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겸(李濟兼, 1683~1742)의 부친인 이동표(李東標, 1644~1711)는 字가 군칙(君則)이고 호가 나은(懶隱)이며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진성이씨(眞城李氏) 송당공파(松堂公 派) 세보(世譜)에서는 이 계열을 송재 이우에서 시작되어 나은 이동표로 이어진다고 정리하여 주고 있다. 이동표는 이 계열의 진성이씨 세계(世系)에서 그만큼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으로 춘양에 이거하여 살았고 배위는 증 정부인 안동권씨이다. 이동표의 장자는 이회겸(李晦兼, 1677~1724)이다. 字는 명경(明卿)이고, 통덕랑이다. 배위는 공인 안동권씨이다. 이동표의 부친은 이운익(李雲翼, 1612~1664)이다. 字는 자의(子儀), 배위는 순천김씨이다. 이운익의 부친은 이지온(李之馧)인데, 字는 덕성(德盛)으로, 1592년(선조 25)에 출생하였으며, 배위는 영해신씨이다. 이지온의 부친은 이장도(李章道)인데, 字는 비숙(斐淑)으로 1572년(선조 5)에 출생하였고, 배위는 예안김씨이다. 이장도는 이충의 3남이다. 이장도의 백형은 이규도(李揆道)이고, 둘째형은 이일도(李逸道)이다. 이제겸은 이우로부터 이동표에게로, 이동표로부터 이충-이장도 계열로 이어 내려온 진성이씨 일문의 세계를 상속하였다. 이제겸의 字는 선경(善慶), 호는 두릉(杜陵), 본관은 진성이다. 나은 이동표의 2남이다. 1714년(숙종 4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25년(영조 1)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별시과거에 참시관이 되었다. 율봉 찰방에 부임한 이듬해 이인좌의 반란으로 청주병사가 살해되고, 이어서 진천·안성이 습격당하는 등 사태가 위태로워졌다. 이제겸은 역마를 민가에 숨겨두고 율봉에서 백 리쯤 떨어진 중약에 숨어 있었는데, 적당이 율봉을 급습하여 역마를 모조리 약탈해 갔다. 이제겸은 어찌할 수 없어 서울로 올라가다가 도원수 조명항(趙命恒)을 만나 적을 토벌하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난이 평정되고 나서 임지로 돌아갔는데, 적당 중의 1명인 강필선이 “율봉 찰방 이제겸이 역마를 난군에 제공했다. ”는 무고를 하여 죄를 얻게 되었다. 이제겸은 평안도 신천에 유배되었다가 제천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이듬해 나라에 경사가 있어서 풀려났다. 그때부터 이제겸은 노루골에 숨어서 산수를 벗하며 시를 읊고 글씨를 쓰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이제겸은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고, 『상례절(喪禮節)』, 『두릉집(杜陵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창랑정사는 이제겸이 머물러 앉아 공부하던 곳이다. 구가암은 이제겸의 후손들이 그의 묘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제겸의 아들은 이중연(李重延, 1711~1794)이다. 字는 희원(希愿), 호는 누실(陋室)이다. 묘는 소천에 있다. 첨추(僉樞)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풍산류씨이고, 후 배위는 숙부인 진주강씨이다. 아들이 없어서 이중실(李重實)의 아들 이진규(李鎭奎, 1740~1797)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이진규는 字가 치오(稚五), 호가 풍락정(風洛亭)이다. 묘는 분천에 있고,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이진규의 아들은 이한기(李漢綺, 1761~1808)이다. 字는 백원(伯元), 호는 오류헌(梧柳軒)이다. 이교영(李敎英, 1833~1895)은 字가 화여(華汝), 호는 귀은(歸隱)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영해 부사, 청송 부사를 역임하였다. 문집과 『송서요훈(宋書要訓)』을 남겼다. 향산 이만도의 행장이 있으며, 서산 김흥락이 묘갈을 찬하였다. 배위는 숙인 풍산김씨이다. 이교영의 부친 이득노(李得魯, 1808~1873)는 호가 정와(靜窩)이고, 배위는 풍산김씨, 후 배위는 파평윤씨이다. 이득노의 부친 이의상(1792~1851)은 호가 화남(華南)이다.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그는 이한기와 완산유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이교영의 아들은 이종대(李鍾岱, 1867~1926)인데, 字는 태숙(泰淑), 호는 기포(杞圃)이다. 유고를 남겼고, 배위는 공인 풍산류씨이다. 이종대의 아들은 이갑수(李甲洙)이고, 손자는 현 종손인 이정이다. 감보개 사람에게 눌려지낸 눌산리 이야기 | 경상북도 봉화군 눌산리는 남쪽으로는 낙동강, 북쪽으로는 36번 국도, 동쪽으로는 임기, 서쪽으로는 소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한가운데 해발 607m인 월암산을 두고, 그 사방 산록에 자리 잡고 있는 여러 자연 부락들로 이루어진다.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서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눌산리의 중앙, 월암산의 서쪽 편으로는 눌산고을이 있다. 눌미, 눌매라고도 불린다. 눌산은 두 마을로 나뉜다. 감보개와 눌산이다. 늘 감보개 사람에게 눌려 지냈다 하여 눌산이라고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위쪽의 감보개는 상눌산, 아래쪽의 눌산은 하눌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감보개는 현포라고도 하는데, 눌산리에서 제일 먼저 개척된 고을이다. 눌산고을의 서편으로는 거리늘미가 있다. 눌산고을과 거리늘미는 같은 마을로 이어져 있지만, 둘 사이를 개울이 갈라준다. 거리늘미는 그 서쪽 편 마을이다. 눌미에서 춘양 나가는 길 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서 거리늘미이다. 거리늘미의 서쪽으로는 새터가 있다. 소천 쪽에서 눌산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마을이다. 감보개 사람들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면서 새로 만든 마을이라고 해서 새터, 또는 신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마을의 서편으로는 춘양에서 명호 나가는 35번 도로가 가설되어 있다. 35번 도로는 소천을 지나 명호 쪽으로 오면서 산 위로 상승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명호에 이르기까지 산 위를 달리는 능선길의 모습을 갖춘다. 그 상승의 시작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새터고을이다. 새터고을로부터는 눌산리를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202번 마을도로가 있다. 이 도로는 동쪽으로는 노루골에서 영양을 향해 뻗어 내리는 31번 국도와 연결된다. 새터고을의 남쪽으로는 산골짝을 넘어서 호산과 홈재가 있다. 눌미의 남동쪽으로는 마그내고을이 있다. 두천, 또는 농천이라고도 불린다. 마그내는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눌미의 북쪽으로는 고늘미와 마너뫼 고을이 있다. 고늘미는 고눌산, 고눌미라고도 하며, 마을 앞에는 서낭당이 있고 300년 이상 된 당나무가 있다. 눌산 북쪽 멀리로는 마너뫼가 있다. 마너뫼는 매산이라고도 한다. 1796년경에 진씨 성을 가진 선비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마을 산이 말 등같이 생겼다 하여 마너뫼라고 한다. 월암산의 동쪽 아래편에 물알, 위편에 방고개가 있다. 202번 도로의 동쪽 끝, 31번 도로의 동편으로는 부트내와 검상골이 있다. 이 부근의 골짜기 속에는 구가암이 자리 잡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