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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루(聞韶樓)

어풍대08 2013. 2. 24. 18:17

문소루(聞韶樓)

문소루에서본풍경

문소루 안내판

누정 이야기
- 천년고읍의 명승지

문소루는 옛날 의성의 공관으로 고려시대의 김지대(金之岱), 정몽주(鄭夢周) 등은 물론 조선시대의 많은 학자와 문인들의 입을 통해 천년고읍의 명승지로 추앙 받은 곳이다.

문소루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영남의 4대루로 일컬어진다.

문소루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후기 문신인 김지대(金之岱)의 시에서 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은 문소루의 창건 시기를 최고(最古) 신라시대로 짐작하고 있어, 영남의 4대루 가운데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소루의 창건 당시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중건기들을 통해 보면 관아의 서북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의성군지(義城郡誌)?에서는 현재 의성경찰서 뒤편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중건할 때에는 구봉산의 마지막 봉우리로 자리를 잡았다.

문소루의 이름은 의성의 옛 이름인 ‘문소(聞韶)’를 딴 것이다.

문소의 의미에 대해서는 마지막 중건 당시 김희윤(金熙潤) 군수의 중건기에 ‘옛날에 공자(孔子)가 그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다스리는 무성(武城) 고을을 지나다가 현송(絃誦) 소리를 듣고, 기뻐서 칭찬하시었다 하니,

군명(郡名)이 문소이며, 누명(樓名)이 문소인지라 앞으로

이 고을에 어찌 현송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오.’라고 한데서 잘 나타나 있다.

관련인물
- 김지대(金之岱; 1190~1266)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이다.

1217년(고종 4) 3만 명의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하였다.

1258년 몽골군이 북변을 침벌하자 추밀원첨서사(樞密院簽書事)로 승진되어 서북지방에 출진하여 서북 40여 성이 안정되었다

.1260년(원종 1) 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 1261년 추밀원지사·지공거(知貢擧)를 지냈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로 올려 치사(致仕)하게 하고 오산군(鰲山君: 鰲山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에 봉하였다.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김지대는 문소루에 대해 시를 지은 사람 가운데 가장 최고(最古)의 인물이다.

황응일(黃應一; 1655~?)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여영(汝濚), 황석(黃錫)의 아들이다.

1689년(숙종 15) 생원이 되었다.

서흥현감(瑞興縣監), 황주진관(黃州鎭管),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등을 지냈다.

1694년(숙종 20)년 의성현령을 지낼 때 화재로 불탄 문소루를 창건하였다.

김홍근(金弘根; 1788~1842)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의경(毅卿), 호는 춘산(春山)이며,

김명순(金明淳)의 아들이다.

1825년(순조 25) 의성현령이었을 때 문소루를 중건하였다.

1829년(순조 29) 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가 되고,

1831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여러 관직을 거쳐 1841년 좌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주변경관
- 문소루 이야기

의성의 옛 공관인 문소루는 원래 현재의 자리가 아닌 후죽리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긴 세월 동안 훼손되기도 하고, 전란으로 불타기도 하여,

최근에 이 자리로 옮겨 옛 모습에 대해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문소루를 최초로 노래한 김지대의 시를 통해 그 모습을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소의 공관 깊숙한 후원에, 聞韶公館後園深
백 척의 높다란 누각이 있네. 中有危樓高百尺
향기로운 바람 십 리 주렴이 걷히고, 香風十里捲珠簾
밝은 달빛에 한 줄기 피리소리 들리네. 明月一聲飛玉笛
가벼운 연기 버들 그림자 가늘게 이어졌고, 煙輕柳影細相連
비 갠 뒤 산 빛 짙어 듣는 듯하네. 雨霽山光濃欲滴
오랑캐 무찌르던 최고의 무사가, 龍荒折臂甲枝郞
난간에 기대면서 더욱 조심하네. 仍按憑欄尤可怕

김지대의 시를 살펴보면,

공관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세상의 소음과 단절된 듯하며,

향기로운 바람이 불고,

밝은 달빛에 어우러지는 피리소리 한 가닥을 느끼고 있자면,

마치 신선세계에 들어 온 듯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오랑캐를 무찌르던 용맹한 자신 역시 누대에 올라가면 그 높이에 위압감을 느껴 조심스러워진다고 표현하여,

문소루의 분위기와 위상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 경상도 관찰사로 이곳을 순시하다가

누대에 오른 이문화(李文和) 역시 시를 남겨 문소루의 풍취를 표현하고 있다.

