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암묘지명(李嵒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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鉄城府院君李文貞公墓誌銘(幷序)
至正甲辰五月初五日推誠守義同德賛化翊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鉄城府院君李公年六十八以病卒于第大常謚文貞有司供葬事如典故六月初九日窆大德山夫人洪氏域中明年
上思公親命工畵其形旣肖錫朋酒以祭季子岡泣謝退徵穡銘曰
銘之不蚤若有待今可銘矣穡以岡故父事公嗚呼忍銘諸公諱君侅字翼之後避兇人名改嵒字古雲晋州固城縣人曾大父諱瑨及第不仕大父諱尊庇用儒術事 忠烈王掌銓選餘三十年試士成均又知貢擧卒官判密直司事監察大夫父諱瑀以材幹歷使淮陽金海全晋二牧所至有遺愛封鉄原君妣朴氏咸陽郡夫人父諱之亮判三司事有功至元間 天子賜金符授萬夫長公髫齕異凡兒入小學已稱善書年十七中癸丑科知貢擧權政丞崔賛成大加賞異曰公輔器也自是學大進華問日播 毅陵愛其材命典符印除官秘省由校勘再遷爲郞注簿丹陽府佐都官就陞正郞 永陵初元以典儀令擢密直司代言兼監察執義同知辛未貢擧至元庚辰復職知申事俄改成均大司成階奉翊未幾有旨成均師道所在任亦重矣然左右予理兩府實專其職其予樞密同知命下朝士相慶曰善人與政矣旣而遷政堂文學僉議評理知辛巳貢擧是時用事者詆姍我儒公孤立無助志竟不得行然亦多所匡救焉 明陵立眷顧益豊加賛成事 聦陵立以爲 先王舊臣之中有德有勞惟李某可輔予政遂拜左政丞未幾罷 今上還國欲用公未果令襲父封開府以致敬三年癸巳公自念年將六十位亦極矣不以此時乞骸骨復何竢去入淸平山 上求理甚急徵禮耆老公還諭留之時時召入對遂決意用公八年戊戌秋復爲守侍中己亥冬毛賊犯北鄙以公爲兵馬都元帥往督諸軍軍未集而賊已近矣西京守臣謀守不可又欲謀焚倉廪公曰非計也賊遠鬪其鋒不可當不中止其勢必震我國都欲賊中止莫若㗖以此城可令吾民挈老幼東走鐍倉廪屋廬無所壞賊見必怯我亦且少駐怯我心驕少駐氣衰俟吾軍集可一旦襲取安知今日所欲焚者不爲吾他日用乎未踰月賊果敗如公所料倉廪屋廬完全如初辛丑冬從 幸安東功第一明年賊平行賞公面奏今不幸罹玆多故將相須才臣以無狀久叨尤揆請避賢上愈益嘉其無他加賜功臣號封君奉朝請公於官勤謹守繩墨無一毫假貸於家不問有無費圖書自娛淡如也與禪源息影老人爲方外友築堂寺中扁曰海雲扁舟往還至輒忘歸盖其雅量如此杏村其自号也甞手寫太甲篇以獻語其子岡曰汝志之吾旣老矣無官守無言責當以格君心爲務尔公自秘書以至宰相必與銓選予奪不少私故終身無怨言前後門生多達官聞人諸子皆有所樹立嗚呼天之報施善人其有徵哉夫人侍中謚忠正諱子藩之曾孫右代言諱承緖之女先公二十七年歿胤慶配德母有多子男四人寅中正大夫宗簿令次崇正順大夫判典客寺事次陰與平毛賊以功拜上將軍辛丑冬戰歿安州次即岡今爲密直司知申事藝文舘提學知製敎知典理司事女二人一適判事金光丙一適淮陽府使趙愼側室子曰牧郞將孫男某某官曰某曰某孫女若干外孫金某某官曰某曰某外孫女若干銘曰
巍〃文貞開府鉄城初宅尤揆曰噫戒盈奉身而退水綠山明如雲卷舒杳乎無情還居廟堂不動色聲長虵封豕就戮西京天啓公衷從容策成俾驕以覆九廟不驚人始歎服詩書用兵大已盖世其細奚評王曰元老雖死猶生我儀圖之以風列卿旣成旣肖明禋繼伻列卿用勸子孫與榮自古在昔君臣聚精不亡其亡匪他曰誠詔爾太史尙徵斯銘
〔출전:『牧隱文藁』권17〕
이암묘지명(李嵒墓誌銘)
박종기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문정공(李文貞公) 묘지명 및 서문
지정(至正) 갑진년(공민왕 13, 1364) 5월 초5일 추성수의 동덕찬화익조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철성부원군(推誠守義 同德贊化翊祚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鐵城府院君) 이공(李公)이 향년 68세로 병으로 인하여 자택에서 세상을 마쳤다.
대상시(大常寺)에서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관리들은 법전에 따라 장례의 일을 도왔다.
6월 초9일 대덕산(大德山)에 있는 부인 홍씨(洪氏)의 묘역에 합장하였다.
이듬해 임금이 공을 생각하고 친히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의 모습을 그리고 술을 내려 제사지내게 하였다.
