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는 『논어』에 나오는 ‘중도이폐’에 대한 다산의 해석이다. 『논어』의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염구: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힘이 부족합니다.”
”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今女畫。”]
공자: “힘이 부족하면
중도이폐한다.
지금 너는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주석가들은 대부분 중도이폐의 폐(廢)를
‘그만두다’,
‘멈추다’
등으로 풀었다.
그래서 중도이폐는 ‘가던 길을 멈추다.
’, ‘하던 일을 그만두다.
’의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때로 중도이폐는 포기라는 부정적인 맥락에 쓰이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이 ‘폐’ 자를 글자 본래의 뜻이 ‘집이 기울어 무너지다.
’이므로 사람의 경우라면 ‘기력이 다해 쓰러져 죽다
.’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이 말은 죽음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는다는 지극한 표현이다.
말이 측달하고 격렬하다.
[此是至死不已之至言。其言惻怛激烈。]”
우리는 때로 어떤 지향이 펼쳐 보이는 비전에 황홀함을 경험할 때가 있다.
이 황홀함의 경험은 그 지향에 대한 신념의 골격을 이룬다.
아울러 그 지향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삶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이 황홀함의 경험은 순간일 뿐이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그것과는 동떨어진 실제투성이다. 우리의 실제는 변화 불가능을 완고히 주장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역부족’을 실토하게 된다.
이런 실토가 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염구처럼 아예 멈춰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형해(形骸)화된
신념을 갖게 된다.
이런 염우에게 공자가 한 말을 다산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말한 ‘길’은 걸어가는 데 다른 이유가 없다.
단지 그 길이 좋기 때문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간의 고양된 삶에 대한 충만한 의미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이 길을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걷다가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으면 쓰러질 뿐이다.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힘이 부족한 것도, 힘이 다한 것도 아니다.
네가 이 길을 좋아한다면 바라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길에
오르거라.
공자는 이 길을 걷는 것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하였다:
“(이 길을 좋아하면) 그 길을 향해 가다가 가던 길에서 쓰러진다.
몸이 늙는 것도 잊고 길을 다 가기엔 나이가 부족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부지런히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쓰러지고 나서 끝난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后已。]
”『예기(禮記) 표기(表記)』
등에 진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수많은 현실의 완고한 걸림돌에도 내 힘의 부침에도 계속 길을 향해 간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것은 어느 것보다 격렬하다.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 길을 걷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지만 길을 걷는 자에게 허락된 것은 가던
길에서 쓰러지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비장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기쁜 자에게
‘중도이폐’는 삶의 도중의 모습이 아니라
삶의 끝에야 성취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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