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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춘양일대의정자..태백오현의와선정...

어풍대08 2013. 2. 4. 11:45

정면 왼쪽 전경

와선정 내부에서 바라 본 외부 풍경

정면에서 내려다 본 전경

와선정 앞 계곡

누정 이야기
- 나라의 치욕을 참지 못해 세상을 등진 다섯 사람


1637년(인조 14) 인조가 현재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에서 평소 오랑캐라 일컬었던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는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고, 여진은 조선 초부터 북쪽 변경을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던 오랑캐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그들 마음속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명리를 버리고 절의를 지키기 위해 태백산 줄기 깊은 산골짜기 봉화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들 다섯은 영의정 홍섬의 증손 홍석,

송강 정철의 손자인 정양,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심장세,

참판 강집의 현손 강흡과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홍우정이었다.

그들은 각기 터를 잡아 정착했으나 서로간의 거리는 수십 리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연을 벗 삼아 빈번하게 교유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소가 사덕암과 그 위에 있는 와선대(臥仙臺)였다.

이들 태백오현의 후손들은 와선정 계(契)를 결성하여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다.



관련인물
- 태백오현의 일생


심장세(沈長世, 1594∼1660)의 字는 덕조(德祖)이고, 호는 각금당(覺今堂)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심의겸의 후손이다.

1624년(인조 1)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왕을 모신 공이 있어 금부도사가 되었으며, 1627년(인조 4) 정묘호란 때에도 강화도까지 왕을 수행하였다.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나자 비분강개하여 태백산 아래 봉화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사후 이조 판서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저서로 『각금당집』이 있다.
홍우정(洪宇定, 1595∼1656)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호는 두곡(杜谷)이다. 선조 때의 명신 문장공(文莊公)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요,

서윤(庶尹) 홍영(洪榮)의 아들이다.

만전당이 “우리집에 필시 이인(異人)이 태어날 것이다.

”라는 현몽을 한 후 얼마 안 되어 태어난 손자가 꿈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홍우정은 5형제 중 맏이며, 아우 홍우원(洪宇遠, 1605∼1687)은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 대사성, 이조판서 등 요직을 지냈다.

다른 아우 홍우량(洪宇亮)은 무과에 급제해 제주 목사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들었다.
가문 배경과 학문적 기반이 있었음에도 홍우정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자 이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고자 봉화 뒤뜨물 마을로 은둔했다.

이후 그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낙향한 뒤로 머리에는 벙거지를 쓰고 해진 베잠방이를 입고 짚신을 신었다.

그리고 망태기를 둘러메고 장사치 등 하류배들과 섞여 살았다.

때로는 북쪽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렸으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의 문집에는 그의 모습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의 삶은 뜻이 너무 크고 행동이 너무 자유로워 일반 사람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삶이었다.

외로운 삶이기도 했다.

그 외로움을 그는 이렇게 그렸다.
「도중음」(道中吟 : 길가다가 읊다)
온 천지 산하에 가득 눈이 덮였는데 / 地負山河萬里雪
하늘에선 서북풍이 한바탕 휘몰아치네. / 天噓西北一箕風
길가는 이 이미 끊긴 이 석양 길을 / 行人已盡斜陽外
나 홀로 지친 나귀 몰아 동으로 가네. / 獨策玄黃猶向東
1748년(영조 24) 사림들이 홍우정을 기리는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를 그가 낙향한 뒤뜨물 마을에 세웠다.

유허비 앞면에 “명나라 천하에 집 없는 나그네 되어 태백산 속에 스님처럼 살아가네.”라는 그의 시구를 새겼다.

1816년(순조 16)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고, 다음해 개절공(介節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정양(鄭瀁, 1600~1668)의 본관은 연일(延日), 字는 안숙(晏叔), 호는 포옹(抱翁)이다.

송강 정철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강릉 부사를 지낸 정종명(鄭宗溟)이며,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참의 홍인걸(洪仁傑)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36년(인조 13)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신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수년간 은거생활을 하다가 동몽교관에 제수된 뒤 의금부도사·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수운판관을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용안 현감으로 나가 치적(治蹟)을 올렸다.

이후 비안 현감·종부시주부·진천 현감·금구 현령·한성부 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668년(현종 9)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어록해(語錄解)』를 간행하였다.

송시열·유계 등과 가까이 지냈다.

처음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다시 받았다.
강흡(姜洽, 1603~1681)의 字는 정오(正吾), 호는 도은(道隱) 또는 이오당(二吾堂)이라 한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아버지는 도사를 지낸 강윤조(姜胤祖)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상촌(象村) 신흠(申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630년(인조 7)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성균관 유생으로 1636년(인조 13)에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항할 것을 상소하였다.

효행으로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를 받아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 이어 산음 현감을 지냈다.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 시직(侍直)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3) 병자호란 때 항복의 굴욕을 당하자 울분을 가누지 못하여 가족을 데리고 봉화의 태백산 아래에 은거하며 절개를 지켰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잠은집』이 있다.
홍석(洪錫, 1604∼1680)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字는 공서(公敍), 호는 손우(遜愚)이다.

만오(晩悟)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홍경소(洪敬昭)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도사 한완(韓浣)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1637년(인조 14) 병자호란이 굴욕적인 화의로 끝을 맺자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춘양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김수항·송시열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어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를 지냈으며, 죽은 뒤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저서로는 『손우문집』이 있다.

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마을, 학산리

의양마을의 서쪽 윗부분에는 서동리가 있고, 아랫부분에는 학산리가 있다.

학산리의 아래편으로는 법전마을이 있다.

의양마을에서 서북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은 102번 면도로이다.

이 길은 의양에서 서향하다가 학산리의 서쪽 끝부분에서 북행하여 다시 춘양의 애당리 쪽으로 뻗어나간다.

이 도로의 중간 부분까지 좌·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학산리이다.
의양마을과 학산리를 가르는 것은 철도의 굴다리이다.

길은 굴다리 아래로 나아가 의양리 서쪽 건너편의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간다.

주위는 좁고, 낮은 산들로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다.

철길을 지나 학산리 쪽으로 나아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새시골이다. 효동·조당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을의 모습이 새같이 생겼다고 해서 새시골이라고 한다.

이곳은 천마봉의 남동쪽 기슭을 이루는데, 주변에는 부처직골이 있다.

새시골에서 위쪽으로 나아가면 꼴디가 있다.

골딩이·골둔이·화둔이라고도 부른다. 참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화둔이라 하기도 했고, 풀이 많이 자라는 곳이라 골딩이라 했다고도 한다.
여기서 북동쪽으로는 서동리로 나아가는 노실재가 있고,

남동쪽으로는 법전의 소지리 쪽으로 나아가는 골딩이재가 있다.

꼴디의 위쪽에는 중마을이 있다.

중새목이라고도 하며, 새모양을 하고 있는 학산리의 중앙 부위에 위치한다고 하여서 중조·중새목·중마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서남 방향으로 법전의 사랭이로 넘어가는 솔당재가 있다.
중마을의 위쪽으로는 상새목이 있다.

상새목은 학산리 중 가장 위쪽에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새목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바디산의 남쪽 산록이다.

위로는 애당마을로 나가는 당재가 있다.

서낭당이 있는 곳이다.

마을 변경을 한정짓는 것이 서낭당이고 보면, 당재까지를 학산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상새목과 중마을 사이, 상새목의 동남 방향으로는 새실이 있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마을이다.

학산리는 새의 목 같은 형상이라서 새목으로 불렸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후 학산으로 바뀌었다.

여기에,臥仙亭. 와선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