막내아들 강(岡)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말을 드리고, 물러 와서 나(이색)에게 묘지명을 청하면서, “분묘에 묘지명을 일찍 만들지 않은 것은 때를 기다린 것이며, 이제는 묘지명을 청하는 것이 옳겠다.”하였다.
나는 강과 친밀한 벗이고 공을 아버지 같이 섬겼으니 아아, 어찌 차마 묘지명을 쓰지 않으랴.
공의 이름은 군해(君侅), 자는 익지(翼之)이다.
뒤에 흉악한 자와의 같은 이름을 피하여 이름을 암(嵒), 자를 고운(古雲)으로 고쳤다.
진주 고성현(固城縣) 사람이다.
증조부 진(瑨)은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존비(尊庇)는 유가(儒家)의 도로 충렬왕을 섬겨 30여 년간 관리 임명의 일을 맡았다. 성균시에서 선비를 뽑았으며, 또 과거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마지막 벼슬은 판밀직사사 감찰대부(判密直司事 監察大夫)였다.
아버지 우(瑀)는 재능을 인정받아 회양(淮陽)과 김해의 수령과 전주와 진주의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인애(仁愛)의 덕을 남겼고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다.
어머니 박씨는 함양군부인(咸陽郡夫人)으로 아버지 지량(之亮)은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지원(至元 : 원 세조의 연호, 1264~1294) 년간(年間)에 공로가 있어 천자가 금부(金符)를 하사하고 만부장(萬夫長)의 작호를 주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와 달랐고, 소학에 입학하였을 때 이미 글씨를 잘 쓴다고 일컬었다.
17세인 계축년(충숙왕 즉위, 1313) 과거에 급제하였다.
지공거인 권정승(權政丞)과 최찬성(崔贊成)이 크게 칭찬하였다.
또 공을 기특하게 여기고, “재상의 그릇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이 크게 진보하고 명성이 날로 알려졌다.
의릉(毅陵 : 충숙왕)이 그 재능을 사랑하여 부인(符印)을 맡게 하고, 비서성(秘書省)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교감(校勘)을 거쳐 다시 자리를 옮겨, 낭관(郎官) 주부(注簿) 단양부 좌도관(丹陽府 佐都官)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영릉(永陵 : 충혜왕) 초기에 전의랑(典儀郞)으로 밀직사 대언(密直司 代言)에 발탁되어 감찰집의(監察執義)를 겸하였다.
신미년(충혜왕 1, 1331)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임명되고, 지원(至元) 경진년(충혜왕 복위1, 1340) 다시 지신사(知申事)로 복직, 곧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고쳐 임명되었고, 관계(官階)는 봉익(奉翊)이었다.
얼마 안되어 임금이 전지하기를, “성균관은 스승의 도가 존재하는 곳이며 그 임무 또한 중하다.
그러나 나의 정치를 돕는 것은 양부(兩部)에서 실상 그 직무를 오로지 하고 있으니, 그에게 추밀동지(樞密同知)를 주라.” 하였다.
명이 내리자 조정 위의 선비들이 서로 경사스럽게 여기면서, “착한 사람이 정사에 참여한다”고 하였다.
바로 정당문학 첨의평리(政堂文學 僉議評理)로 자리를 옮겼다.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이 때 권세를 잡은 자가 우리의 유가(儒家)를 비방하고 비웃었다.
공이 완전 고립무원의 입장이 되어 그 뜻을 끝내 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로잡아 구제한 바 또한 많았다.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자 신임과 은총이 더욱 많아,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총릉(聰陵 : 충정왕)이 즉위하자, “선왕의 옛 신하 중에 덕 있고 공로 있는 자로 오직 이모(李某)가 나의 정사를 보좌할 수 있을 것이다.”하면서 좌정승(左政丞)에 임명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파면되었다.
지금의 임금(공민왕)이 본국에 돌아와 공을 등용하려했으나 그렇지 못하자,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고 부(府)를 열게 하여 공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였다.
계사년(공민왕 2, 1353) 공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나이 장차 60이 되고 지위 또한 극에 달하였으니, 이때에 은퇴하여 물러가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랴’하고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려는 마음이 매우 급하여 나이와 덕이 높은 옛 신하들을 예로써 부르자, 공은 서울로 왔다.
왕이 명령하여 머물러 있게 하고 때때로 불러 자문을 받았다.
공을 등용할 것을 결심하고, 무술년(공민왕 7, 1358) 다시 수시중(守侍中)이 되었다.
기해년(공민왕 8, 1359) 가을 모적(毛賊 : 홍건적 대장인 毛居敬을 지칭한 말)이 북방 변경을 침범하자, 공을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삼고 가서 여러 군사를 감독하게 했다.
군사가 집합하기 전에 적이 이미 가까이 다가왔다.
서경(西京)을 지키던 신하가 서경을 지키는 것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창고를 불사르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계책이 될 수 없다.
적이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할 것이나, 이를 중간에서 막지 않으면 그 형세가 반드시 우리의 국도(國都)를 진동시킬 것이다.
적을 침입을 중지시키려면 이 성을 미끼로 함 만 같지 못하다.
