐?”

하였다.

 홍윤관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도 공과 함께 죽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이 그들을 칼로 치니, 몸이 두 동강이 났다.

 성중 사람 만여 명도 빠져 도망갈 수 없었다.
수사(水使)를 설치한 목적은 수군을 거느리고 적으로 하여금 해안에 침범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수사 박홍은 정발의 보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와 알리고는 그 역시 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병사 이각은 원래 품행이 불량한 자로 윗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알랑거리기를 잘하여 죄가 있었는데도 방면된 일이 있었다.

 적에 관한 보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왔다가 또 송상현이 성을 지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고,

“소산(蘇山)을 지키겠다.”

하였다.
15일(갑진) 병사 이각은 소산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은 패주하였다.

박진은 젊었을 때 글을 배워 성공하지 못하고 곧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번 관직을 옮기다가 마침내 뛰어 올라 본부의 부사(府使)로 오게 되었다.

 부임할 적에 사람들은 그가 연소하여 큰 부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는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는 도중에, 동래도 함락되자 이각에게 말하기를,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은 우리 것이 아니오.
내가 앞에서 적을 견제할 터이니, 공은 뒤에서 점거하였다가 내가 패하면 공이 나를 구원하고 내가 이기면 공은 협공해 주시오.
부디 약속을 저버리지 마시오.”

하니, 이각이 동의하였다.

 박진은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전면에 포진하였다.

 적은 그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마구 진격해 오는데 그 기세가 매우 예리하였다.

 이각은 박진의 군사가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도망가 버렸다.

박진은 후퇴하여도 후원군이 없으므로 역시 달아났다.
16일 박진은 밀양 앞 강에서 대패하였다.

당시 감사 김수(金睟)는 각 고을 수령들에게 분부하여 잇달아 싸움터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도중에 도망가기도 하고 문 밖에 나가자마자 도망가기도 했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은 군사를 놓아 흩어지게 하고, 이어 도망가 버렸다.

울산 군수 이언함(李彥諴)은 동래에서 적에게 붙들렸다가 이틀 후에 탈출해 왔다.

 병사와 수사가 잇달아 진을 버리니, 그 나머지 첨사ㆍ만호까지 다 기록하기는 어렵다.

부산에서 이곳까지 오도록 맞붙어 싸운 자는 하나도 없었는데, 오직 박진이 거느린 3백여 명은 소산에서 패하고 돌아와 밀양으로 달려 와서 앞 강을 지키기 위해 또 흩어진 병졸을 불러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응하는 자가 없었으며, 병력을 정돈하기 전에 적은 이미 다가왔다.

 이 날은 안개가 크게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박진도 오지 못해 군사들을 흩어져 가게 놓아 주고 마침내 성중으로 달려 들어갔다.
17일(병오) 적은 밀양 앞 강에 도착하여 장차 성을 육박할 기세였다.

박진은 동래에서 성으로 돌아온 이후, 군민을 모집하여 원병이 올 때까지 지키려 하였으나 성 안팎의 주민들이 거의 다 분산되었다.

박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드디어 창고를 불태우고, 김수가 주둔한 곳으로 달려갔다.
17일 이 보고가 이르자, 중외가 크게 진동하여 마침내 8도의 좌ㆍ우방어사(左右防禦使) 등을 나누어 보내고 이일(李鎰)을 경상도 순변사(慶尙道巡邊使)로 삼아 그날로 선발하여 보냈다.

별록 : 이 날 변방의 보고가 처음 들어오자,
 서울의 조야(朝野)는 크게 놀라서 문무 백관이 궐내에 모였다.
모두 말하기를,
“적이 침략한 의도는 하루에 정해진 것이 아니여서 사방으로 들어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급속히 영ㆍ호남의 좌ㆍ우방어사와 조방장(助防將)을 우선 출동시키소서.”
하였다.
그래서 이일을 경상도 순변사로 임명하여 보내니, 밤 4경에야 조정을 하직하였다.

또한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경상 병사 김성일(金誠一)을 잡아오게 하였다.

 대개 왜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진술한 말에 대한 죄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18일 변방의 급보가 하루에도 10여 차례나 들어오는데, 모두 적의 세력이 막대하여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도읍내의 인민들은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 모두가 붕괴할 기색이었다.
19일 비망기를 내리기를,

“전란이 급박한 이때 평상시의 규칙만을 지킬 수 없으니, 무릇 사대부로 죄를 짓고 파면되었던 자는 대소(大小)와 구근(久近)을 불문하고 모두 등용하여 소임을 맡겨 보내고, 무사로 상을 당하여 집에 있는 자는 모두 기복(起復)시킨다.”

하였다.
20일 신립(申砬)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로 삼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창사(都體察使)로 삼고,

 김응남(金應南)을 부사(副使)로 삼아 그날로 부임하게 하였다.
21일 이일(李鎰)이 문경(聞慶)에 도착하여 치계하기를,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 낼 자가 없습니다.
신은 오직 죽을 따름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궁중(宮中)도 결코 견고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미투리 등 멀리 가는 도구를 구입하고, 또 사복시에 명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말을 정돈케 하여 비상시의 사용에 대비하게 하였다.
22일 신립(申砬)이 출발에 앞서 면대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병조 홍여순(洪汝諄)은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못하여 군중에게 큰 실망을 주었으니, 벌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크게 노하여 김응남(金應南)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 또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을 기복시켜 도원수로 임명하여 한강에서 군대를 훈련하게 하였다.
23일 상은 내수사 별좌 김공량(金公諒)에게 내수사 노복(奴僕)으로 활쏘기를 잘하는 자 2백 여명을 거느리고 대내(大內)를 숙직하게 하였다.
○ 그때 남쪽에서 점차 긴박해지는 상황을 보고하자 장안의 일반 백성 중에는 외부로 피난하는 자가 많았고,

 각사(各司)의 관원 중에도 숨고 출사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과 좌찬성 최황(崔滉)은 맨 먼저 가족을 시골로 내려보냈다.

