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1(壬辰日錄一) 만력 20년 4월 13일부터 5월 29일까지 쓰고 그쳤는데, 1개월 남짓이 된다.
4월
13일 일본 국왕 수길(秀吉)은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嘉)와 평행장(平行長)ㆍ정성(政成)ㆍ청정(淸正) 등을 보내 대거 침범하여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첨사 정발(鄭撥)과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을 죽이며 성중의 사람들을 도륙(屠戮)하였다.
수사 박홍(朴泓)과 병사 이각(李珏)은 변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진(鎭)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며, 각 고을의 수령들도 소문을 듣고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4ㆍ5일도 못 되어 여러 군이 함락당하였다.
○ 14일(계묘) 동래가 함락되니,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별장 홍윤관(洪允寬)은 모두 전사하였으며, 절도사 이각(李珏)과 수사(水使) 박홍(朴泓)은 진을 버리고 도망갔다.
적은 부산으로부터 동래성 밑에 들이닥쳐서 곧장 저돌적으로 대들어 형세가 극히 창궐하니, 성중 사람들은 겁에 질려 어떤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송상현은 원래 선비인데 장수의 재질이 있어 현관(縣官)에서 뛰어올라 본직(本職)을 맡게 되었다.
성(城)과 기계의 수리가 대략 끝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데도 날이 부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성 밖의 사면에 극히 견고히 참호(塹壕)를 파고 목책을 설치하였으며, 그 주위에 잡목을 많이 심었다.
이 날에도 성을 순시하여 부하들을 독려하고 스스로 남문을 지켰는데 적이 침범하여 성 밖의 잡목 숲속으로 들어 와서는 화살과 돌을 막아내다가 묘시(卯時)에서 사시(巳時)말까지 대거 쳐들어왔다.
별장 홍윤관은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송상현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하니, 송상현은 대답하기를,
하였다.
홍윤관은 말하기를,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이 그들을 칼로 치니, 몸이 두 동강이 났다.
성중 사람 만여 명도 빠져 도망갈 수 없었다.
수사(水使)를 설치한 목적은 수군을 거느리고 적으로 하여금 해안에 침범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수사 박홍은 정발의 보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와 알리고는 그 역시 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병사 이각은 원래 품행이 불량한 자로 윗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알랑거리기를 잘하여 죄가 있었는데도 방면된 일이 있었다.
적에 관한 보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왔다가 또 송상현이 성을 지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고,
하였다.
○ 15일(갑진) 병사 이각은 소산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은 패주하였다.
박진은 젊었을 때 글을 배워 성공하지 못하고 곧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번 관직을 옮기다가 마침내 뛰어 올라 본부의 부사(府使)로 오게 되었다.
부임할 적에 사람들은 그가 연소하여 큰 부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는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는 도중에, 동래도 함락되자 이각에게 말하기를,
하니, 이각이 동의하였다.
박진은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전면에 포진하였다.
적은 그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마구 진격해 오는데 그 기세가 매우 예리하였다.
이각은 박진의 군사가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도망가 버렸다.
박진은 후퇴하여도 후원군이 없으므로 역시 달아났다.
○ 16일 박진은 밀양 앞 강에서 대패하였다.
당시 감사 김수(金睟)는 각 고을 수령들에게 분부하여 잇달아 싸움터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도중에 도망가기도 하고 문 밖에 나가자마자 도망가기도 했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은 군사를 놓아 흩어지게 하고, 이어 도망가 버렸다.
울산 군수 이언함(李彥諴)은 동래에서 적에게 붙들렸다가 이틀 후에 탈출해 왔다.
병사와 수사가 잇달아 진을 버리니, 그 나머지 첨사ㆍ만호까지 다 기록하기는 어렵다.
부산에서 이곳까지 오도록 맞붙어 싸운 자는 하나도 없었는데, 오직 박진이 거느린 3백여 명은 소산에서 패하고 돌아와 밀양으로 달려 와서 앞 강을 지키기 위해 또 흩어진 병졸을 불러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응하는 자가 없었으며, 병력을 정돈하기 전에 적은 이미 다가왔다.
이 날은 안개가 크게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박진도 오지 못해 군사들을 흩어져 가게 놓아 주고 마침내 성중으로 달려 들어갔다.
○ 17일(병오) 적은 밀양 앞 강에 도착하여 장차 성을 육박할 기세였다.
