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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남양홍문!!두곡홍우정선생의옥류암!!

어풍대08 2013. 4. 28. 14:33

옥류암.

봉화.동양.두동(띠디물)

홍우정(洪宇定, 1596~1654)

정면 전경

원경

오른쪽 담장

뒷면정면 안쪽

정면 오른쪽 사경

정면 왼쪽 사경

왼쪽에서 본 정면

유허비 비석

유허비 비각 지붕

옥류암

옥류암(玉留菴)

개인과 사회의 청렴을 뜻하는 옥류암

옥류암은 옥 같은 깨끗함이 머물러 사는 초당이라는 의미로, 벼슬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사는 정신의 고결함을 자찬하고 있는 이름이다.

때는 병자호란 시기로 홍우정의 은거에는 오랑캐인 청나라에 항복하여 순결함을 잃은 조선에 대한 설움이 담겨져 있다.

숭정 연호를 썼던 명나라 의종의 시대가 이자성의 반란으로 의종이 자결하여 끝나는 것이 1644년이니,

이 때 이후 홍우정의 만년은 숭정처사로서의 의리를 담은 은거의 세월이라고 하겠다.

옥류암이라는 정자의 이름에는 이 두 가지 의리지킴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담겨져 있는 것이다.

박쥐의 세상이 된 정자

오늘날 우리가 비어 있는 정자 건물을 방문했을 때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은 벌과 박쥐이다.

벌은 충분히 그럴만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박쥐는 예외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삶터 주변에서는 박쥐를 만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옥류암의 박쥐는 한두 마리가 아니라 떼였다.

마룻바닥에는 박쥐 똥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고,

마루 천정의 그늘진 구석에는 거꾸로 매달려 무리를 이룬 박쥐들이 입을 벌리고 있기도 하고,

눈을 부라리고 있기도 하고,

날개 속에 머리를 감추고 있기도 하였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모습들이 아닐 수 없었다.

종가의 오른편으로는 작은 정자 옥류암이 종가가 올라앉은 대좌의 높이만큼 낮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고, 두 건물 사이,

그러니까 종가의 오른편 옆구리 쪽이고 동시에 정자의 왼편 허리 부분에는 샘이 하나 숨겨져 있다.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한다.
샘은 사각의 돌확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는 조금 공간을 두고 여러 층으로 석축을 쌓아올렸으며, 그 위는 흙을 덮었다.

위쪽의 높이는 종가의 대좌의 높이 정도이고, 아래쪽의 높이는 정자가 있는 평면의 높이라고 하겠다.

돌확으로 이루어진 위쪽을 덮은 첫 번째의 두터운 판석 위에는 ‘옥류천(玉留泉)’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옥류암이라는 정자 이름과 짝을 이루는 샘의 이름이다.
옥류천의 물을 담고 있는 사각의 돌확은 앞쪽 중간 부분에 좀 낮은 홈이 파여 있다.

그 곳으로 물이 흘러내리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 앞으로는 종으로 길쭉한 사각형의 돌확이 이어지고, 거기에도 앞으로 홈이 보인다.

이 길쭉한 돌확은 돌로 양 옆을 막은 도수로를 거느리고 있다.

도수로는 남쪽으로 직진한다.
도수로 좌우에는 사각의 연못들이 셋 만들어져 있다.

오른편, 그러니까 새로 지은 종가 쪽으로는 작은 사각의 연못이 있다.

그것과 비슷한 위치의 도수로 반대편, 그러니까 정자의 앞쪽으로는 중간 규모의 사각형 연못이 있다.

첫 번째의 작은 사각형 연못 아래쪽으로는 동쪽으로 길게 뻗은 또 하나의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긴 연못은 사각형 구조이기는 하나 그 동쪽 끝이 반달 모양으로 오므라져 있다.
이 3개의 방당(方塘 : 네모진 연못)은 제대로의 모습을 잃고 있다.

물도 거의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본래는 연못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의 뒤울을 구성하는 산은 평지에 조금 두둑하게 솟은 언덕과 같은 모양이다.

종가 쪽의 뒷산이 조금 더 높다.
정자 영역은 정자와 종가만 있는 빈 골짜기이다.

폭이 좁기는 하지만 낮은 산 속에 파묻힌 하나의 조용하고 아늑한 세상이 거기에 있다.

퇴계 선생의 열가지 교훈이 새겨진 돌의 자리, 동양리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는 봉화와 법전 사이의 36번 도로를 끼고 있다.

동양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 이 도로의 봉화 쪽으로는 유곡리가 자리 잡고 있고, 법전 쪽으로는 창평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36번 도로는 동서 방향으로 뻗은 분지를 가르며 나아간다.