우리 백성들은 늙은이와 어린애를 이끌고 동쪽으로 피하게 하고, 창고와 가옥을 단단히 잠그고 파괴함이 없게 하면, 적이 이를 보고 반드시 우리가 겁내고 있다하고 또한 잠시 주둔할 것이다.
우리가 겁낸다고 하면서 마음이 교만해 질 것이고, 잠시 주둔한다면 예기가 쇠약해질 것이다.
그 사이 우리는 군사의 집합을 기다렸다가 하루 아침에 공격하여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불살라 없애려고 하던 것이 다른 날에 우리가 다시 쓰게 될 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과연 공이 예측한대로 적이 패하였다.
창고와 가옥이 원래대로 완전하게 되었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임금이 안동으로 가시자, 임금을 모신 공이 제일 컸다.
이듬해 적을 평정한 상을 주려하자, 공이 면전에서 아뢰기를, “지금 불행히 다난한 때를 당하여 장상(將相)은 반드시 재주있는 신하를 등용해야 합니다.
신은 재주도 없으면서 오랫동안 재상을 자리에 있었습니다.
청컨대 어진 이를 쓰도록 해주십시오.”하였다.
임금이 공을 더욱 가상히 여겨 공신의 호를 더하여 내리고 군(君)으로 봉하고, 관계(官階)를 조청(朝請)으로 하였다.
공은 관직에 있을 때에는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법도를 지켜 한 터럭만큼의 용서도 없었다. 집에서는 비용의 유무(有無)를 묻지 않았으며, 책 읽기를 스스로 즐겨하고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사원에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는 늙은 승려들과 벗을 삼아, 경내에 집을 짓고 해운(海雲)이라 이름을 붙였다.
조그만 배로 오가면서 어느 곳에 이르면 문득 집에 돌아갈 줄 몰랐다.
대개 공의 아취와 도량이 이와 같았다.
행촌(杏村)은 스스로 붙인 호였다.
『서경(書經)』의 태갑(太甲)편을 손으로 베껴서 임금에게 바치고, 아들 강(岡)에게 말하기를, “너는 마음에 명심하라.
나는 이미 늙어 관직을 유지할 수도 없고 말할 책임도 없다.
너는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공은 비서로부터 재상직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관리들의 인사에 관여했으나, 그 과정에서 조금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평생토록 원망을 듣는 일이 없었다.
전후의 문생 중에 고관에 오른 자와 명성이 있는 자가 많았고, 여러 아들도 모두 업적을 세운 바 있었다.
아,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베풀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구나.
부인은 시중 충정공(忠正公) 자번(子藩)의 증손녀이며,
우대언(右代言) 승서(承緖)의 딸이다.
공보다 27년 먼저 별세했다.
집안의 경사스러움을 이어갔고 덕 있는 군자의 배필이었고, 어머니로서 자녀를 많이 두었다.
아들은 4인이다.
인(寅)은 중정대부 종부령(中正大夫 宗簿令)이다.
숭(崇)은 정순대부 판전객시사(正順大夫 判典客寺事)이다.
음(陰)은 모적(毛賊 :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상장군이 되었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안주(安州)에서 (홍건적과) 전투하다 별세하였다.
강(岡)은 지금 밀직사지신사 예문관대제학지제고 지전리사사(密直司知申事 藝文館大提學 知制誥 知典理司事)이다.
딸은 2인이다.
하나는 판사(判事) 김광병(金光丙)에게,
하나는 회양부사(淮陽府使) 조신(趙愼)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 목(牧)은 낭장이다.
손자 아무개는 모관직에 있고, 또 아무개와 아무개가 있다.
손녀도 몇 명이 있다.
외손 김 아무개는 모관직에 있고, 또 아무개와 아무개가 있다.
외손녀도 몇 명 있다.
명(銘)에 이르기를
높고도 높도다.
문정공이여 철성(鐵城)으로 부(府)를 열고
처음 재상에 오르자, 교만함을 경계하고
관리로 봉사하다 물러나서
물 푸르고 산 밝은 곳에서 구름이 걷고 펴듯
구름처럼 무심히 왕래하다가
다시 묘당에 돌아왔으나 얼굴과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긴 뱀과 큰 돼지가 서경에서 죽음을 받을 제,
하늘이 공의 마음을 계발하여 조용히 계책을 이루어서
적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여 패하게 하였으니,
구묘(九廟 : 종묘)의 혼령이 놀라지 않음을 얻었도다.
사람들이 비로소 탄복하기를 시서(詩書)로 병력을 움직였다 하였다.
큰 것이 이미 세상을 덮었으니 그 작은 것을 평해 무엇하리요.
임금이 이르기를, “원로여 몸은 비록 죽었으나 그 공로 오히려 살았으니,
내 그의 모습을 그려 여러 재상들을 가르치려 하노라.”
이미 초상을 그리고 관원을 보내어 재계하여 제사하니,
여러 재상들이 서로 권면하고 자손 또한 함께 영광이로다.
예로부터 임금과 신하가 정성을 모으면
망할 것을 망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성(誠)이로세.
저 태사에게 고하노니 이 묘지명이 증명하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