박진은 동래에서 성으로 돌아온 이후, 군민을 모집하여 원병이 올 때까지 지키려 하였으나 성 안팎의 주민들이 거의 다 분산되었다.
박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드디어 창고를 불태우고, 김수가 주둔한 곳으로 달려갔다.
17일 이 보고가 이르자, 중외가 크게 진동하여 마침내 8도의 좌ㆍ우방어사(左右防禦使) 등을 나누어 보내고 이일(李鎰)을 경상도 순변사(慶尙道巡邊使)로 삼아 그날로 선발하여 보냈다.
또한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경상 병사 김성일(金誠一)을 잡아오게 하였다.
대개 왜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진술한 말에 대한 죄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18일 변방의 급보가 하루에도 10여 차례나 들어오는데, 모두 적의 세력이 막대하여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도읍내의 인민들은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 모두가 붕괴할 기색이었다.
19일 비망기를 내리기를,
하였다.
○ 20일 신립(申砬)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로 삼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창사(都體察使)로 삼고,
김응남(金應南)을 부사(副使)로 삼아 그날로 부임하게 하였다.
21일 이일(李鎰)이 문경(聞慶)에 도착하여 치계하기를,
하였다.
이에 궁중(宮中)도 결코 견고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미투리 등 멀리 가는 도구를 구입하고, 또 사복시에 명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말을 정돈케 하여 비상시의 사용에 대비하게 하였다.
○ 22일 신립(申砬)이 출발에 앞서 면대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하였다.
상이 크게 노하여 김응남(金應南)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 또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을 기복시켜 도원수로 임명하여 한강에서 군대를 훈련하게 하였다.
○ 23일 상은 내수사 별좌 김공량(金公諒)에게 내수사 노복(奴僕)으로 활쏘기를 잘하는 자 2백 여명을 거느리고 대내(大內)를 숙직하게 하였다.
○ 그때 남쪽에서 점차 긴박해지는 상황을 보고하자 장안의 일반 백성 중에는 외부로 피난하는 자가 많았고,
각사(各司)의 관원 중에도 숨고 출사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과 좌찬성 최황(崔滉)은 맨 먼저 가족을 시골로 내려보냈다.
상은 윤두수를 한 번 쓸 만한 인물이라 하여 석방을 명하니,
대간이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하였다.
○ 24일 부원군 유홍이 아뢰기를,
하였다.
○ 상이 의금부에 유시하여 김성일을 체포하여 오지 말게 하였다.
김성일은 직산(稷山)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
○ 25일 종실로 총관(摠管)과 위장(衛將)의 칭호를 채워 번을 나누어 궐내에 입직하게 하여 숙위를 갖추었다.
○ 26일 양사에서 합동으로 아뢰기를,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이 스스로 말하기를,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오활(迂闊)하다 하여 채용하지 아니하였다.
○ 27일 생원 구용(具容)과 권필(權韠)이 상소하기를,
하였으나,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 이일(李鎰)이 상주에 도착하여 미처 진(陣)을 펴기도 전에 전군이 모두 패망하였다.
이날 보고를 접하자 거리가 텅 비어서 성을 지키려 하여도 이미 지킬 사람이 없었다.
○ 적이 밀양에 도착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원한다 말하므로 마침내 그를 보냈다.
○ 28일 광해군(光海君)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백관이 입조(入朝)하여 하례하였는데 허둥지둥하여 동ㆍ서반(東西班)도 구분하지 못하고 인장(印章)도 교서(敎書)도 없었으며, 궁료(宮僚)들도 오지 않았다.
○ 백사(百司)가 각각 상소하여 도성을 굳게 지킬 것을 요청하였는데, 답하지 아니하였다.
○ 29일 좌의정 유성룡과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하니,
드디어 김귀영(金貴榮)ㆍ윤탁연(尹卓然)을 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가게 하고,
한준(韓準)으로 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강원도로 가게 하고, 또한 이원익을 평안도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도로 각각 보냈다.
이들은 예전에 본도의 수령 또는 감사로 있을 적에 대체로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 이때에 임금께서 서울을 떠나고자 하여 이미 행장을 마련하였는데, 대간과 백사가 모두 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서울 사람들 중에는 임금이 평복을 착용하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빠져 나와 북도(北道)로 향했다는 낭설을 유포하는 자도 있어 떠들썩하다가 한참 만에야 진정되었다.
