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 이야기 |
- 나라의 치욕을 참지 못해 세상을 등진 다섯 사람 |
이는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고, 여진은 조선 초부터 북쪽 변경을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던 오랑캐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그들 마음속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명리를 버리고 절의를 지키기 위해 태백산 줄기 깊은 산골짜기 봉화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송강 정철의 손자인 정양,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심장세, 참판 강집의 현손 강흡과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홍우정이었다. 그들은 각기 터를 잡아 정착했으나 서로간의 거리는 수십 리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연을 벗 삼아 빈번하게 교유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소가 사덕암과 그 위에 있는 와선대(臥仙臺)였다. 이들 태백오현의 후손들은 와선정 계(契)를 결성하여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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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오현의 일생 | ||
심의겸의 후손이다. 1624년(인조 1)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왕을 모신 공이 있어 금부도사가 되었으며, 1627년(인조 4) 정묘호란 때에도 강화도까지 왕을 수행하였다.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나자 비분강개하여 태백산 아래 봉화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사후 이조 판서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저서로 『각금당집』이 있다. 서윤(庶尹) 홍영(洪榮)의 아들이다. 만전당이 “우리집에 필시 이인(異人)이 태어날 것이다. ”라는 현몽을 한 후 얼마 안 되어 태어난 손자가 꿈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다른 아우 홍우량(洪宇亮)은 무과에 급제해 제주 목사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들었다. 이후 그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망태기를 둘러메고 장사치 등 하류배들과 섞여 살았다. 때로는 북쪽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렸으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의 삶은 뜻이 너무 크고 행동이 너무 자유로워 일반 사람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삶이었다. 외로운 삶이기도 했다. 그 외로움을 그는 이렇게 그렸다. 유허비 앞면에 “명나라 천하에 집 없는 나그네 되어 태백산 속에 스님처럼 살아가네.”라는 그의 시구를 새겼다. 1816년(순조 16)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고, 다음해 개절공(介節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송강 정철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강릉 부사를 지낸 정종명(鄭宗溟)이며,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참의 홍인걸(洪仁傑)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36년(인조 13)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신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수년간 은거생활을 하다가 동몽교관에 제수된 뒤 의금부도사·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수운판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비안 현감·종부시주부·진천 현감·금구 현령·한성부 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668년(현종 9)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어록해(語錄解)』를 간행하였다. 송시열·유계 등과 가까이 지냈다. 처음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다시 받았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아버지는 도사를 지낸 강윤조(姜胤祖)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상촌(象村) 신흠(申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630년(인조 7)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성균관 유생으로 1636년(인조 13)에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항할 것을 상소하였다. 효행으로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를 받아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 이어 산음 현감을 지냈다.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 시직(侍直)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3) 병자호란 때 항복의 굴욕을 당하자 울분을 가누지 못하여 가족을 데리고 봉화의 태백산 아래에 은거하며 절개를 지켰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잠은집』이 있다. 만오(晩悟)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홍경소(洪敬昭)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도사 한완(韓浣)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1637년(인조 14) 병자호란이 굴욕적인 화의로 끝을 맺자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춘양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김수항·송시열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어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를 지냈으며, 죽은 뒤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저서로는 『손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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