 상은 윤두수를 한 번 쓸 만한 인물이라 하여 석방을 명하니,

 대간이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도성을 굳게 닫고 관민에게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또 미투리 등의 물건을 돌려보내어 서울을 죽음으로 지켜 버리고 가지 않는다는 뜻을 표시하소서.”

하였다.
24일 부원군 유홍이 아뢰기를,

“미투리는 적을 방어하는 도구가 아니오며, 마필(馬匹)을 대기시키는 것은 인심을 진정시키는 길이 아닙니다.
 하물며 우리가 가는 곳에는 적도 올 수 있는 것이오니, 군신 상하가 함께 사직을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하였다.
○ 상이 의금부에 유시하여 김성일을 체포하여 오지 말게 하였다.

김성일은 직산(稷山)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
25일 종실로 총관(摠管)과 위장(衛將)의 칭호를 채워 번을 나누어 궐내에 입직하게 하여 숙위를 갖추었다.
26일 양사에서 합동으로 아뢰기를,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직책이 수상(首相)인데도 인심을 안정시키지 못하여 나라를 흙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형세에 놓이게 하였으니, 도당(都堂)을 물러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이 스스로 말하기를,

“결사대 10여 명이 죽고 살기를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으니, 이들과 함께 적진에 뛰어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베고 긴박한 국란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킨다면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오활(迂闊)하다 하여 채용하지 아니하였다.
27일 생원 구용(具容)과 권필(權韠)이 상소하기를,

“유성룡(柳成龍)의 강화 주장과 이산해(李山海)의 나라 그르침은 실로 오늘날의 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이오니,
참수하여 백성에게 사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 이일(李鎰)이 상주에 도착하여 미처 진(陣)을 펴기도 전에 전군이 모두 패망하였다.

이날 보고를 접하자 거리가 텅 비어서 성을 지키려 하여도 이미 지킬 사람이 없었다.
○ 적이 밀양에 도착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원한다 말하므로 마침내 그를 보냈다.
28일 광해군(光海君)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백관이 입조(入朝)하여 하례하였는데 허둥지둥하여 동ㆍ서반(東西班)도 구분하지 못하고 인장(印章)도 교서(敎書)도 없었으며, 궁료(宮僚)들도 오지 않았다.
○ 백사(百司)가 각각 상소하여 도성을 굳게 지킬 것을 요청하였는데, 답하지 아니하였다.
29일 좌의정 유성룡과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옛날부터 국가에 대란이 있을 때에는 제왕(諸王)을 각처에 나누어 보내 군사를 모집하여 적의 방어를 도모하였으니, 모든 왕자(王子)를 각 도에 나누어 보내어 재기를 모색하시기 바라옵니다.”

하니,

드디어 김귀영(金貴榮)ㆍ윤탁연(尹卓然)을 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가게 하고,

 한준(韓準)으로 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강원도로 가게 하고, 또한 이원익을 평안도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도로 각각 보냈다.

 이들은 예전에 본도의 수령 또는 감사로 있을 적에 대체로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 이때에 임금께서 서울을 떠나고자 하여 이미 행장을 마련하였는데, 대간과 백사가 모두 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서울 사람들 중에는 임금이 평복을 착용하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빠져 나와 북도(北道)로 향했다는 낭설을 유포하는 자도 있어 떠들썩하다가 한참 만에야 진정되었다.

 이런 일이 하루에도 서너 차례 있었다.
30일 신립이 군사를 중추에 주둔시키고 일처리가 초조하여 아침에 명령한 것이 저녁에 바뀌고, 주야로 잠에 빠져 조령(鳥嶺)을 막을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풀이 우거진 저습한 지대에 포진하여 적에게 포위되어 한 사람도 빠져 나간 자가 없게 되었다.

이 날 패전보가 이르자 위로는 조관(朝官)으로부터 아래로는 군교(軍校)에 이르기까지 서로들 도망가서 성문이 닫히지 않았고 인경도 치지 않았으며, 인마(人馬)가 인정전(仁政殿)의 마당을 메웠다.
○ 하루 전날 상은 유성룡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이성중(李誠中)ㆍ정윤복(丁允福)을 좌우통어사(左右統禦使)로 삼으니, 도승지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제 국사가 끝장났는데 만약 중국에 구원을 청하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사이를 주선하고 응대하는 데에 유성룡이 없어서는 안되오니, 서울에 머물러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마침내 이양원(李陽元)으로 대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은 표신(標信)을 병조 판서 김응남에게 주어 임의로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김응남은 목에 표신을 걸고 지휘하려 하였으나 누구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미 밤은 삼경이 되어 대가가 출발하려 하였지만 호위군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병조 정랑 이홍로(李弘老)는 표신을 가지고 주위를 두루 돌아다녔으나 오직 위장(衛將) 성수익(成壽益) 한 사람 뿐이었다.

 하늘에선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밤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임금은 단지 두서너 명의 젊은 내시와 함께 마루 방에 앉았는데, 무뢰한들이 대내로 난입하여 조금도 거리낌없이 보화를 약탈하였다.

시녀들은 맨발에다가 옷을 벗고, 혹은 눈물을 흘리고 혹은 통곡하면서 궁문을 흩어져 나오니 곡성이 하늘에 사무쳤다.

 이홍로는 동강난 초로 불을 밝혀 들고 상을 인도해 나왔다.

곤전(坤殿)에서 비빈(妃嬪)에 이르기까지 모두 옥교(屋轎))를 탔는데, 메는 인원은 혹은 7ㆍ8명, 혹은 5ㆍ6명이 되었다.

