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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이씨농암종택과긍구당..

어풍대08 2013. 2. 14. 19:21

영천이씨농암종택.

안내판과 긍구당

긍구당..

긍구당 정면

긍구당 왼쪽 정면

긍구당 뒷 모습

농암종택 원경

산자락에 위치한 농암종택

종택 마당에서 본 긍구당

새로 난 종택 입구 도로와 종택

문중 이야기.

옥정동의 영천이씨 종가를 방문하였을 때,

용헌 이용구 선생의 죽음은 아직 마무리 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건넛방에 마련된 지청에 조상을 하였고, 젊은 종손 이성원은 소복을 입고 우리를 맞았다.

건넌방의 바깥쪽으로 달린 좁은 마루는 동아줄 모양으로 짚을 거칠게 꼬아서 위아래를 둘러치고 자리를 깔아 여막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으며, 한쪽 벽에는 삼베로 지은 상복이 셋 나란히 걸려 있었다.
여막의 바깥 쪽 위, 처마 바로 아래쪽으로는 한지가 횡으로 길게 붙여져 있었는데, 한지에는 자잘한 글씨로 200명이 넘는 사람 이름이 두 줄로 적혀 있었다.
“위에 적힌 이름은 향중 인사들이고, 아래에 적힌 이름은 문중 분들이지요.”
이성원이 말하였다.
그것은 유림장을 하였을 때의 분정판이라 하였다.

2백이 넘는 그 이름들은 안동 유림의 일원으로 평생을 살았던 이용구 선생의 삶이 남기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을 증거 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방 안에는 매화가 하나 꽃을 피우고 있고,

묵매 한 송이가 화폭 위에 퇴색한 자태를 남기고 있다.

이성원의 고조부가 묵매 한 폭을 얻어서 족자로 완성하였고,

그것을 대를 물려 전해 온 것이라 하였다.
매화는 통상 선비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말하여진다.

묵매 한 폭과 매화 분 하나를 친구삼아 평생을 한 가문의 종손으로 살았던 이용구 선생, 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문 쪽에 횡으로 써 있는 글자 한 폭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분수에 만족하면 치욕을 당할 것이 없고
경계할 줄을 안다면 마음은 스스로 여유롭다.
비록 티끌 날리는 세상에 살지라도
이것이 도리어 인간 밖 세상이라.”

그런 탈속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20세기를 관통하며 살아갔던 한 사람!

그 사람은 이제 타계하고 옥정동에는 그 죽음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옥정동 영천이씨 종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후대의 삶 속에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함인가!

대문에는 여전히 두 사람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다.

이용구라는 문패는 위에,

이성원이라는 문패는 아래에.

종가의 삶을 상속받아 종손으로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힘들고 괴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듯, 종손을 찾아드는 모든 이들을 환영한다는 듯, 『논어』의 첫머리에서 따온 ‘또한 즐겁지 않는가’라는 뜻의 글귀 둘(‘불역락호’와 ‘불역열호’)이 대문에 붙어서 들고 나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농암선생문집(聾巖先生文集)
건곤의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詩), 부(賦), 서(書), 소(疏), 전(箋), 계사(啓辭) 등이 수록되어 있다.
- 농암유고초(聾巖遺稿草)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문집으로 여기에는 그의 시와 주고받은 시, 그리고 편지 등이 적혀 있다.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 분강어부가(汾江魚父歌)
9장으로 된 어부가와 5장으로 된 어부단가가 수록되어 있다. 이 두 노래는 모두 국한문이 혼용되어 기록되어 있고, 이 노래를 적은 뒤에 이에 대한 해설과 평이 기록되어 있다.



-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은대는 조선시대 왕명 출납을 맡은 일종의 비서기관인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이다.
- 농암종택 관례홀기(冠禮笏記)
이「관례홀기(冠禮笏記)」는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의 자격을 인정받는 성년의례로서 관례의 절차를 적은 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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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양로연도(花山養老燕圖)
이현보가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중종 14년(1519) 가을 안동의 80세 이상 노인들을 관아로 초청하여 성대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이 그림은 그 날의 연회장면을 그린 것이다.
- 농암 이현보 영정(李賢輔 影幀)
이 초상화는 대구 동화사(東華寺)의 화승(畵僧)인 옥준상인(玉俊上人)이 그린 것을 중인(中人) 화가인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 1783~1873)이 고종9년(1872년) 모사한 것이다.
- 금서대(金犀帶)

서대는 서띠라고도 한다. 무소의 뿔로 만든 장식을 붙였는데, 조복(朝服)·제복(祭服)·공복(公服)·상복(常服)의 백관복에 갖추어 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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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리와 송오리의 이름을 딴 마을

가송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가사리, 송오리, 고리, 광석동 일부, 운천동 일부와 봉화군 하남면의 여을며리 일부를 합한 곳이었다.

가사리와 송오리의 이름을 따서 가송리라 하며,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가송리는 현재 고리재, 소두들, 가사리,

올미재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가송리는 풍수적으로 천옥(天獄)이라 불리 울 만큼 매우 폐쇄적인 지형세를 띄고 있는 마을이다.

