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교수의장망록어..(張大敎網 漉人天之魚)."
(張大敎網 漉人天之魚)."
가르침의 그물을 크게 펼쳐 미망(迷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모두 제도(濟度)하라는 뜻이다.
범어사 부근에 원효 스님의 유지(遺址)가 있었다.
1936년 이곳에 공사를 하면서 땅을 파다가 두 길 깊이에서 해묵은 옥인(玉印) 하나가 출토됐다.
본래 철합(鐵盒)에 넣었던 것인데 오랜 세월에 합은 다 삭고 옥인만 남은 상태였다.
인장에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크게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 인천(人天)의 물고기를 낚는다
(張大敎網 漉人天之魚).
" 가르침의 그물을 크게 펼쳐 미망(迷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모두 제도(濟度)하라는 뜻이다.
원효의 천년 성지 땅속 깊은 곳에서 쇠로 만든 상자가 다 삭아내려 흔적도 찾기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옥인은 그 모습을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효의 천년 성지 땅속 깊은 곳에서 쇠로 만든 상자가 다 삭아내려 흔적도 찾기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옥인은 그 모습을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생 제도의 서원은 삭지도 않고 삭을 수도 없었던 것일까?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은 동산(東山·1890~1965) 스님에게 계맥을 전수하는 정전옥첩(正傳玉帖)에서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은 동산(東山·1890~1965) 스님에게 계맥을 전수하는 정전옥첩(正傳玉帖)에서
"해동 초조(初祖)의 보인(寶印)을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신표로 주노니 잘 지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며 이 옥인을 내렸다. 동산은 이를 허리에 차고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았다 한다.
동산 스님이 서울에 왔다가 속가의 고모부인 위창 선생을 찾아 가 옥인을 지니게 된 내력을 들려주었다.
위창은 감탄하며 그 옥인에 인주를 듬뿍 묻힌 후 정성스레 자신의 인전지(印箋紙)에 찍었다.
그리고 전후 사연을 적어 두 구절의 시와 함께 써 주었다.
"옥돌이 삭지 않아 어보(魚寶)를 받쳐내니,
허리에 찬 작은 인장 천년의 고험(攷驗)일세
(土花不蝕漉魚寶 腰間小鑈爾千年攷)."
동산 스님은 옥인을 찬 채
동산 스님은 옥인을 찬 채
'서리 솔의 맑은 절조,
물 위 달의 텅 빈 마음(霜松潔操 水月虛襟)'
같은 맵고 맑은 정신으로 성철 스님 같은 근세의 선지식들을 무수히 길러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