동양리는 그 북쪽 산록 속으로 파고들어가 자리 잡고 있다.
36번 도로변으로는 동양리에서 가장 큰 동네인 용머리(용두)가 위치한다.

용두산을 끼고 있다고 하여 용머리 고을로 불린다.

동양초등학교가 여기에 있으며, 50 내지 60여 호의 집들이 모여 서 있다.

용머리 고을 서쪽으로는 신기리(새마)가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해서 신기리인데, 가구 수는 많지 않다.

이곳은 창평천과 금봉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여기서 합류된 시내는 유곡 쪽으로 흘러내려 내성천으로 나아간다.
신기리 앞에는 창평천을 넘는 신기교가 가설되어 있다.

신기교와 동양초등학교 사이에서 북쪽으로 뻗은 길은 동양리를 관통한다.

이 길은 북쪽으로 직진하면 금봉 쪽으로 나가고, 중간에서 동쪽으로 향해 가면 동양리를 횡단하여 창평마을 북쪽으로 돌아든다.

이 길의 초입부분에는 와란고을이 있다.

와란고을은 와단, 또는 본리라고도 불리는데, 진성이씨 마을이다.

옛날에는 여기에 조인벽, 조정의 유덕을 기리는 동명서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되지 않았다.
와란고을 앞에서 포장도로는 반절씩 둘로 갈라져 사이에 솔숲을 두고 있다. 잘 가꾸어진 솔숲인데, 여기에는 진성이씨 가문에서 큰 돌에 새겨놓은 큰 비가 있다.

이 비는 아래쪽으로는 사각의 석재 위에 ‘경(敬)’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고,

그 위에 큰 고구마 같이 생긴 돌을 옆으로 걸쳐 놓아 그 전면에 ‘퇴계선생수신십훈(退溪先生修身十訓)’을 새겼다.

다음은 십훈의 내용이다.
“1)스스로 성현이 되겠다고 뜻을 세워라.

2)모든 예절을 한 몸에 갖추도록 경건하여라.

3)맑고 밝으며 절제되고 고요한 마음이 되게 힘써라.

4)도리를 깊이 캐기에 힘쓰며 글을 읽어라.

5)자세하면서도 간결하게 도리에 맞게 말하여라.

6)반듯하고 엄숙하게 행동하여 길을 지켜라.

7)효도하고 우애하여 윤리를 바로잡아라.

8)충직하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랑하여라.

9)옳은 도리를 판단함에 깊고 밝아라.

10)성공 실패의 생각에 끌려가지 마라.”
와란마을을 지나 동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동북쪽 산기슭으로 파고드는 또 다른 길이 열린다.

이 길의 끝은 두동, 또는 후곡이다.

뒤가 막혀 있다고 해서 두동인데,

여기는 두곡 홍우정이 병자호란 때 피난해 와서 마을을 연 곳이다.

이 마을의 동쪽 산기슭 속에는 옥류암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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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암에대한설명..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산수유길 202-80번지 띠띠미 마을의 두곡종택 왼편에 있으며 홍우정(洪宇定)선생이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대왕 이 삼전도에서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자 척화의 뜻을 품고 서울을 떠나 태백산령 문수산(文殊山)아래에 낙향, 은거할 때 세운 정자로서 2007년 12월31일 경북문화재자료 531호로 지정되었다.
옥류(玉溜)는 옥같이 맑은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흐른다는 뜻으로 정자
와 종택사이에 작은 우물이 있어 맑은물이 사시사철 흘러 정자와 종택
앞의 3개의 연못에 물을 채우고 있다.

정자는 1637년에 건립하여 1756년에 와가(瓦家)로 중건한 후 미수허목
(眉叟 許穆)의 전액(篆額) 현판과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기문을 걸었다고 하며 1876년에 다시 중수 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며 정자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전면 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으며,

정자의 우측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종택을 2006년에 중건하였다.

옥류암은 건축적 특성과 아울러 전면에 조성한 3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시문(詩文)에 연과 구기자,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심은 기록 등은 조선시대 정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태백오현으로 추앙받는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교류하였던 역사적 장소
성 으로서의 가치가 있어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홍우정(洪宇定:1593년(선조 29)~1654년(효종 5)선생의

본관은 남양 (南陽),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이다.