문소의 산과 물 깨끗하고 시원한데, 聞韶山水瀟灑
고요한 밤 성긴 주렴에 달빛 비끼네. 夜精簾疎月斜
객사에는 버들 빛 푸르디 푸르고, 柳色靑靑客舍
절간의 향기 연기 아련히 풍기네. 香煙冉冉僧家

시의 앞부분에서 문소의 자연 풍광과, 문소루가 있는 객사를 소개하였다.

현재 문소루는 남대천을 앞에 두르고 의성읍내를 시원하게 내려다보는 구봉산 마지막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봉우리는 바위산이 나무들로 단장하여,

가파른 절벽을 풍성하게 단장하고 있다.

문소루 아래에는 또한 남대천을 앞에 두른 절이 있는데,

우연처럼 이문화가 느꼈던 향기로운 연기가 불어오는 듯하다.
문소루가 발을 내린 구봉산(九峰山)은 원래 구성산(九城山)이라고 불리다가 일제시대 동리 명칭이 바뀔 때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 산은 해발 211m로 옛날부터 의성읍성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전설(傳設)에는 원래 이 봉우리가 하나뿐인 긴 산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남대천(南大川)에서 아리따운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을 때 냇물 가운데 비친 산봉우리가 뱀처럼 꾸물꾸물 움직여 기어가는걸 보고 놀라서 소리치면서 바라보았다.

그런데 꿈틀 거리던 봉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뱀의 움직이는 등 같이 봉우리가 아홉 개[九峰] 생겼다고 전해온다.

구봉산의 가장 높은 첫 봉우리에는 ‘순임금의 음악을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簫韶九成, 鳳凰來儀]’에서

이름을 따온 봉의정(鳳儀亭)이 있다.

이 정각 역시 문소루와 함께 의성읍의 어디에서나 바라볼 수 있다.

또 제3 봉우리 아래에는 효자 오천송(吳千松)이 지은 소원정(溯源亭)도 있으니, 구봉산이 품고 있는 정취를 짐작해볼 수 있다.

고을 원님이 머물던 집이 있었다는 뜻에서 원당(員堂)

의성읍의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원당리(元堂里)는 조선 시대 역촌(驛村)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고을 원님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수가 좋아 자주 쉬어 갔는데 고을 원님이 머물던 집이 있었다는 뜻에서 원당(員堂)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데, <경북마을지>에서는 현재 표기하는 원(元)자는 와전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원당리는 5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국도의 동편이 원당 1리이고,

서편이 원당 2리이며, 신의성교가 놓인 곳이 원당 3리이다.

각 마을마다 이름을 갖고 있는데, 1리는 앞산이 가려 져서 일조 시간이 짧다고 해서 음지(陰地) 또는 음원(陰元)이라고 부른다.

1리는 700여 년 전 성주배씨 두형제가 개척하였다고 하니, 원당리 가운데 역사가 가장 깊은 곳이다.

원당 2리는 600여 년 전 의성 김씨 2형제가 개척한 곳인데,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양지(陽地) 또는 양원(陽元)이라고 부른다.
1, 2리에 비해 역사가 정확하지 않은 3리는 마을 앞 도로를 따라 다리[橋]가 있는 마을[洞]이라고 하여 교동[橋洞]이라고 부른다.

한편, 마을 뒷산이 풍수지리적설에 의하면 금차형(金釵形)에 옥소안(玉梳案)인데, 금비녀와 옥빗을 뜻하는데, 금비녀에 옥달빗이라고 하여 달빗골이라고 하였고, 오랜 세월 동안 음이 바뀌어서 다릿골, 교동(橋洞)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어떤 불효자가 늙은 아비를 지게에 지고 깊은 골짜기에 버리고 왔는데, 어린 아들이 지게를 받아서 감나무에 동여매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어보니, “이 지게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아버지가 늙으시면 제가 아버지를 지고 가서 버려야 될게 아닙니까?”라고 하여, 이 말에 감동한 아버지가 다시 늙은 아버지를 되 지고 왔다고 하여, 되짓골 또는 뒤지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곳에 고려시대부터 문인과 학자, 관료들에게 칭송을 받았던 문소루가 1983년 중건되었고,

문소루의 동남쪽 언덕에 13명의 의성현령에 대한 공덕비들이 모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