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桐溪) 정온이 59세 때인 1627년에 새로 임명된 대사간(大司諫) 벼슬을 사양하기 위해 올린 상소의 일부분이다.
대사간은 임금에게 직언을 진달하는 기능을 지닌 사간원(司諫院)의 수장으로, 요직이었다. 이처럼 높은 벼슬을 사양하는 글은 관행적인 것이 많았다. 보통 노부모의 봉양, 나이, 건강상의 문제 등을 이유로 대기는 하지만, 실상은 으레 두세 번쯤 사양하는 ‘예사(例辭)’가 대부분이었다.
동계의 이 상소는 그런 유의 글은 아니다. 임금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벼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증자(曾子)와 같은 인격자도 몇 차례 와전된 소문으로 인해 어머니의 신뢰를 잃을 정도였으니, 임금의 일시적인 총애를 믿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이런 우려는 스승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과의 관계로 인해 씌워진 낙인 때문이었다. 한 때 영창대군(永昌大君) 처형과 관련하여 스승에게 반기를 들기는 했지만,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실각하여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된 내암을 위해 적극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동계는 평생 스승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언관(言官)들이 그의 결점을 공격할 때는 늘 역적의 제자라는 것을 거론하였고, 급기야 이 상소를 올리기 바로 전 해에는 응교 김시양(金時讓)이 심하게 모욕적인 언사를 동원하여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심지어 권신(權臣)이었던 이이첨(李爾瞻)과 뜻을 함께 했다고 하는 무고한 내용까지 있었다.
동계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정인홍(鄭仁弘)으로 이어지는 학파의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이루어진 청(淸)나라와의 화의(和議)에 반대하여 자결(自決)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매사에 과단성이 있었던 그였지만, 역적의 제자라는 굴레는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맞아 훌륭한 정치를 이루어 내는 경우를 두고, ‘풍운제회(風雲際會)’, 또는 ‘제회(際會)’라고 한다.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는 『주역(周易)』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임금과 신하의 아름다운 만남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결과론적이긴 하기만, 역대로 태평성대에는 반드시 ‘제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만남에서 가장 돋보이는 덕목은 의외로 신하의 충성심이나 재주가 아니라, 신하에 대한 임금의 굳건한 믿음과 격려, 예우이다. 충성스럽고 재주 있는 신하는 어느 시대고 많이 있었지만, 신하를 제대로 예우하고, 변함없이 믿어주는 임금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추진할 때는 임금의 믿음과 결단이 필수적이다.
"의심스런 사람은 쓰지를 말고, 이왕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 用人勿疑]"라고 하였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실려있을 정도로 익숙한 말이니, 임금들이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권력의 환심을 사기 위한 신하들의 끊임없는 흔들기에 중급 이하의 자질을 지닌 임금들이라면 결국 넘어가고 말 것이다.
아래 고사는 중대사의 성공에 있어서 임금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보여 준다. 신하 노릇하는 자, 부하 노릇하는 자가 이런 임금, 이런 상사를 만났다면,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행운이 아닐까 싶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 악양(樂羊)이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러 떠나 3년 만에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였다. 자식까지 희생시켜가며 세운 공이 있는지라 의기양양해 하며 그 임금 문후(文侯)를 뵈었는데, 문후는 말없이 두 개의 상자를 가져오게 하여 그에게 내밀었다. 열어보니, 그 속에는 악양 자신을 비방하고, 중산국 정벌을 반대하는 상소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악양은 태도를 바꾸고 임금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이번의 개가는 신의 공이 아닙니다. 주군(主君)께서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