이런 일이 하루에도 서너 차례 있었다.
○ 30일 신립이 군사를 중추에 주둔시키고 일처리가 초조하여 아침에 명령한 것이 저녁에 바뀌고, 주야로 잠에 빠져 조령(鳥嶺)을 막을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풀이 우거진 저습한 지대에 포진하여 적에게 포위되어 한 사람도 빠져 나간 자가 없게 되었다.
이 날 패전보가 이르자 위로는 조관(朝官)으로부터 아래로는 군교(軍校)에 이르기까지 서로들 도망가서 성문이 닫히지 않았고 인경도 치지 않았으며, 인마(人馬)가 인정전(仁政殿)의 마당을 메웠다.
○ 하루 전날 상은 유성룡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이성중(李誠中)ㆍ정윤복(丁允福)을 좌우통어사(左右統禦使)로 삼으니, 도승지 이항복이 아뢰기를,
하니, 마침내 이양원(李陽元)으로 대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은 표신(標信)을 병조 판서 김응남에게 주어 임의로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김응남은 목에 표신을 걸고 지휘하려 하였으나 누구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미 밤은 삼경이 되어 대가가 출발하려 하였지만 호위군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병조 정랑 이홍로(李弘老)는 표신을 가지고 주위를 두루 돌아다녔으나 오직 위장(衛將) 성수익(成壽益) 한 사람 뿐이었다.
하늘에선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밤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임금은 단지 두서너 명의 젊은 내시와 함께 마루 방에 앉았는데, 무뢰한들이 대내로 난입하여 조금도 거리낌없이 보화를 약탈하였다.
시녀들은 맨발에다가 옷을 벗고, 혹은 눈물을 흘리고 혹은 통곡하면서 궁문을 흩어져 나오니 곡성이 하늘에 사무쳤다.
이홍로는 동강난 초로 불을 밝혀 들고 상을 인도해 나왔다.
곤전(坤殿)에서 비빈(妃嬪)에 이르기까지 모두 옥교(屋轎))를 탔는데, 메는 인원은 혹은 7ㆍ8명, 혹은 5ㆍ6명이 되었다.
4경에야 비로소 궁문을 나와 상은 말을 탔고, 따르며 수행 관원은 순서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들의 거취에 대하여 모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우선 아문(衙門) 별로 다음과 같이 열기(列記)하였다.
근시(近侍)의 신하들은 대개 임금의 수레를 따라 왔으되, 지평 남근(南瑾)과 정언 정사신(鄭士信)은 겨우 반송정(盤松亭)까지 따라 왔다가 곧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따라오지 않은 자는 임몽정(任蒙正) 한 사람 뿐이고, 그 나머지 소관(小官)과 산질인(散秩人)은 혹은 파주(坡州)와 개성(開城)에서 자기 임의로 행동을 취하여 기록하지 못한 자가 많다.
○ 이날 낮에 대가는 큰 비를 무릅쓰고 벽제(碧蹄)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한 후, 어둠을 타서 임진강을 건너려 하니, 강물이 불어 범람하고 길은 진흙이며 나룻배는 겨우 5ㆍ6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로 대소 인원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어 상하가 문란하고 마부와 말이 분산되어 혹은 걷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탔지만 밤새도록 건너가지 못했다.
후궁 민빈(閔嬪)은 가마 멀미로 계속 파주에 남아 있었다.
임금은 배를 타고 기다렸다.
이미 이경(二更)이 되었으나 임금은 저녁 식사를 들지 못해서 내시에게 술을 가져오라 하니 술을 서울서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차를 가져오라 하니 차도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갈증을 참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내의원의 용운(龍雲)이란 사람이 상투 속에서 사탕 반 덩어리를 끄집어 내어 강물에 타서 드리었다.
밤중에 동파관(東坡館)에 도착하여 사경(四更)에야 비로소 궂은 진지를 들고, 세자 이하는 모두 밥을 굶었다.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백미 3승(升)을 올리니, 다음 날 아침에 밥을 지어 드렸다.
5월
○ 1일 임금이 해원군(海原君) 윤두수를 불러 이르기를,
하고, 차고 있던 푸른 비단으로 짠 주머니를 풀어 주면서 또 이르기를,
하니 윤두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례하고 물러나갔다.
