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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춘양일대의정자..창애정...

어풍대08 2013. 2. 3. 23:14

전경

원경

전경

명 칭

:

창애정(滄厓亭)
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285
(원소재지 : 안동부 중춘양면)
건 축 주: 이중광(李重光, 1709~1778)
건축시기: 1742~1778년 사이
중건시기: 1801년(순조 1)
소 유 자: 이홍(관리자 : 이홍)
문 화 재:

문화재자료 제237호, 1991년 3월 25일 지정, 1동

건축 이야기

봉화읍 소재지에서 36번 도로를 따라 동쪽 태백 현동 방향으로 22km 쯤 가면 35번 안동으로 가는 도로와 만난다.

이 갈림길 500여 m 전에 큰 냇물을 건너 오른쪽 들판에 창애정이 보인다.

창애정은 찻길에서 그 앞을 흐르는 운곡천을 건너서 가야 한다.

냇물이 얕을 때는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냇물에 듬성듬성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 강둑을 타고 걸어서 들어갈 수 있으나 냇물이 불으면 그런 방식으로 들어가기 힘들다.

그 경우에는 창애정에 이르기 몇 백 m 전 우측에 있는 작은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가 그 입구에 차를 두고 큰 변전소 옆을 끼고 도는 농로를 따라 가야 한다.

창애정 쪽으로 가는 길이 보이면 철로를 넘어 다시 농로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창애정 옆에는 풀 속에 문짝마저 잃고 다 쓰러져 가는 붉은 함석지붕을 덮은 집 하나와 시멘트로 지어진 작은 화장실이 있는데, 정자의 단아한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정자의 주인이 앞에 흐르는 큰 냇물과 눈 들면 마주치는 절벽 위의 소나무를 보며 마음에 맞는 이와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으며 즐기던 그 정취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예전 사진을 보면 정자 앞에 우뚝한 소나무가 있어 정자의 말벗을 해주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 보이지 않는다.

인적도 없고, 가끔 돌보는 이도 없어 보이는 정자는 주변 논밭 사이로 외롭다.

전면에 걸려 있는 창애정 현판글씨는 거친 듯 힘찬데 사방에 액을 두르고 단청을 했다.

우측에는 차강헌(此江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에는 초서로 쓰인 시판 하나가 걸려 있다.

창애정 마루에 서서 냇물 건너 맞은 편 절벽 바위에 수운동(水雲洞)이라 새겨진 글씨가 보이고, 비스듬히 맞은편 언덕 위에는 창랑정사가 보인다.

창애정은 사방에 반듯하게 흙과 돌을 써서 담을 둘렀는데, 왼쪽 담 사이에 새로 사주문을 두어 들고 나게 해두었다.

마당엔 풀이 제법 자라고 있는데, 수리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그

래도 정자 대청과 방안엔 박쥐똥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뒤 담장에 바싹 붙여 화장실을 만들었는데 정자의 전체 모습을 아주 해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건축 배경

창랑정사는 1901년 두릉 이제겸(李濟謙, 1683∼1742)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지은 정사이다.

창랑정사 쪽에서 보면 창애정을 비스듬히 굽어본다.

이제겸은 이중광의 숙부이다.

이중광은 어릴 적에 이 숙부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그 뒤 이 숙부를 따라서 이쪽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제겸과 이중광 두 숙질 사이의 깊은 인연이 이렇게 또 이어지는 셈이다.


건축 구성

창애정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이다.

평평한 대지 위에 누마루를 만들기 위해 기단을 다소 높이 쌓았다.

막돌로 만든 기단이며 여기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이고 우측 온돌방 앞으로는 1칸의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어칸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칸을 두고 사방으로 퇴를 달아 계자각을 둘렀다.

대청의 전면에는 3짝 들어열개문을 2개소에 설치하고,

내부의 좌측·우측에는 2짝 들어열개문을 2개씩 달았다.

온돌방의 전면과 측면에는 세살문을 달았는데,

문틀은 온연귀맞춤하였다.

대청은 우물마루로 꾸몄는데 청판의 구성이 귀틀모양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다.

장귀틀은 도리방향으로 놓고, 동귀틀을 보방향으로 놓았으며, 동귀틀은 전퇴·후퇴까지를 동일부재로 사용하였다.

5량가로 구성된 대량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게 하였으며, 종량 위에는 다소 키가 큰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았다.

전체적으로 사용한 목재를 볼 때, 이 정자는 지을 당시 대단한 재물과 노력으로 공들여 지은 집으로 생각된다.


창애정(滄厓亭)
차강헌(此江軒)
창애정 시판(滄厓亭 詩板)

이중광은 1748년 현릉 참봉이 되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잠시 부임하였다가 사임하고 돌아왔다.

돌아올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 시는 그 뒤 후손 이헌상(李憲相)이 글씨를 쓰고 시판으로 제작되어 되어 현재 창애정에 걸려 있다.

한없는 청산 속에 자유롭게 놀던 몸이 / 無限靑山自在身

어이하여 오릉(五陵)의 손님 되었던가. / 如何來作五陵賓

내일 아침 말 타고 청산(靑山)에 돌아가면 / 明朝騎馬靑山去여전히 청산 속 사람 되련다네 / 依舊靑山影菓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