 4경에야 비로소 궁문을 나와 상은 말을 탔고, 따르며 수행 관원은 순서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들의 거취에 대하여 모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우선 아문(衙門) 별로 다음과 같이 열기(列記)하였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ㆍ좌의정 유성룡(柳成龍)ㆍ우의정 이양원(李陽元) 서울에 잔류
좌찬성 최황(崔滉)ㆍ우찬성 정탁(鄭琢)ㆍ좌참찬 최흥원(崔興源) 순찰(巡察)로 황해도로 갔음
사인 윤승훈(尹承勳) 나머지 사람은 모두 빠졌음
ㆍ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 순찰로 평안도로 갔음
참판 정창연(鄭昌衍)ㆍ참의 이정암(李廷馣)ㆍ정랑 조정(趙挺)ㆍ정랑 유영경(柳永慶) 최흥원(崔興源)의 종사관으로 갔음 ㆍ정랑 정광적(鄭光績) 어사로 강원도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음
좌랑 이호민(李好閔)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갔음
좌랑 김시헌(金時獻) 나머지 사람은 빠졌음
호조 판서 한준(韓準) 참판 이하의 사람은 기록 못했음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 죽은 지 2일이 됨
참판 박응복(朴應福) 참의 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하였음
좌랑 이경류(李慶流) 상주(尙州)에서 죽었음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ㆍ참판 심충겸(沈忠謙)ㆍ참의 정사위(鄭士偉)ㆍ참지 황섬(黃暹)ㆍ정랑 이홍로(李弘老) 개성에서 뒤처졌음
정랑 구성(具宬) 개성에서 파직됨
정랑 송순(宋淳) 파주(坡州) ㆍ정랑 유희서(柳熙緖)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으로 감
좌랑 서성(徐渻) 파주에서 뒤로 처졌음
좌랑 박동량(朴東亮)ㆍ이영(李覮) 영변에 와서 세자를 수행해 갔음
좌랑 최관(崔瓘) 평양에서 병으로 갔음
형조 판서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공조 참판 이덕형(李德馨) 적중에서 돌아오지 아니했음.
 판서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한성 판윤 홍여순(洪汝淳) 좌윤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대사헌 이헌국(李憲國)ㆍ집의 권협(權悏)ㆍ장령 정희번(鄭姬藩)과 이유중(李惟中)ㆍ지평 이경기(李慶祺) 박천(博川)에서 하직하지 않고 가버림
지평 남근(南瑾) 처음부터 오지 아니함
대사간 김찬(金瓚) 평양에 와서 상소하고 갔음
사간 이국(李)ㆍ헌납 이정신(李廷臣) 영변에서 하직하지 않고 갔음
정언 정사신(鄭士信) 처음부터 오지 않음
정언 황붕(黃鵬) 평양에서 뒤처짐
홍문관 교리 이유징(李幼徵)ㆍ교리 심대(沈垈)ㆍ수찬 박동현(朴東賢)ㆍ수찬 임의정(任義正) 처음부터 오지 않음
부수찬 윤섬(尹暹) 박지(朴箎) 모두 상주(尙州)에서 죽었음
별록 : 부제학 정창연(鄭昌衍) 잡사(雜事)와 합한 것이다.
도승지 이항복(李恒福)ㆍ좌승지 이충원(李忠元)ㆍ우승지 이정형(李廷馨)ㆍ좌부승지 노(盧) 평양에서 뒤로 처졌음.
우부승지 신잡(申磼)ㆍ동부승지 민여경(閔汝慶) 평양에서 뒤처졌음.
주서 박정현(朴鼎賢)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돌아갔음.
주서 임취정(任就正)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돌아갔음.
봉교 기자헌(奇自獻) 평양까지 뒤쫓아 따라왔음.
대교 윤경립(尹敬立) 상소하고 아버지 임지로 갔음.
대교 조존세(趙存世)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가버렸음.
ㆍ검열 강수준(姜秀峻) 평양에서 상소하고 갔음.
ㆍ검열 김의원(金義元) 나머지는 빠졌음.
한산관(閑散官)으로 수행한 자는 다음과 같다.
기성군(杞城君) 유홍(兪泓)ㆍ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ㆍ해원군(海原君) 윤두수(尹斗壽)ㆍ호군 이산보(李山甫)ㆍ유근(柳根)ㆍ홍진(洪進)ㆍ홍인상(洪麟祥)ㆍ민준(閔濬)ㆍ윤자신(尹自新)ㆍ황정욱(黃廷彧)ㆍ이정립(李廷立)ㆍ이관(李瓘)ㆍ성수익(成壽益) 등이다.
 나머지는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음.
각사의 관원으로 수행한 자. 이하는 단지 종행자만 기록하였음.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평양에서 상소하고 갔음.
ㆍ직강 심우승(沈友勝)ㆍ박사 이효원(李效元)ㆍ사복첨정 박응인(朴應寅)ㆍ내승(內乘) 박동언(朴東彥)
ㆍ내승 안황(安滉)ㆍ종부첨정 민선(閔善) 파주에서 뒤처졌음. ㆍ장악직장 이경전(李慶全) 평양에서 뒤처졌음.
ㆍ사섬봉사 이신성(李愼誠) 파주에서 뒤처졌음.
ㆍ봉상봉사 홍봉상(洪鳳祥)
세자종관(世子從官)으로서는 보덕 심대(沈垈)
ㆍ필선 심우정(沈友正)ㆍ문학 이상의(李尙毅)
ㆍ사서 기록하지 못했음.
ㆍ설서 이광정(李光庭)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은 모두 오지 않았으나 부솔(副率) 강인(姜絪)만이 왔음.