○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과 호군 황혁(黃赫)도 와서 배알하니, 상은 강원도로 가서 순화군(順和君)을 수행하라 명하고, 또한 동지 이기(李墍)와 황혁을 명하여 함께 가게 하고서 곧 군병을 불렀다.
이기는 관동(關東)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 상이 동파관 청사 뒤에서 홀로 서 계시다가 한 선비가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불러서 이르기를,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고, 드디어 붉은 가죽 띠를 풀어 주면서 이르기를,
하였다.
○ 정창연(鄭昌衍)을 예조 판서로 삼고, 홍인상(洪麟祥)을 부제학으로 삼았는데, 모두 구두로 제수한 것이다.
그때 대가가 개성을 향하려 할 때 해가 한낮에 가까웠으나 수라를 올리지 못했으며, 군졸과 무부가 모이지 아니하였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구효연(具孝淵)은 도망하여 숨고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승지 등이 직접 경기 감사 권징(權徵)을 불러 지휘하게 하니, 집에 누워서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승지 등이 노하여 꾸짖어도 응하지 않았다.
○ 오후에 대가가 출발하여 날이 저물어서야 개성부에 도착하였다.
상은 말을 멈추고 성안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로하려 하였으나 말이 빨리 달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초경(初更)에 군인들이 놀라 떠들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오면서 인마가 서로 짓밟기도 하였다.
궁인 이씨는 밖에서 이 소리를 듣고 변이 났다 하여 스스로 자기의 목을 찔렀으나 죽지는 않았다.
이경에 또 놀라서 떠들다가 한식경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 2일 상이 승지 신잡(申磼)과 정랑 이홍로(李弘老)를 명하여 임금이 친히 쓴 교서를 주어 경성으로 보냈는데 인민을 위로하고 달래려고 한 것이다.
○ 사시(巳時)에 병조 정랑 구성(具宬)이 내문(內門)에서 나오며 말하기를,
하니, 대소 관원이 궁문 밖에 늘어 앉아 말하기를,
하였다. 판윤 홍여순(洪汝諄)이 헌납 이정신(李廷臣)에게 말하기를,
하니,
구성이 노하여 말하기를,
하고, 대사간 김찬(金瓚)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모든 대관(臺官)이 마침내 따라 들어갔다.
상이 이르기를,
하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뭇 관원이 모두 아뢰기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하고,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였다. 황붕(黃鵬)이 아뢰기를,
하니, 구성(具宬)이 황붕의 옷을 잡아 끌어내며 말하기를,
하였다. 유성룡이 뜰에 내려가 눈물을 흘리면서 절하며 아뢰기를,
하니, 최황(崔滉)이 또 아뢰기를,
하였다. 상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하고서, 이어 사관(士官)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하니, 사관이 아뢰기를,
하였다.
최황은 그래도 둘러대며 사죄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드디어 이산해를 파직시키고, 최홍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남도 병사(南道兵使) 신할(申硈)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서 통어사의 자격으로 임진(臨津)에다가 군사를 주둔시켰다.
○ 3일 상은 남문에 나와 부로와 인민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서 고충을 물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니, 선비 10여 명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하였다.
○ 상의 행차가 돌아오려 할 때, 승지 이충원(李忠元)이 아뢰기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고, 마침내 행궁(行宮)으로 돌아갔다.
○ 상이 개성 유수 홍이서(洪二恕)가 병이 있고, 승지 이정형(李廷馨)이 전에 본부의 경력(經歷)으로 치적이 있었다 하여 정형을 유수로 발탁하여 임명하고,
또한 그의 형 이정암(李廷馣)을 명하여 함께 개성을 지키게 하고, 이국(李)을 승지로 임명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하였다.
상이 그 말을 따라 윤두수로 유성룡을 대신케 하였다.
○ 상이 기성부원군 유홍과 도승지 이항복에게 명하여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모시고 평양으로 먼저 가게 하고, 이항복을 참판으로 발탁해 제수하여 즉일로 떠나가게 하였다.
○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을 적소인 강계(江界)에서 불러들여 유홍 등과 함께 왕자를 보호하게 하였다.
○ 예조 판서 정창연(鄭昌衍)이 말하기를,
하니, 많은 관리들은 모두 새로 임명된 정승이 출사(出仕)한 뒤에 논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 4일 상이 종신(從臣)을 시켜 한 사람을 차출하여 양호(兩湖)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게 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보덕(輔德) 심대(沈垈)가 아뢰기를,
하였다. 상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하고,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보내고자 하였다.