청송 주왕산(周王山)과 더불어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일컬어지는 청량산(淸凉山) 줄기가 마을을 에워싸고, 마을 한가운데로 낙동강(洛東江)의 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청량산의 축융봉에서 내려오는 대(臺) 밑에 형성된 가송협(佳松峽)은 안동의 경승 가운데서 산수미(山水美)의 첫째로 꼽을 만하다.
마을은 강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 가사리,

서쪽에 소두들, 그리고 소두들에서 남서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올미재가 있다.

소두들 건너편 가송협의 가사리 쪽에 멋진 소나무를 앞세운 고산정(孤山亭)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가 봉화현감을 내놓은 후 지은 정자인데, 고산주인(孤山主人)으로 자처하며 만년을 보냈다.
고리재는 가송리로 넘나드는 긴 고개 길에 있는 마을로, 30여 호가 살며 일부는 태자리에 속해 있다.

고리재 북쪽에는 불티골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가 많은 것을 과장하려고 그곳 산성에서 흰 찰흙을 파서 시냇물에 풀어 뜨물처럼 흐르게 하자 홍건적이 겁먹고 불티가 날아가듯 빠르게 도망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송협의 서쪽 소두들 마을은 절벽에 부딪쳐서 이루어진 깊은 소(沼)의 언덕 부분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소두들 혹은 송오라고도 한다.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이현보는 자가 비중(棐仲)이고 호가 농암(聾巖)이다.

설빈옹(雪靈翁)이라고도 한다.

그는 1467년에서 1555년 사이를 살았으며, 향년 89세였다.

1498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 검열, 춘추관 기사 등을 거쳤으며,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으로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안동 안기역에 유배되었다.

중종 반정으로 복직하여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고, 동지중추부사로 퇴직하였다.
“이현보는 일찍이 늙은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요청하여 여덟 군현을 다스렸는데 모든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늙어서 부모의 상을 당해 예를 다했고, 상을 마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여러 벼슬을 거쳐서 참판에 이르렀다.

하루 아침에 호연히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말렸으나, 소매를 뿌리치고 하직하고는 배를 타고 자유로이 떠났다.

배 안에는 오직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
이현보는 「어부가(漁父歌)」와 연결되어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어부가」는 이현보의 창작은 아니다.

그러나 이현보의 창작이 아니라고 하여서 이현보와 「어부가」 사이의 상관관계를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흩어져 전해오던 「어부가」들이 이현보에 의해 모아져서 다듬어지고 편제가 완성되어 알려지기 시작함으로써, 문학사적 의미를 갖추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실록』에 나온 이현보 관계 기록이다.
농암 이현보는 정부인 안동권씨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둔다.

그 중 큰 아들은 이석량이고,

둘째 아들은 이문량이다.

- 이현보의 선조

영천이씨 안동 입향조인 이헌은 이대영으로부터 시작되는 세계에 6대로 기재되어 있다.

이헌의 조부는 이문경의 셋째 아들 이송려이고,

아버지는 이일충이며,

안동으로 입향함으로써 소윤공파를 여는 시조가 된다.

『족보』에는 “고려 봉선대부로 군기사 소윤을 지냈으며 영천에서 예안 분천으로 옮겨 와 살았다.

향년은 84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헌은 숙인 선성이씨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3남은 이종실, 이파, 이오이다.
이종실은 이가종과 이가식, 두 아들을 낳았으나 단손되었다.

그러므로 영천이씨 소윤공파의 종계는 그의 아우인 이파의 후손들로 이어져 나갔다.

이파는 문과 출신이며, 선교랑이고 의흥현감을 지냈다.

향년은 76세 였으며, 병조참의를 증직으로 제수받는다.

이파의 아우 이오도 문과 출신이다.
이파는 숙부인을 증직으로 받은 경산전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효손과 이성손이다.

이효손은 1404년 출생해서, 선교랑이며, 통례문 봉례를 지냈다.

1487년에 타계하니, 향년 84세였다.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았다.

정부인을 증직으로 받은 청주 양씨와의 사이에서 이흠, 이균 등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이흠은 자가 경지이며, 1440년 생이다.

중훈대부로 인제현감을 지냈다.

1537년에 타계하니, 향년 98세였다.

의정부 좌참찬을 증직으로 받았다.
이흠은 정부인을 증직으로 받은 안동권씨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현보, 이현우, 이현좌, 이현준이다.

- 이문량(李文樑, 1498~1581)

이문량은 자가 대성(大成)이고, 호가 벽오(碧梧), 또는 녹균(綠筠)이다.

그는 1498년에 태어나서 1581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였다.
『족보』에는 “음평릉 찰방을 지냈고, 퇴계와 가장 친밀하게 교유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문량은 의인 전의이씨와의 사이에서 이원승(李元承, 1518~1572),

이복승,

이전승 등의 아들과 여러 딸을 두었다.

- 농암종택 사람들

현지의 관리자 이성원은 안동댐의 건설 이후로 삶터를 옮겨 2대를 옥정동에서 살아왔다.

이용구 선생도 그러했겠지만, 이성원에게도 분천마을은 떠나온 고향만은 아니다.

옥정동 집의 마루에 옛 분천마을을 채색의 화려한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두게 하였던 것은 이용구 선생일 것이다.

그만큼 이용구 선생에게 있어서는 분천마을을 잊을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