근시(近侍)의 신하들은 대개 임금의 수레를 따라 왔으되, 지평 남근(南瑾)과 정언 정사신(鄭士信)은 겨우 반송정(盤松亭)까지 따라 왔다가 곧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따라오지 않은 자는 임몽정(任蒙正) 한 사람 뿐이고, 그 나머지 소관(小官)과 산질인(散秩人)은 혹은 파주(坡州)와 개성(開城)에서 자기 임의로 행동을 취하여 기록하지 못한 자가 많다.
○ 이날 낮에 대가는 큰 비를 무릅쓰고 벽제(碧蹄)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한 후, 어둠을 타서 임진강을 건너려 하니, 강물이 불어 범람하고 길은 진흙이며 나룻배는 겨우 5ㆍ6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로 대소 인원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어 상하가 문란하고 마부와 말이 분산되어 혹은 걷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탔지만 밤새도록 건너가지 못했다.

 후궁 민빈(閔嬪)은 가마 멀미로 계속 파주에 남아 있었다.

 임금은 배를 타고 기다렸다.

이미 이경(二更)이 되었으나 임금은 저녁 식사를 들지 못해서 내시에게 술을 가져오라 하니 술을 서울서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차를 가져오라 하니 차도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갈증을 참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내의원의 용운(龍雲)이란 사람이 상투 속에서 사탕 반 덩어리를 끄집어 내어 강물에 타서 드리었다.

 밤중에 동파관(東坡館)에 도착하여 사경(四更)에야 비로소 궂은 진지를 들고, 세자 이하는 모두 밥을 굶었다.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백미 3승(升)을 올리니, 다음 날 아침에 밥을 지어 드렸다.

5월


1일 임금이 해원군(海原君) 윤두수를 불러 이르기를,

“경은 큰 재주가 있어 위급한 국가를 구할 만하므로 특명으로 석방하였으니, 사생(死生)을 서로 구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마오.”

하고, 차고 있던 푸른 비단으로 짠 주머니를 풀어 주면서 또 이르기를,

“정(情)을 표시할 만한 것이 없소.”

하니 윤두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례하고 물러나갔다.
○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과 호군 황혁(黃赫)도 와서 배알하니, 상은 강원도로 가서 순화군(順和君)을 수행하라 명하고, 또한 동지 이기(李墍)와 황혁을 명하여 함께 가게 하고서 곧 군병을 불렀다.

 이기는 관동(關東)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 상이 동파관 청사 뒤에서 홀로 서 계시다가 한 선비가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불러서 이르기를,

“너는 누구냐?”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신은 최황(崔滉)의 아들 별좌(別坐) 유원(有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는 공신의 아들인데, 의리상 마땅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걱정을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붉은 가죽 띠를 풀어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띠고 나를 잊지 말라.”

하였다.
○ 정창연(鄭昌衍)을 예조 판서로 삼고, 홍인상(洪麟祥)을 부제학으로 삼았는데, 모두 구두로 제수한 것이다.

그때 대가가 개성을 향하려 할 때 해가 한낮에 가까웠으나 수라를 올리지 못했으며, 군졸과 무부가 모이지 아니하였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구효연(具孝淵)은 도망하여 숨고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승지 등이 직접 경기 감사 권징(權徵)을 불러 지휘하게 하니, 집에 누워서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승지 등이 노하여 꾸짖어도 응하지 않았다.
○ 오후에 대가가 출발하여 날이 저물어서야 개성부에 도착하였다.

상은 말을 멈추고 성안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로하려 하였으나 말이 빨리 달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초경(初更)에 군인들이 놀라 떠들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오면서 인마가 서로 짓밟기도 하였다.

 궁인 이씨는 밖에서 이 소리를 듣고 변이 났다 하여 스스로 자기의 목을 찔렀으나 죽지는 않았다.

 이경에 또 놀라서 떠들다가 한식경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2일 상이 승지 신잡(申磼)과 정랑 이홍로(李弘老)를 명하여 임금이 친히 쓴 교서를 주어 경성으로 보냈는데 인민을 위로하고 달래려고 한 것이다.
○ 사시(巳時)에 병조 정랑 구성(具宬)이 내문(內門)에서 나오며 말하기를,

“상께서 삼사를 입시하라 한다.”

하니, 대소 관원이 궁문 밖에 늘어 앉아 말하기를,

“상이 만약 소대(召對)하게 하셨다면 정원은 어찌하여 불러들이지 않는가?”

하였다. 판윤 홍여순(洪汝諄)이 헌납 이정신(李廷臣)에게 말하기를,

“입대할 수 없다.
어찌 구성의 부름을 당하겠는가?”

하니,

구성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전교를 직접 받았는데, 네가 어찌 앉아서 일어나지 않는가?”

하고, 대사간 김찬(金瓚)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모든 대관(臺官)이 마침내 따라 들어갔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사태를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하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뭇 관원이 모두 아뢰기를,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김공량(金公諒)과 사귀어 심복으로 삼고, 홍여순(洪汝諄)ㆍ이홍로(李弘老)ㆍ조정(趙挺)ㆍ송언신(宋言愼) 등과 함께 안팎으로 호응하여 마구 기염을 터뜨리면서 사림에 해를 끼치고 국사를 망쳤으며, 서울을 떠나는 날에도 수상의 몸으로서 말리기는커녕 도리어 빨리 서울을 떠나기를 간청하였나이다.
 아첨하는 태도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오늘날의 일은 이 사람 때문이옵니다.
청하옵건대 국법으로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산해가 비록 김공량과 사귀었으나 어찌 이로 인해서 국사를 그르치고 적을 불러 들였다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사대부의 거취(去就)에 대하여도 간여하여 주장치 아니함이 없어, 이산해는 밖에서 주장하고 김공량은 안에서 주장하였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고,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이산해는 밤을 이용하여 몰래 김공량의 집으로 갔으니, 종적이 이상야릇합니다.
어찌 통분치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꼭 몸소 갔다고 보겠느냐.
그것은 헛된 말일 것이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밤에 나귀를 타고 가다가 순라군에게 붙들렸는데, 어찌 거짓말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울을 떠나자는 일은 이산해 혼자만이 말한 것이 아니다.
좌상도 말하였고, 찬성 최황도 말하였는데, 오늘날 이산해의 죄만 다스리기를 청하니 나는 참으로 알 수가 없다.”