심대는 아뢰기를,
하므로, 상은 그냥 위로해 보냈다. 오후에 신잡(申磼)이 혼자서 말하기를,
하였다. 이는 마산(馬山)에 이르러 길가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듣고 겁이 나서 돌아온 것이었다.
상은 출발 준비를 명하였다.
○ 정창연(鄭昌衍)은 대가가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지 않고, 태묘(太廟)의 신주를 목청전(穆淸殿)의 우측에 안치하였다.
○ 저녁 무렵에 대가가 출발하니, 상하가 소란스러웠는데 임진강을 건널 때보다도 더 심하였다.
밤에 금교(金郊)에 도착하여 재신(宰臣) 이하 모두가 풀밭에서 노숙하였다.
이날 밤 군인들이 놀라서 소동을 피운 것이 4ㆍ5차례였으며 사람들은 잠들지 못하였다.
한응인(韓應寅)을 순경사(巡警使)로 삼아 호위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 5일 임금이 금암(金巖)에 도착하여 이조 판서를 시켜 호종 인원의 명단을 보고하게 하였다.
해가 저물어서야 평산(平山)에 도착하였고 보산(寶山)에서 유숙하였다.
○ 6일 대가가 낮에 안성(安城)에 머무르고, 저녁에 용천(龍泉)에서 쉬었는데, 안성과 용천에서 모두 수라를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역참(驛站)을 배로하여 검수(劍水)를 지나 봉산(鳳山)에 이르니 날이 이미 초경이 되었다.
상하가 모두 허기가 져서 갈 수 없었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은 노하여 꾸짖기를,
하고, 말 위에서 팔을 휘두르고 주먹 다짐을 할 것같이 하니, 모두들 실소(失笑)를 하였다.
○ 7일 임금의 행차가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이 장연 현감(長淵縣監) 김여율(金汝嵂)을 맞이하여 말하기를,
하니, 김여율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난색을 표시하였다.
심충겸이 꾸짖기를,
하니, 김여울은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청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한 지방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상은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무사라 하여 특별히 표창을 주고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보냈다.”
○ 8일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니, 감사 송언신(宋言愼)이 군사 3천 여 기를 거느리고 전후로 어가(御駕)를 영접하였는데, 창과 칼이 햇빛에 번쩍이어 기세가 매우 당당하였다.
성중의 인민들의 가옥은 서울과 같아서 수행한 인원들이 비로소 생기를 띠게 되었다.
○ 이때에 조정의 중의(衆議)는 모두 김명원(金命元)ㆍ신할(申硈)이 비록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으나 병력이 대단히 고단하니, 또 다시 문무 장관을 보내어 협동으로 방어해야 한다 하였다. 드디어 한응인을 제도도순어사(諸道都巡御史)로 삼고, 이천(李薦)을 방어사로 삼았다.
○ 9일 이성중(李誠中)이 와서 말하기를,
하므로, 유홍(兪泓)을 우의정 겸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군사 3천을 주어 출발하게 하였다.
○ 10일 종묘와 사직의 신주가 왔다.
대가가 보산(寶山)에 당도하던 날 종실 해풍군 기(海豊君耆)가 윤두수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하니, 윤두수가 대답하기를,
하였다.
그리고 예관을 보내서 모시고 오게 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 유홍이 명을 받고 시일이 경과되어도 출발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지라, 상이 불러 묻기를,
하니, 유홍이 아뢰기를,
하였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이 큰 소리로 꾸짖기를,
하면서 마구 때릴 기세를 보였다. 임금도 쓴 웃음을 지으면서 이르기를,
하였다. 유홍은 끝내 가지 않았다.
○ 11일 한응인(韓應寅)ㆍ이천(李薦)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출발 인사를 하러 왔다.
떠날 적에 상이 술을 하사하며 위로하고 권면해 보냈다. 비망기에,
하였다.
이성중이 아뢰기를,
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하고, 마침내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 12일 이항복(李恒福)을 형조 판서로, 신잡을 이조 참판으로, 유희림(柳希霖)ㆍ홍진(洪進)ㆍ민준(閔濬)을 승지로 삼았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아뢰기를,
하니,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가 모두 즐거워하면서 머지 않아 임금이 환궁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 조정에서 이르기를,
하였다.
