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루(聞韶樓)
누정 이야기 | ||||
- 천년고읍의 명승지 | ||||
문소루는 옛날 의성의 공관으로 고려시대의 김지대(金之岱), 정몽주(鄭夢周) 등은 물론 조선시대의 많은 학자와 문인들의 입을 통해 천년고읍의 명승지로 추앙 받은 곳이다. 문소루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영남의 4대루로 일컬어진다. 문소루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후기 문신인 김지대(金之岱)의 시에서 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은 문소루의 창건 시기를 최고(最古) 신라시대로 짐작하고 있어, 영남의 4대루 가운데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의성군지(義城郡誌)?에서는 현재 의성경찰서 뒤편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중건할 때에는 구봉산의 마지막 봉우리로 자리를 잡았다. 문소루의 이름은 의성의 옛 이름인 ‘문소(聞韶)’를 딴 것이다. 문소의 의미에 대해서는 마지막 중건 당시 김희윤(金熙潤) 군수의 중건기에 ‘옛날에 공자(孔子)가 그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다스리는 무성(武城) 고을을 지나다가 현송(絃誦) 소리를 듣고, 기뻐서 칭찬하시었다 하니, 군명(郡名)이 문소이며, 누명(樓名)이 문소인지라 앞으로 이 고을에 어찌 현송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오.’라고 한데서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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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응일(黃應一; 1655~?) | ||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여영(汝濚), 황석(黃錫)의 아들이다. 1689년(숙종 15) 생원이 되었다. 서흥현감(瑞興縣監), 황주진관(黃州鎭管),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등을 지냈다. 1694년(숙종 20)년 의성현령을 지낼 때 화재로 불탄 문소루를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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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경관 | ||
- 문소루 이야기 | ||
의성의 옛 공관인 문소루는 원래 현재의 자리가 아닌 후죽리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긴 세월 동안 훼손되기도 하고, 전란으로 불타기도 하여, 최근에 이 자리로 옮겨 옛 모습에 대해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문소루를 최초로 노래한 김지대의 시를 통해 그 모습을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공관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세상의 소음과 단절된 듯하며, 향기로운 바람이 불고, 밝은 달빛에 어우러지는 피리소리 한 가닥을 느끼고 있자면, 마치 신선세계에 들어 온 듯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오랑캐를 무찌르던 용맹한 자신 역시 누대에 올라가면 그 높이에 위압감을 느껴 조심스러워진다고 표현하여, 문소루의 분위기와 위상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누대에 오른 이문화(李文和) 역시 시를 남겨 문소루의 풍취를 표현하고 있다. 현재 문소루는 남대천을 앞에 두르고 의성읍내를 시원하게 내려다보는 구봉산 마지막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봉우리는 바위산이 나무들로 단장하여, 가파른 절벽을 풍성하게 단장하고 있다. 문소루 아래에는 또한 남대천을 앞에 두른 절이 있는데, 우연처럼 이문화가 느꼈던 향기로운 연기가 불어오는 듯하다. 이 산은 해발 211m로 옛날부터 의성읍성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전설(傳設)에는 원래 이 봉우리가 하나뿐인 긴 산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남대천(南大川)에서 아리따운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을 때 냇물 가운데 비친 산봉우리가 뱀처럼 꾸물꾸물 움직여 기어가는걸 보고 놀라서 소리치면서 바라보았다. 그런데 꿈틀 거리던 봉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뱀의 움직이는 등 같이 봉우리가 아홉 개[九峰] 생겼다고 전해온다. 구봉산의 가장 높은 첫 봉우리에는 ‘순임금의 음악을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簫韶九成, 鳳凰來儀]’에서 이름을 따온 봉의정(鳳儀亭)이 있다. 이 정각 역시 문소루와 함께 의성읍의 어디에서나 바라볼 수 있다. 또 제3 봉우리 아래에는 효자 오천송(吳千松)이 지은 소원정(溯源亭)도 있으니, 구봉산이 품고 있는 정취를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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