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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큰일을이루려면...믿고맡겨라!!

어풍대08 2013. 2. 25. 23:01
큰일을 이루려면 끝까지 믿고 맡겨라
어떤 큰일이 성사되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사람을 추어올리기 마련이다. 그 일을 추진한 사람 역시 자신의 공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 있다. 그 사람을 전적으로 믿어주고 지원해 준 윗사람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물을 살피고, 산을 살피는 것만큼이나 공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신은 말하는 것이 경솔하고 일 처리가 어긋나서, 한 번씩 나고 들 때마다 걸핏하면 비방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전후로 낭패를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만약 전하께서 곡진하게 보살펴 주신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신이 어찌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들으니, 물거품도 많으면 산을 떠내려 보낼 수 있고, 비방도 쌓이면 뼈를 녹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증삼(曾參)과 같은 아들을 두고도 오히려 와전된 말이 세 번째 들리자, 그 어미는 베틀의 북[杼]을 던지고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 하물며 전하께서 신을 신뢰하는 것이 증삼의 어미와 같지 못하고, 신료들이 사사건건 생트집을 잡는 것이 세 번 정도에 그칠 뿐만이 아니니, 아무리 전하께서 아끼고 보살펴 주신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소신의 나이가 이미 육순(六旬)에 이르렀습니다.

노쇠한 몸은 그저 땅속에 묻힐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쩌자고 감히 호랑이 꼬리를 밟고도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것처럼 수치를 무릅쓰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구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입니다.

* 증삼(曾參)과……없었는데 : 잦은 참소는 아무리 굳건한 믿음도 허물게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고사이다.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삼은 유가(儒家)에서는 증자(曾子)라고 하여 성인(聖人)에 준하여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어느 날 동명(同名)의 인물이 살인사건을 저질렀는데, 그가 범인인 것으로 와전되어 소문이 전해졌는데, 처음에는 믿지 않고 태연하게 베틀을 짜던 그의 어머니는 세 번째 소식이 들려오자 그 소문을 사실로 믿고 두려워 베틀 북을 내던지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臣發言輕率, 處事顚錯, 一出一入, 動輒得謗, 前後跋疐, 不一而足。倘微殿下曲全之恩, 臣安得保有今日乎? 臣聞衆漚漂山, 積毀銷骨, 有子如曾參, 尙不能不投杼於三至之餘, 況殿下之信臣, 不如曾參之母, 隨事吹毛, 不止三至, 雖以殿下之眷顧, 安能保其終始無撓乎? 臣犬馬之齒, 已至六旬, 衰朽之質, 只待入地之日, 何敢冒恥干進, 履虎尾而不愬愬乎? 此臣之難進者二也。

- 정온(鄭蘊, 1569~1641), 「사대사간소(辭大司諫疏)」,『동계선생문집(桐溪先生文集)』 권3

▶ 문간공 동계 정온 선생 가옥. 경남 거창군 위천면 소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

동계(桐溪) 정온이 59세 때인 1627년에 새로 임명된 대사간(大司諫) 벼슬을 사양하기 위해 올린 상소의 일부분이다.

대사간은 임금에게 직언을 진달하는 기능을 지닌 사간원(司諫院)의 수장으로, 요직이었다.

이처럼 높은 벼슬을 사양하는 글은 관행적인 것이 많았다.

보통 노부모의 봉양, 나이, 건강상의 문제 등을 이유로 대기는 하지만, 실상은 으레 두세 번쯤 사양하는 ‘예사(例辭)’가 대부분이었다.

동계의 이 상소는 그런 유의 글은 아니다.

임금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벼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증자(曾子)와 같은 인격자도 몇 차례 와전된 소문으로 인해 어머니의 신뢰를 잃을 정도였으니,

임금의 일시적인 총애를 믿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이런 우려는 스승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과의 관계로 인해 씌워진 낙인 때문이었다.

한 때 영창대군(永昌大君) 처형과 관련하여 스승에게 반기를 들기는 했지만,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실각하여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된 내암을 위해 적극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동계는 평생 스승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언관(言官)들이 그의 결점을 공격할 때는 늘 역적의 제자라는 것을 거론하였고, 급기야 이 상소를 올리기 바로 전 해에는 응교 김시양(金時讓)이 심하게 모욕적인 언사를 동원하여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심지어 권신(權臣)이었던 이이첨(李爾瞻)과 뜻을 함께 했다고 하는 무고한 내용까지 있었다.

동계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정인홍(鄭仁弘)으로 이어지는 학파의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이루어진 청(淸)나라와의 화의(和議)에 반대하여 자결(自決)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매사에 과단성이 있었던 그였지만, 역적의 제자라는 굴레는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맞아 훌륭한 정치를 이루어 내는 경우를 두고, ‘풍운제회(風雲際會)’, 또는 ‘제회(際會)’라고 한다.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는 『주역(周易)』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임금과 신하의 아름다운 만남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결과론적이긴 하기만, 역대로 태평성대에는 반드시 ‘제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만남에서 가장 돋보이는 덕목은 의외로 신하의 충성심이나 재주가 아니라, 신하에 대한 임금의 굳건한 믿음과 격려, 예우이다.

충성스럽고 재주 있는 신하는 어느 시대고 많이 있었지만, 신하를 제대로 예우하고, 변함없이 믿어주는 임금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추진할 때는 임금의 믿음과 결단이 필수적이다.

"의심스런 사람은 쓰지를 말고, 이왕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 用人勿疑]"라고 하였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실려있을 정도로 익숙한 말이니, 임금들이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권력의 환심을 사기 위한 신하들의 끊임없는 흔들기에 중급 이하의 자질을 지닌 임금들이라면 결국 넘어가고 말 것이다.

아래 고사는 중대사의 성공에 있어서 임금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보여 준다.

신하 노릇하는 자,

부하 노릇하는 자가 이런 임금, 이런 상사를 만났다면,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행운이 아닐까 싶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 악양(樂羊)이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러 떠나 3년 만에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였다.

자식까지 희생시켜가며 세운 공이 있는지라 의기양양해 하며 그 임금 문후(文侯)를 뵈었는데, 문후는 말없이 두 개의 상자를 가져오게 하여 그에게 내밀었다.

열어보니, 그 속에는 악양 자신을 비방하고, 중산국 정벌을 반대하는 상소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악양은 태도를 바꾸고 임금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이번의 개가는 신의 공이 아닙니다. 주군(主君)께서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권경열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주요역서
      - 국역 갈암집공역,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국역 오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