할아버지는 선조 때 홍주 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 뒤의 어수선한 틈을 타고 충청도에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원부원군(寧原府院君)에 봉해진 홍가신(洪可臣) 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하고 사후 이조 판서에 추증된

홍영(洪榮)이고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양천허씨 허성
(許筬)의 딸이다.
외할아버지인 허성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여류문인인 허난설헌
(許蘭雪軒)의 오빠이며,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형이다.
홍우정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었는데 해주관찰사 최기(崔沂)가 홍우정이 지은 시를 보고는 그 재주에 반하여 딸과 혼인케 했는데,

홍우정보다 18년을 더 살았으며,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장남부터 차례로

홍극(洪克)·

홍윤(洪允)·

홍빙(洪凭)·

홍연(洪兖)이고,

두 딸은 임진교(林震喬)와

유명세(兪命世)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홍우정은 1616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장인인 최기(崔沂)가 해주옥사의 역적 괴수로 몰려 처형 되고 이에 연루되었을때 평소 홍우정의 이름을 듣고 문하에 두고자 하였던 이이첨(李爾瞻)이 사람을 보내 회유하였으나 살고 죽는 것은 명(命)이니 도를 굽혀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노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원평부원군 원두표(元斗杓)와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이해(李澥) 등의 도움으로 천안에 유배되는 것에 그칠 수 있었다.

8년 간의 유배생활 끝에 인조반정으로 풀려난 후 종실대신(宗室大臣)의 천거로 대군사(大君師 : 왕자의 스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부친상을 치르고 복을 벗은 후 유일(遺逸: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1년에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33년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을 때에는 잠시 나가 사은한 후에 돌아왔다. 1636년 봄에 호란이 발발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영남으로 피난하였다가 1637년 남한산성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북쪽으로 돌아갈 뜻을 버리고 앉을 때에도 북쪽을 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봉화현 문수산(奉化縣文殊山) 아래 두곡천(杜谷泉) 위에 옥류(玉溜)라고 이름붙인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으며 두곡(杜谷)이라 자호하였다.

1648년에 공조좌랑(工曹佐郞)과 봉화현감(奉化縣監)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였고 1652년에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에 제수되자 사은 숙배하고 돌아왔다. 1656년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명이 내려오기 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묘갈명은 미수 허목,

묘지명은 갈암 이현일이,

전(傳)은 눌은 이광정,

행장은 대산 이상정,

구봉사 봉안문은 옥천 조덕린,

문산서원 봉안문은 소산 이광정이 각각 지었는데

이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던 대정치가요 명유(名儒)였다.
사후인 영조 22년 이조판서 원경하(元景夏)가 경연에서 선생의 절의를 아뢰자 영조는 칭찬하며 곧바로 추증을 명했다.

그 결과 이조참의로 추증되고 국왕이 직접 숭정처사(崇禎處士)라는 칭호를 내렸다.
두곡을 기리는 숭정처사유허비는 1748년(영조24) 사림(士林)의 뜻을 모아 마을에 세워졌다.
비의 전면에는 사론(士論)에 따라 “대명천하무가객(大明天下無家客) 태백산중유발승(太白山中有髮僧)”이라는 선생의 시 귀절을 좌우면에 새겨 놓았다.

명나라 천하에 집이 없는 나그네가 되어 태백산 속에 스님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다.
유허비각(遺虛碑閣) 앞에 1786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홍우정(洪宇定)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구봉사(九峰祠)를 창건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여 오던중 1816년(순조16)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이듬해
에 개절(介節:굳은 절개)란 시호까지 받았다.
1824년 구봉사를 문산서원(文山書院)으로 승격시켜 선현배향과 지방교
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 된 뒤 복원하지 못한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집으로는 두곡선생집(杜谷先生集)이 있는데 본집 5권과 속집 2권
으로 되어 있다.
본집의 구성은 권1에서 권3까지는 시이고, 권4는 시와 부(賦)·서
(書)·잡저(雜著)이며, 권5는 제문·묘갈명·묘지명·행장 등으로 이루어진 부록이다.

속집의 경우는 권1은 시와 서(書)이고, 권2는 부록이다.
*태백오현으로 칭송되는이는

참판 강징의 현손(玄孫)인 잠은(潛隱) 강흡(姜恰:1602~1671),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1594~1660),

송강 정철의 손자인

포옹(抱翁) 정양 (鄭瀁:1600~1668),

영의정 인재 홍섬의 증손인

손우당(遜愚堂) 홍석 (洪錫:1604~1680),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인

두곡(杜谷) 홍우정 (洪宇定 :1595~1654)으로

잠은.은 버쟁이(법전)에 은거했으며

각금당은 모래골(법전)에,

포옹은 도심촌(춘양)에,

손우당은 소로리(춘양)에,

두곡은 띠띠물(봉성)에 은거 하였는데 그들이 은거 하던 곳의 거리는 서로 10리에서 30리 안 밖이었다.
옥류암 현판은 미수 허목의 글씨로 가로120cm, 세로 60cm나 되는 대작으로 도난당했다가 회수한후 지금은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