하였다. 황붕(黃鵬)이 아뢰기를,

“당시의 사태가 너무도 위급하였으니, 누군들 도성을 버리는 것이 옳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구성(具宬)이 황붕의 옷을 잡아 끌어내며 말하기를,

“그대는 이산해의 조카인데, 어찌 감히 입을 연단 말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뜰에 내려가 눈물을 흘리면서 절하며 아뢰기를,

“이산해와 함께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받고자 하옵니다.”

하니, 최황(崔滉)이 또 아뢰기를,

“신은 위급하면 다른 곳으로 잠시 피하였다가 후일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말했을 따름이오니, 실은 이산해 등과는 다르옵니다.”

하였다. 상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한림(翰林)ㆍ주서(注書)가 모두 여기 있는데, 내가 거짓말을 하겠는가?”

하고서, 이어 사관(士官)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너희들도 듣지 않았는가?”

하니, 사관이 아뢰기를,

“최황 역시 서울을 떠나자고 직접 청하였고,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최황은 그래도 둘러대며 사죄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드디어 이산해를 파직시키고, 최홍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남도 병사(南道兵使) 신할(申硈)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서 통어사의 자격으로 임진(臨津)에다가 군사를 주둔시켰다.
3일 상은 남문에 나와 부로와 인민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서 고충을 물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니, 선비 10여 명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사태는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으로 일을 꾸며서 인민이 원한을 품게 되어 외적의 침입을 초래한 것이온데,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숙원 김씨(淑媛金氏)에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 상의 행차가 돌아오려 할 때, 승지 이충원(李忠元)이 아뢰기를,

“성혼(成渾)을 부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불러서 쓸 사람이 없겠느냐. 내가 구태여 부를 것까지는 없다.”

하고, 마침내 행궁(行宮)으로 돌아갔다.
○ 상이 개성 유수 홍이서(洪二恕)가 병이 있고, 승지 이정형(李廷馨)이 전에 본부의 경력(經歷)으로 치적이 있었다 하여 정형을 유수로 발탁하여 임명하고,

또한 그의 형 이정암(李廷馣)을 명하여 함께 개성을 지키게 하고, 이국(李)을 승지로 임명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좌의정 유성룡은 나라를 그르치게 한 죄에서 홀로 면하기 어렵사옵고, 병조 정랑 구성은 본래 근시의 신하가 아니오며, 또 명을 받들어 내고 드리는 소임도 아니옵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이 입대할 적에 함께 종신(從臣)의 반열에 있어 기거(起居)가 전도되어 조정의 예의를 크게 위배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상이 그 말을 따라 윤두수로 유성룡을 대신케 하였다.
○ 상이 기성부원군 유홍과 도승지 이항복에게 명하여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모시고 평양으로 먼저 가게 하고, 이항복을 참판으로 발탁해 제수하여 즉일로 떠나가게 하였다.
○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을 적소인 강계(江界)에서 불러들여 유홍 등과 함께 왕자를 보호하게 하였다.
○ 예조 판서 정창연(鄭昌衍)이 말하기를,

“태묘(太廟)의 신주를 말 위에 싣는다면 적어도 50여 필은 넘는데, 지금 모든 군(郡)에서 운반할 능력이 없으니, 만약 뜻밖의 변이 생긴다면 낭패입니다.
그러하오니 이미 정결한 곳에 봉안하고 행장을 간편하게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많은 관리들은 모두 새로 임명된 정승이 출사(出仕)한 뒤에 논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4일 상이 종신(從臣)을 시켜 한 사람을 차출하여 양호(兩湖)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게 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보덕(輔德) 심대(沈垈)가 아뢰기를,

“신이 가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것을 그대만이 자원하니 참으로 흐뭇하다.”

하고,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보내고자 하였다.

 심대는 아뢰기를,

“신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이는 헛되이 상질(賞秩)을 받는 것이 되오니 복명하는 날에 받겠나이다.”

하므로, 상은 그냥 위로해 보냈다. 오후에 신잡(申磼)이 혼자서 말하기를,

“적이 이미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이는 마산(馬山)에 이르러 길가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듣고 겁이 나서 돌아온 것이었다.

상은 출발 준비를 명하였다.
○ 정창연(鄭昌衍)은 대가가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지 않고, 태묘(太廟)의 신주를 목청전(穆淸殿)의 우측에 안치하였다.
○ 저녁 무렵에 대가가 출발하니, 상하가 소란스러웠는데 임진강을 건널 때보다도 더 심하였다.

 밤에 금교(金郊)에 도착하여 재신(宰臣) 이하 모두가 풀밭에서 노숙하였다.

 이날 밤 군인들이 놀라서 소동을 피운 것이 4ㆍ5차례였으며 사람들은 잠들지 못하였다.

 한응인(韓應寅)을 순경사(巡警使)로 삼아 호위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5일 임금이 금암(金巖)에 도착하여 이조 판서를 시켜 호종 인원의 명단을 보고하게 하였다.

 해가 저물어서야 평산(平山)에 도착하였고 보산(寶山)에서 유숙하였다.
6일 대가가 낮에 안성(安城)에 머무르고, 저녁에 용천(龍泉)에서 쉬었는데, 안성과 용천에서 모두 수라를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역참(驛站)을 배로하여 검수(劍水)를 지나 봉산(鳳山)에 이르니 날이 이미 초경이 되었다.

 상하가 모두 허기가 져서 갈 수 없었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은 노하여 꾸짖기를,

“정승과 승지는 모두 개자식이다.
 어찌 군부(君父)로 하여금 밥을 굶고 가시게 하는가.”