○ 13일 이항복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치계하기를,
하였다.
그 때에 여러 장관도 모두 말하기를,
하므로, 조정에서는 그 말을 믿어 김명원(金命元)에게 거듭 지시를 내려 적을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책망하였다.
○ 이성임(李聖任)을 순찰부사로 삼아 강변의 토병(土兵) 중에 돌아온 자를 거느리고서, 전선으로 가서 참찬 한응인의 군무(軍務)를 돕게 하였다.
이에 앞서 이성임이 왜적의 난리를 듣고는 조정에 자청하여 몸소 영남에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조정에 한응인(韓應寅)을 도와 적을 토벌하겠다고 자청하였으므로 보낸 것이다.
○ 14일 상이 한응인에게 타이르기를,
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하였다. 3일 만에 윤허가 내려서 평해군(平海郡)으로 귀양갔다.
○ 삼사가 또 김공량의 죄를 논의하기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 이덕형이 돌아와 아뢰기를,
하였다.
또 윤두수(尹斗壽)에게 말하기를,
하니, 윤두수는 눈을 부릅뜨고 대답하지 않으므로 이덕형은 망연히 무엇을 실수한 듯 얼굴이 붉어져 물러 갔다.
○ 대사간 김찬(金瓚), 부제학 홍인상(洪麟祥), 집의 권협(權悏), 종묘영(宗廟令) 권희(權憘), 이조 정랑 박동현(朴東賢), 봉교 강수준(姜秀俊),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등이 앞뒤로 상소하기를,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소하여 귀향을 원하는 자가 어지러이 그치지 아니하니, 조정에서는 아뢰기를,
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하직(下直)을 고하지 아니하고 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글을 보고 한편 슬퍼하고 한편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한효순을 당상으로 승진시키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 정곤수(鄭崑壽)를 대사간으로, 심충겸(沈忠謙)을 부제학으로, 이정립(李廷立)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 인성부원군 정철(鄭澈)이 와서 아뢰기를,
하였다.
○ 조정에서 아뢰기를,
하여, 드디어 각도의 감사에게 유시하였다.
○ 경상좌도 병사 이각(李珏)이 본도에서 이탈하여 임진강의 진중에 나타나므로,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그의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 대가가 평양에 도착한 뒤로 조정에서, 서울을 떠날 때에 위에서 비록 죄 있는 자를 사면하라는 교서가 있었으나 확실한 명령이 없으므로 감히 시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명단을 작성하여 아뢰었더니, 역적에 연좌되어 귀양간 자도 모두 석방되었다.
그런데 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백유함(白惟咸)ㆍ장운익(張雲翼)ㆍ유공진(柳拱辰)ㆍ이춘영(李春英) 등은 석방되지 않았다.
삭탈관직을 당한 자도 모두 탕척(蕩滌)되었으되, 박점(朴漸)만이 남아 있었다.
수일 후에는 홍성민 이하도 모두 사면되어 다시 서용받게 되었다.
○ 16일 임진강에 포진하고 있던 적이 일시에 진영을 태워버리고 철수해가는 시늉을 하는지라,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치계하기를,
하고, 조정에서도 그럴 듯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한응인(韓應寅) 등에게 추격하라고 재촉하였다.
○ 17일 한응인이 전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넜다.
신할(申硈)이 좌군을 거느리고 먼저 적진을 공격하니, 나무하던 적이 보고는 달아났다.
김명원(金命元) 이하가 멀리 바라보고 모두 아군이 승리하여 나아간다 하고, 검찰사 박충간(朴忠侃)과 독진관(督陣官) 홍봉상(洪鳳祥)은, 우리 군사가 반드시 이긴다 하여 환호하며 날뛰었다.
홍봉상은 즉시 강을 건너 군사를 독려하는데 잠시 후에 7ㆍ8명의 적이 알몸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나와 아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좌ㆍ우군이 일시에 크게 무너져 신할 이하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면서 모두 강에 빠져 죽고, 홍봉상도 죽었다.
이때에 김명원과 한응인ㆍ박충간이 모두 푸른 천의 옷을 입었다.
박충간은 일이 틀린 것을 보고 말을 타고 달아났다.
강 위에 있던 군사가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일시에 소리치기를,
하면서, 뿔뿔히 달아났다.
