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 대신 평생 선비의 길 걸은 ‘탁청정’ 김유
號에 걸맞은 올곧은 일생…퇴계·농암 등과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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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의 개인 정자로는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알려진 탁청정(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전경. 1541년 김유가 건립했다. ‘탁청정(濯淸亭)’ 편액 글씨는 한석봉이 정자 마루에 걸어놓은 편액에 직접 썼다는 일화가 전한다. |
정자나 거처를 마련하면 또한 그 이름을 지었다.
그 명칭은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 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사는 곳의 지명을 따서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의 후학이나 후손이 그 이름을 지을 경우는 그 주인공의 삶을 대변할 수 있도록 했다.
호가 정자 이름과 일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안동과 그 주변에는 특히 정자가 많다.
그중 선비들이 지향했던 바를 알 수 있는 이름의 대표적 정자 두 곳으로 추월한수정과 탁청정을 꼽을 수 있다.
추월한수정은 후학들이 퇴계(退溪) 이황(1501~70)을 기려 지은 정자이고,
탁청정은 탁청정(濯淸亭) 김유(1491~1555)가 생전에 지어 수양하던 곳이다.
이 두 정자의 이름에 담긴 뜻을 통해 선비들이 추구했던 삶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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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의 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에서 따온 정자 이름 ‘탁청정(濯淸亭)’ 편액 원본. 탁청정은 김유의 호이자 정자 이름으로, 편액 글씨는 석봉 한호가 썼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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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마음을 가을 달빛이 맑고 차가운 물에 비치는 것과 같음을 비유한 글에서 따온 정자 이름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편액. 추월한수정은 후학들이 퇴계 이황을 기려 지은 정자이고, 편액은 근세 설암체의 대가로 알려진 이동흠의 글씨다. |
◆퇴계 이황의 삶을 표현한 정자 이름 ‘추월한수정’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은 퇴계종택(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경내에 있는 정자다.
종택 사당 앞에 있는 정자로, 불천위 제사의 제청이나 문중 모임,
예절교육 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편액 ‘추월한수정’의 ‘추월한수(秋月寒水)’는 말 그대로
가을 달과 차가운 물인데, 성인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주자(朱子)의 ‘재거감흥(齋居感興)’이라는 시에서 따온 글귀다.
“공손히 생각하니 천 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恭惟千載心)/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춤이로다(秋月照寒水).
” ‘재거감흥’에 나오는 이 글귀 중 ‘추월조한수’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의 도학(道學)을 다시 이은 주자가 공자의 마음,
즉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하고 있다.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은 퇴계에 대해
“선생의 학문은 명백하고 쉽다.
선생의 도는 광명정대하다.
선생의 덕은 온화한 바람이요 상서로운 구름이다.
선생의 마음과 도량은 가을 하늘 밝은 달이며,
탁 틔어 보이는 얼음 항아리다”라고 표현했다.
‘추월한수’의 의미를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퇴계의 삶과 학문을 표현하고 있는 정자 이름이라 하겠다.
추월한수정은 1715년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1654~1725)이 퇴계의 도학을 추모해 지었다.
퇴계가 공부하며 자라고 은퇴 후 머문 곳에 지었다.
정자 이름도 그가 명명했다.
그러나 이때 지은 정자는 1907년 일제의 방화로 타 버리고, 그후 1926년 유림이 정자를 복원하자는 뜻을 모으고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 2년여에 걸쳐 정자를 비롯해 사당과 종택 본채 등을 중건했다.
정자 안에 걸려있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
‘이운재(理韻齋)’
‘완패당(玩佩堂)’ 등 현판 이름도 그가 지었다.
도학연원방은 도학의 본산이라는 뜻이다.
산남궐리와 해동고정은 공자가 태어난 곳인 궐리와 주자가 공부한 곳인 고정이라는 지명을 빌려와 지은 것으로,
추월한수정이 궐리와 고정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완패당’의 ‘완패’는 “나의 패물(佩物)을 누가 완상(玩賞)할 것인가”라는 뜻이다.
패물은 마음에 간직한 패물로, 여기서 패물은 퇴계가 연구·발전시킨 도학(道學)을 의미한다.
‘완패’는 ”퇴계의 도학을 누가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겠다.
지금의 ‘추월한수정’ 편액 글씨는 근세 설암체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1881~1967)이 썼다.
추월한수정 대문에 걸린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 편액 글씨도 그의 것이다.
항일독립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퇴계의 후손이다.
‘산남궐리’와 ‘해동고정’은 해강(海岡) 김규진 글씨이고,
‘이운재’와 ‘완패당’은 해강 제자 홍락섭의 글씨다.
◆선비의 높은 절개와 맑은 삶에 대한 염원을 담은 ‘탁청정’
탁청정(濯淸亭)은 김유의 정자다.
당호는 김유의 호에서 따왔고,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1543~1605)의 글씨다.
탁청정 종택(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 28의 1) 내에 있다.
1541년 김유가 건립했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4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김유의 호이자 정자 이름인 탁청정의
‘탁청’이라는 말은 초나라 시인이자 정치가이며 충절(忠節)의 대명사로 인정받는 굴원(屈原)의 명작
‘어부사(漁父辭)’에서 기원한다.
굴원은 삼려대부의 벼슬을 했다.
초나라 회왕(懷王)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책을 맡겼으나, 주위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장편의 서정시인 ‘이소(離騷)’를 지어, 왕이 그 글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를 바랐다.
시간이 흐른 뒤 굴원은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양왕(襄王) 때 다시 참소를 당해 강남에 유배되었다.
이때 굴원은 ‘어부사(漁父辭)’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초나라가 진나라에 망하자 그는 멱라강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어부사를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해 대화를 나누는데,
한 사람은 굴원 자신이고 한 사람은 어부이다.
초췌한 모습으로 못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는 삼려대부 벼슬을 한 분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느냐고 묻는다.
굴원은 세상이 온통 흐린데 자신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홀로 깨어있어 쫓겨난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어부는 왜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고상한 행동을 하다가 추방됐느냐며 나무란다.
굴원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고 하는데 어찌 깨끗한 몸을 더럽힐 수 있겠느냐고 답한다.
이에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는 떠나버린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
어부의 노래에는 굴원 자신의 지나치게 곧고 맑은 삶의 태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탁청’은 이 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는다”에서 온 말이다.
탁청정 편액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정자 편액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편액이다.
편액은 정자의 마루에 걸려 있는데, 현재의 편액은 복제품이다.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이 보관하고 있다.
이런 뜻이 있는 탁청을 호로 짓고 정자의 이름으로도 사용한 김유는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호에 걸맞게 거지와 같은 사람도 성의를 다해 대했지만, 옳지 못한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올곧았다.
그는 벼슬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평생 독서하고 유유자적하며 지냈다.
퇴계를 비롯해 농암 이현보,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 당대의 이름난 선비와도 교유했다.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그는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무과에 응시하다 낙방하자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는 집 근처에 탁청정을 짓고 선비와 나그네들을 정중하게 대접하며 살았다.
탁청정은 영남 지방에 있는 개인 정자로는 가장 웅장하고 우아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