하고, 말 위에서 팔을 휘두르고 주먹 다짐을 할 것같이 하니, 모두들 실소(失笑)를 하였다.
7일 임금의 행차가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이 장연 현감(長淵縣監) 김여율(金汝嵂)을 맞이하여 말하기를,

“공의 형 여물(汝岉)은 비록 문관이지만 적에게 죽었는데, 하물며 연소한 무사로서 어찌 앉아만 있을 수 있겠소. 빨리 나라에 청원하여 복수를 꾀하시오.”

하니, 김여율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난색을 표시하였다.

 심충겸이 꾸짖기를,

“너같은 겁 많은 무사는 머리를 베어 뭇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

하니, 김여울은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청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한 지방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상은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무사라 하여 특별히 표창을 주고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보냈다.”
8일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니, 감사 송언신(宋言愼)이 군사 3천 여 기를 거느리고 전후로 어가(御駕)를 영접하였는데, 창과 칼이 햇빛에 번쩍이어 기세가 매우 당당하였다.

성중의 인민들의 가옥은 서울과 같아서 수행한 인원들이 비로소 생기를 띠게 되었다.
○ 이때에 조정의 중의(衆議)는 모두 김명원(金命元)ㆍ신할(申硈)이 비록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으나 병력이 대단히 고단하니, 또 다시 문무 장관을 보내어 협동으로 방어해야 한다 하였다. 드디어 한응인을 제도도순어사(諸道都巡御史)로 삼고, 이천(李薦)을 방어사로 삼았다.
9일 이성중(李誠中)이 와서 말하기를,

“3일에 적이 서울로 들어왔으며 도성에 남아있던 이양원(李陽元)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므로, 유홍(兪泓)을 우의정 겸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군사 3천을 주어 출발하게 하였다.
10일 종묘와 사직의 신주가 왔다.

 대가가 보산(寶山)에 당도하던 날 종실 해풍군 기(海豊君耆)가 윤두수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공은 국가의 대신으로서 유사(有司)가 종묘 사직의 신주를 버린 것도 알지 못하니, 어찌된 일이오? 고금에 종묘사직이 없는 나라가 있었습니까?”

하니, 윤두수가 대답하기를,

“유사가 두루 의론을 거치지 않고 지레 봉안하였으니, 비록 나의 소관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찌 나의 죄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공이 말하지 않았다면 나라답지 못한 꼴이 될 뻔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예관을 보내서 모시고 오게 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 유홍이 명을 받고 시일이 경과되어도 출발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지라, 상이 불러 묻기를,

“그대는 지금까지 출발하지 않았으니, 웬일이오.”

하니, 유홍이 아뢰기를,

“발바닥에 종기가 나서 갈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이 큰 소리로 꾸짖기를,

“공은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데도 정승의 자리를 받았으니 은혜가 지대한 것인데, 겁이 나서 가지 않고 발바닥에 종기가 났다고 변명하니, 진실로 연석에 나타난 기생이 발병을 핑계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과 같소. 공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소.”

하면서 마구 때릴 기세를 보였다. 임금도 쓴 웃음을 지으면서 이르기를,

“먼저 한응인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홍은 끝내 가지 않았다.
11일 한응인(韓應寅)ㆍ이천(李薦)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출발 인사를 하러 왔다.

 떠날 적에 상이 술을 하사하며 위로하고 권면해 보냈다. 비망기에,

“옛날부터 변을 당한 임금은 반드시 스스로를 폄하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부터 내외 신민에게 이르노니, 소장(疏章) 등에 예성(睿聖)이라든가 또는 존호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성중이 아뢰기를,

“이는 훌륭한 처사이시니, 신하된 도리로서 따라서 상감의 아름다움을 완성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사태는 신하의 죄가 아님이 없는데, 어찌 상감 혼자만이 먼저 스스로 폄하하는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마침내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12일 이항복(李恒福)을 형조 판서로, 신잡을 이조 참판으로, 유희림(柳希霖)ㆍ홍진(洪進)ㆍ민준(閔濬)을 승지로 삼았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아뢰기를,

“신이 이빈(李薲)ㆍ유극량(劉克良) 이하 여러 장수 20여 인과 군사 1천여 인을 거느리고 임진(臨津)을 고수하고 벽제(碧蹄) 등에 매복을 설치하여 많은 적을 죽였습니다.
 이양원(李陽元)도 이일(李鎰)ㆍ신각(申恪) 이하 장수들 10여 인과 군사 5천 여 인을 거느리고 대탄(大灘)에 주둔하여 진격을 도모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니,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가 모두 즐거워하면서 머지 않아 임금이 환궁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 조정에서 이르기를,

“백관들 중 서울을 떠날 때에 뒤떨어진 자를 전부 처벌할 수는 없지만, 도총부 위장(都摠部衛將)ㆍ금부 등의 관원은 다른 한가한 아문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모두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워 각자 힘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13일 이항복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치계하기를,

“왜적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와서 발에 종기가 나고 기운이 피로하여 그 세력이 이미 꺾이었으니, 원수에게 명하시어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공격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 때에 여러 장관도 모두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이미 꺾였으며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하므로, 조정에서는 그 말을 믿어 김명원(金命元)에게 거듭 지시를 내려 적을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책망하였다.
○ 이성임(李聖任)을 순찰부사로 삼아 강변의 토병(土兵) 중에 돌아온 자를 거느리고서, 전선으로 가서 참찬 한응인의 군무(軍務)를 돕게 하였다.

