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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6월해평윤공윤승길판서묘답산

어풍대08 2014. 6. 16. 11:59

해평윤씨윤승길선생묘..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성부사(龜城府使)로서 병사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609년 해선군(海善君)에 봉해졌다.
윤승길 선생 묘

윤승길 선생 묘

출생-사망 1540 ~ 1616
본관 해평(海平)
자일(子一)
남악(南岳)
시호 숙간(肅簡)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는 자일(子一), 호는 남악(南岳)이다. 사헌부감찰 윤홍언(尹弘彦)의 아들이다.

 1564년(명종 19)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성부사(龜城府使)로서 병사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다.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로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휼하고 장정을 뽑아 기효신법(紀效新法)으로 훈련을 시켜 명나라 지휘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600년(선조 33) 형조판서 겸 도총관에 올랐으며, 같은 해 자신의 딸을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과 혼인시켰다.

 한성부우윤, 좌참찬을 역임하고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609년(광해군 1) 해선군(海善君)에 봉해졌다.

 1616년(광해군 8)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예관과 조관을 보내 장례를 치렀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참조항목
윤승길선생묘 및 신도비

[네이버 지식백과] 윤승길 [尹承吉] (두산백과)

 

 

 

 

 

 

 

윤승길(1540~1616)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일(子一), 호는 남악(南岳), 본관은 해평(海
平) 으로 사헌부감찰 윤홍언(尹弘彦)의 아들이다. 

한성부우윤을 지내면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직하고,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마지막으로 모든 관직생활을 마감한다.

1616년(광해군 8)에 한양(漢陽) 낙선방(樂善坊, 현 중구
묵정동)에서 세상을 하직하자 조정에서 예관(禮官)과 조관(朝官)을 내려보내 장례를 치렀다.

또 이곳 묘역에 합장된 정부인 금성박씨는 선생이 죽자, 음식을 전폐하고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정렬(貞烈)을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선생은 뒤에 해선군(海善君)에 봉해졌고, 영의정으로 추증(追
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숙간(肅簡)이다.


묘는 정부인 금성 박씨와 합장묘로 봉분 하단에 40cm 높이의 호석이 둘러져 있다.

 묘앞에는 묘비
(총높이 165cm, 폭 59cm, 두께 20cm)와 상성, 향로석, 그 좌우에는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각
각 배치되었다.

묘비는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다.

묘비의 전면에는 [자헌대부영의정부좌
참찬겸지춘추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숙간윤공묘]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에서 약 100m떨어진 지점에위치한 신도비는 2001년 11월12일에 난간 세로 5m, 가로 6m, 용관
폭 120cm, 두께 90cm, 높이 100cm, 비석폭 86cm, 두께 53cm, 높이 245cm, 거북바탕의 비좌 폭
190cm, 높이 103cm의 규모로서 신도비문은 병조참판 이서우가 찬한 비원문을 각자수립 하였다.

 

 

 

 

 

 

 

 

 

 

 

 

윤승길묘역은교과서적인명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