김명원과 한응인은 몸소 나와 외치기를,
하니, 비로소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남은 군사는 겨우 천 명 정도였다.
○ 19일 보고를 접하자 상하가 크게 놀랐다.
재기의 가망이 없어서 드디어 강변 토병(土兵) 중에서 동원되지 않은 자를 징발하여 모두 군에 편입시켰다.
전 첨사 박석명(朴錫命)이 용맹이 있어 명령을 받고 전투에 나갈 때 조정이 적을 사로잡는 방책을 물었다.
박석명이 대답하기를,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말이 반드시 실효가 없을 줄을 알면서도 당상으로 승진시키려 하다가 마침내 절충장군으로 뛰어올려 제수하여 보냈다.
○ 조정에서는 적의 형세를 알 길이 없을 뿐더러 또한 대응책이 없다 하여, 마침내 선전관 이호의(李好誼)ㆍ김계현(金繼賢)을 시켜 서울에 가서 염탐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 김명원이 아뢰기를,
하니, 조정에서는 베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선전관을 보냈다. 오후에 신각이 해유령(蟹踰嶺)에서 싸워 7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승전의 보고를 접하자 상은 그의 사면을 명하였다.
그러나 명령이 도착했을 때에는 머리가 이미 진 앞에 매달려 있었다.
○ 대사헌 이항복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하니, 이항복이 물러갔다.
○ 관전보(寬奠堡)의 총병(摠兵)이 의주 목사 황진(黃璡)을 불러 말하기를,
하니, 황진이 대답하기를,
하자, 총병은 웃으며 돌아갔다.
황진은 이 일을 자세히 아뢰니, 상은 보고 노하여 이르기를,
하고, 체포하여 국문하고자 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황진이 명령을 듣지 못했으니, 대관(大官) 1명을 보내 상황을 보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좌승지 유근(柳根)을 추천하므로, 상은 그를 이조 참판으로 제수하여 보냈다.
○ 남도 병사(南道兵使) 이혼(李渾)이 적병이 서울에 육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연천(漣川)으로 와서 이양원(李陽元)과 군사를 합하고, 그 곡절을 자세히 임금께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치사하였다.
적이 변방을 침범하던 초기에 조정에서는 공문을 요동(遼東)에 보냈는데, 그 후 정신이 없어 계속 보고를 보내지 못하였다.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자, 통역관만 보내 대충 긴박한 사태만을 보고하였더니, 이때에 요동대인(遼東大人 관전보 총병의 존칭)이 의주에 힐책하여 물어 왔던 것이다.
상이 또 유근(柳根)을 명하여 전후 곡절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다.
○ 조정에서는 강계 부사 홍세공(洪世恭)이 쓸 만한 재질이 있다 하여 불러서 승지를 제수하였다.
○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자기 어머니가 토적(土賊)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이항복으로 대체하고, 이덕형(李德馨)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 27일 적이 임진 하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로 강을 건널 듯이 하면서 아군을 시험하였다.
부원수 이빈(李薲)이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먼저 도망가서 상하 모든 군사가 일시에 크게 무너졌다.
이양원 등은 적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북도로 달아났다.
○ 29일 보고를 접하자, 상은 구사맹(具思孟)ㆍ신잡(申磼)ㆍ구성(具宬)에게 명하여 신성군(信成君)ㆍ정원군(定遠君)을 배행하여 영월군(寧越郡)으로 가게 하였다.
○ 이때에 조정에서는 임진강의 군사가 능히 적을 방어하리라 생각하여 다시 방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평안 감사 송언신(宋言愼)과 병사 이윤덕(李潤德)은 사람의 안색이 없이 모두 정신이 나가서 미투리를 신고 떠났다.
○ 조정에서는, 북도로 들어갔던 적이 양덕(陽德) 등처로 돌아 배후로 나오게 되면, 더욱 적을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홍여순(洪汝諄)을 순찰사로 삼아 양덕으로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홍여순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이윤덕이 거느린 군사 절반을 주고, 또 대동역마(大同驛馬)를 내어주어 전쟁의 용도로 쓰게 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하고,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다.
○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 서장관 민몽룡(閔夢龍)이 조정을 하직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떠날 적에, 방물(方物)은 모두 버리고 표문(表文)만 가져왔다.
조정에서는 비록 방물은 없더라도 때에 맞추어 중국 서울로 가야 된다 하여 마침내 그들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