 이에 앞서 이성임이 왜적의 난리를 듣고는 조정에 자청하여 몸소 영남에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조정에 한응인(韓應寅)을 도와 적을 토벌하겠다고 자청하였으므로 보낸 것이다.
14일 상이 한응인에게 타이르기를,

“이제 적의 세력이 꺾이었는데도 도원수 김명원이 여태껏 아무일도 하지 않으니, 경은 하루 속히 적을 토벌해야 할 것이요.
앉아서 김명원의 지시만 기다리다가 승전의 기회를 상실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이산해는 성질이 사악하고 음흉하여 궁궐과 내통하고, 김공량(金公諒)과 표리가 되어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불러들였습니다.
또 서울을 떠나던 날에도 임금께 그치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청하옵건대 외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3일 만에 윤허가 내려서 평해군(平海郡)으로 귀양갔다.
○ 삼사가 또 김공량의 죄를 논의하기를,

“녹이나 축내는 천한 종의 무리로서 궁중의 세력을 빙자, 권세 있는 무리와 결탁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하고 선비들의 진퇴가 그의 수중에서 좌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원한을 사고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참수하여 온 나라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망할지언정 어찌 한 사람이라도 그릇되게 죽일 수 있겠느냐.”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 이덕형이 돌아와 아뢰기를,

“명을 받고 죽산(竹山)까지 갔다가 신립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역관만 왜적의 진영으로 들여보냈더니,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부득이 되돌아왔습니다.”

하였다.

 또 윤두수(尹斗壽)에게 말하기를,

“이제 인심이 이반되어 공공연히 위를 원망하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이런 판국에는 아무 일도 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별도로 인심을 위로하는 조치가 있어야만 다소라도 희망이 있을 것 같소.”

하니, 윤두수는 눈을 부릅뜨고 대답하지 않으므로 이덕형은 망연히 무엇을 실수한 듯 얼굴이 붉어져 물러 갔다.
○ 대사간 김찬(金瓚), 부제학 홍인상(洪麟祥), 집의 권협(權悏), 종묘영(宗廟令) 권희(權憘), 이조 정랑 박동현(朴東賢), 봉교 강수준(姜秀俊),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등이 앞뒤로 상소하기를,

“부모들이 계시는 곳에 적이 들어와서 인민을 살해하였으니, 귀성(歸省)하고자 하옵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소하여 귀향을 원하는 자가 어지러이 그치지 아니하니, 조정에서는 아뢰기를,

“임금과 어버이는 일체인데, 만일 모두 귀성을 하게 되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일을 하겠습니까.
일체 승낙하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하직(下直)을 고하지 아니하고 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조정의 소식이 끊어지니 모두들 임의로 거취(去就)를 하오나 신은 본성(本城)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대가가 어디에 계신지 모르기에 감히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글을 보고 한편 슬퍼하고 한편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한효순을 당상으로 승진시키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 정곤수(鄭崑壽)를 대사간으로, 심충겸(沈忠謙)을 부제학으로, 이정립(李廷立)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 인성부원군 정철(鄭澈)이 와서 아뢰기를,

“명을 받은 뒤로 즉시 떠나려 하였더니,
부사(府使) 홍세공(洪世恭)이 의금부의 공문이 도착하지 아니하였으니, 임금님의 분부가 계시는 것만으로 갑자기 출발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여 지금에야 도착하였습니다.”

하였다.
○ 조정에서 아뢰기를,

“8도가 전쟁의 도탄에 빠져 있으므로 일일이 관원을 차출하여 보낼 수 없으니, 과거의 예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여, 드디어 각도의 감사에게 유시하였다.
○ 경상좌도 병사 이각(李珏)이 본도에서 이탈하여 임진강의 진중에 나타나므로,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그의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 대가가 평양에 도착한 뒤로 조정에서, 서울을 떠날 때에 위에서 비록 죄 있는 자를 사면하라는 교서가 있었으나 확실한 명령이 없으므로 감히 시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명단을 작성하여 아뢰었더니, 역적에 연좌되어 귀양간 자도 모두 석방되었다.

그런데 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백유함(白惟咸)ㆍ장운익(張雲翼)ㆍ유공진(柳拱辰)ㆍ이춘영(李春英) 등은 석방되지 않았다.

삭탈관직을 당한 자도 모두 탕척(蕩滌)되었으되, 박점(朴漸)만이 남아 있었다.

수일 후에는 홍성민 이하도 모두 사면되어 다시 서용받게 되었다.
16일 임진강에 포진하고 있던 적이 일시에 진영을 태워버리고 철수해가는 시늉을 하는지라,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치계하기를,

“이들 적은 세력이 고립되고 힘이 피곤하여 진을 태워버리고 도망가려는 형상이 현저하니, 여러 장수들에게 지시하여 추격하도록 하소서.”

하고, 조정에서도 그럴 듯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한응인(韓應寅) 등에게 추격하라고 재촉하였다.
17일 한응인이 전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넜다.

신할(申硈)이 좌군을 거느리고 먼저 적진을 공격하니, 나무하던 적이 보고는 달아났다.

 김명원(金命元) 이하가 멀리 바라보고 모두 아군이 승리하여 나아간다 하고, 검찰사 박충간(朴忠侃)과 독진관(督陣官) 홍봉상(洪鳳祥)은, 우리 군사가 반드시 이긴다 하여 환호하며 날뛰었다.

홍봉상은 즉시 강을 건너 군사를 독려하는데 잠시 후에 7ㆍ8명의 적이 알몸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나와 아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좌ㆍ우군이 일시에 크게 무너져 신할 이하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면서 모두 강에 빠져 죽고, 홍봉상도 죽었다.

이때에 김명원과 한응인ㆍ박충간이 모두 푸른 천의 옷을 입었다.

 박충간은 일이 틀린 것을 보고 말을 타고 달아났다.

 강 위에 있던 군사가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일시에 소리치기를,

“원수가 달아난다.”

하면서, 뿔뿔히 달아났다.

김명원과 한응인은 몸소 나와 외치기를,

“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여기에 있다.”

하니, 비로소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남은 군사는 겨우 천 명 정도였다.
19일 보고를 접하자 상하가 크게 놀랐다.

