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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6월양주조씨.입향조묘역답산

어풍대08 2014. 6. 16. 10:44

양주조씨江華府事公.檀墓입구..

 

 

 

 

 

양주조씨강화부사공의집안내력과역사그리고단묘역조성역사를기록해두셨으니..일독하시길권한다.

 

 

 

 

 

 

 

 

 

 

양주두산백과

양주조씨

[ 楊州趙氏 ]

요약
경기도 양주에 본관을 두며, 고려 때 양주호장(楊州戶長),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조잠(趙岑)이 시조이다.

세도 가문은 아니나 조선 중기 이후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시조 조잠(趙岑)의 증손대(조선 전기)에서

정평공파(靖平公派:啓生)·

문강공파(文剛公派:末生)·

제학공파(提學公派:從生)·

강화공파(江華公派:惟中)의 4형제로 대별된다.

그러나 정평공파와 제학공파는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김종서(金宗瑞) 일파로 몰려 죽음을 당함으로써 현재 그 후손이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전한다.

 따라서 양주조씨의 숱한 인물들은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으로서 오늘날 문강공은 사실상 중시조가 된다고 한다.

양주조씨 일문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조말생의 손자인 조정(趙挺)이 1619년(
광해군 11)에 우의정에 오름으로써 시작된다.

 인조의 국구(國舅)가 된 조창원(趙昌遠),

 현종 때의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에 이어,

조계원의 아들 7형제에 이르러서는 숙종·정조 시대에 걸쳐 그 세력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에는 같은 집안이면서도 노·소론(老少論) 양파로 갈라져 당쟁의 극렬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7형제 중 둘째 조구석(趙龜錫),

셋째 조희석(趙禧錫),

넷째 조사석(趙師錫),

 다섯째 조가석(趙嘉錫) 등 4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였는데,

조희석의 후대는 노론(老論)으로,

 조사석과 조가석의 후대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져 집안끼리 당쟁을 벌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을사조약 때 기울어지는 국운(國運) 앞에 충의를 다하다 자결한 조병세(趙秉世)를 들 수 있다.

참조항목
, 조병세, 조정

[네이버 지식백과] 양주조씨 [楊州趙氏] (두산백과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시조의 증손대에서 4개파로 나뉘어졌다.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낸 조계생(趙啓生)을 파조로 하는 정평공파(靖平公派),

강화부사(江華副使)를 지낸 조유중(趙惟中)의 강화공파(江華公派),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조말생(趙末生)의 문강공파(文剛公派),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조종생(趙從生)의 제학공파(提學公派)로 나뉘어졌다.

주요세거지

[네이버 지식백과] 양주조씨 [楊州趙氏] (성씨와 본관, 2011.1.14,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