재기의 가망이 없어서 드디어 강변 토병(土兵) 중에서 동원되지 않은 자를 징발하여 모두 군에 편입시켰다.

전 첨사 박석명(朴錫命)이 용맹이 있어 명령을 받고 전투에 나갈 때 조정이 적을 사로잡는 방책을 물었다.

박석명이 대답하기를,

“나는 화살 한 발에 적 5ㆍ6명을 사살할 수 있으며, 화살 한 단이면 1백여 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단지 마음에 흐뭇한 일이 있은 뒤에야만 나의 용맹을 다할 수 있소.”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말이 반드시 실효가 없을 줄을 알면서도 당상으로 승진시키려 하다가 마침내 절충장군으로 뛰어올려 제수하여 보냈다.
○ 조정에서는 적의 형세를 알 길이 없을 뿐더러 또한 대응책이 없다 하여, 마침내 선전관 이호의(李好誼)ㆍ김계현(金繼賢)을 시켜 서울에 가서 염탐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각(申恪)이 주장(主將)의 명령을 어기고 불러도 오지 않는다.”

하니, 조정에서는 베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선전관을 보냈다. 오후에 신각이 해유령(蟹踰嶺)에서 싸워 7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승전의 보고를 접하자 상은 그의 사면을 명하였다.

그러나 명령이 도착했을 때에는 머리가 이미 진 앞에 매달려 있었다.
○ 대사헌 이항복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오늘의 적은 우리 나라만의 적이 아니니, 속히 천조(天朝)에 구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이제 아군이 임진강을 지키고 있으니 방어를 할 수 있으며, 조정에서는 사람을 하삼도(下三道)에 보냈으니 반드시 군사가 많이 올 것이요, 북도의 병력도 오래잖아 모일 것입니다.
 대군이 모이면 대책이 나올 것입니다.
하물며 천조에서 군사를 보내 구원해 준다는 것도 꼭 기약할 수 없으며, 상국(上國)의 군사가 일단 우리 경내에 들어오면 그 후의 난처한 걱정거리가 이보다 만 배나 더할 것이니, 어찌 이 일을 경솔히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이항복이 물러갔다.
○ 관전보(寬奠堡)의 총병(摠兵)이 의주 목사 황진(黃璡)을 불러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적의 침범을 당하였으니 상국으로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소.
본인이 며칠 안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널 터이니, 당신은 그 뜻을 신속히 임금께 아뢰오.”

하니, 황진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비록 갑자기 병화를 입어 온 나라가 흔들렸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군사가 능히 적을 당해낼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대인(大人)에게 구원을 청하여 괴로움을 끼치게 하겠소.”

하자, 총병은 웃으며 돌아갔다.
황진은 이 일을 자세히 아뢰니, 상은 보고 노하여 이르기를,

“천조에서 구원병을 보내려 하는데, 황진이 무슨 군사가 있어 그런 말을 하여 저지하였단 말이냐?”

하고, 체포하여 국문하고자 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황진이 명령을 듣지 못했으니, 대관(大官) 1명을 보내 상황을 보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좌승지 유근(柳根)을 추천하므로, 상은 그를 이조 참판으로 제수하여 보냈다.
○ 남도 병사(南道兵使) 이혼(李渾)이 적병이 서울에 육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연천(漣川)으로 와서 이양원(李陽元)과 군사를 합하고, 그 곡절을 자세히 임금께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치사하였다.

적이 변방을 침범하던 초기에 조정에서는 공문을 요동(遼東)에 보냈는데, 그 후 정신이 없어 계속 보고를 보내지 못하였다.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자, 통역관만 보내 대충 긴박한 사태만을 보고하였더니, 이때에 요동대인(遼東大人 관전보 총병의 존칭)이 의주에 힐책하여 물어 왔던 것이다.

상이 또 유근(柳根)을 명하여 전후 곡절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강계 부사
홍세공(洪世恭)이 쓸 만한 재질이 있다 하여 불러서 승지를 제수하였다.
○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자기 어머니가 토적(土賊)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이항복으로 대체하고, 이덕형(李德馨)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27일 적이 임진 하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로 강을 건널 듯이 하면서 아군을 시험하였다.

 부원수 이빈(李薲)이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먼저 도망가서 상하 모든 군사가 일시에 크게 무너졌다.

 이양원 등은 적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북도로 달아났다.
29일 보고를 접하자, 상은 구사맹(具思孟)ㆍ신잡(申磼)ㆍ구성(具宬)에게 명하여 신성군(信成君)ㆍ정원군(定遠君)을 배행하여 영월군(寧越郡)으로 가게 하였다.
○ 이때에 조정에서는 임진강의 군사가 능히 적을 방어하리라 생각하여 다시 방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평안 감사 송언신(宋言愼)과 병사 이윤덕(李潤德)은 사람의 안색이 없이 모두 정신이 나가서 미투리를 신고 떠났다.
○ 조정에서는, 북도로 들어갔던 적이 양덕(陽德) 등처로 돌아 배후로 나오게 되면, 더욱 적을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홍여순(洪汝諄)을 순찰사로 삼아 양덕으로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홍여순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조정에서 신을 순찰사로 삼고 한 명의 병졸도 주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는 신을 죽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일체를 편의대로 종사(從事)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이윤덕이 거느린 군사 절반을 주고, 또 대동역마(大同驛馬)를 내어주어 전쟁의 용도로 쓰게 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홍여순이 이같이 함은 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다.
○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 서장관 민몽룡(閔夢龍)이 조정을 하직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떠날 적에, 방물(方物)은 모두 버리고 표문(表文)만 가져왔다.

 조정에서는 비록 방물은 없더라도 때에 맞추어 중국 서울로 가야 된다 하여 마침내 그들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주D-001]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 : 진회(秦檜)는 송 흠종(宋欽宗) 때의 간신. 양국충(楊國忠)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