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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중랑장파13세대종손,문량공과아드님이름에담긴유교사상!!

어풍대08 2012. 3. 7. 08:51
여말선초(麗末鮮初) 격동기를 거치며 유학(儒學)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는 관리들도 같은 신념을 갖는 것은 필수적이다.
조선 초 유명관리들이 지은 자식들의 이름을 살피다 보면 당시 그들이 가진 유학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알 수 있다. ‘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유학 실천의 5대 근본원칙이라 하여 흔히 ‘오상(五常)’이라 부른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해 조선 건국에 참여하고 도승지를 거쳐 의정부 참찬사를 지낸
이문화(李文和)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다.
인의예지신 순서대로 이효인(李孝仁) 이효의(李孝義) 이효례(李孝禮) 이효지(李孝智) 이효신(李孝信)이라
이름 짓고 막내인 여섯째는 오상(五常)의 상(常)자를 따와 이효상(李孝常)이라고 지었다.
 이문화와 비슷한 시대를 살며 태종 때 우의정에까지 오른
 노숭(盧嵩)의 다섯 아들도 노숭인(盧崇仁) 노숭의(盧崇義) 노숭례(盧崇禮) 노숭지(盧崇智)
 노숭신(盧崇信)이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짓다가 아들이 다섯에 이르지 못해 중단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아들이 일곱까지 된다면 어떻게 지었을까? 이런 사례도 있다.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 이방의(李芳毅)의 아들 이석근이 그렇다.
 그는 일곱 아들의 이름을 이인(李仁) 이의(李義) 이례(李禮) 이지(李智) 이신(李信)이라고 짓고,
 다음은 삼강(三綱)의 강(綱)을 따와 이강(李綱), 그리고 막내인 일곱째는 이상(李常)이라고 지었다.
 오상(五常) 못지않게 자주 사용된 유학 논리는 논어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이다.
 ‘공자가 온량공검양했기 때문에 제왕들이 그에게 정사(政事)를 들으려 했다’는 대목에서 나온다.
 고려 말 재상을 지낸 안종원(安宗源)은 네 아들 이름이 안중온(安仲溫) 안경량(安景良)
안경공(安景恭) 안경검(安景儉)이다. 이름 덕인지 중온, 경량은 벼슬이 중추(中樞재상급)에 이르고
경공은 개국 공신으로 참여해 흥녕군에 봉해졌으며 경검 또한 공조전서(훗날의 판서)에까지 이른다.
 ‘온량공검양’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작명에 사용됐다.
 여진에서 귀화해 이성계의 개국을 도왔던 공신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李和英)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다.
 이효량(李孝良) 이효정(李孝貞) 이효온(李孝溫) 이효검(李孝儉) 이효양(李孝讓) 이효강(李孝綱)이다.
 둘째의 정(貞)은 잠시 후 살펴볼 주역의
‘사덕(四德元亨利貞)’에서 따온 듯하고
막내의 강(綱)은 삼강에서 따온 것이다. 태종의 사위였던 무장 권복(權復)은
 일곱 아들의 이름을 순서 그대로 권온(權溫) 권량(權良) 권공(權恭) 권검(權儉) 권양(權讓)으로 짓고
아래 두 아들에게도 늘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뜻을 담아 권외(權畏), 권신(權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역의 사덕 또한 이름에 자주 사용됐다.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홍여방(洪汝方)은
 세 아들의 이름을 홍원용(洪元用)
홍형용(洪亨用)
 홍이용(洪利用)으로 지었다.
넷째 아들이 생겼다면 분명 그 이름은 홍정용(洪貞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利)는 유학에서 흔히 의(義)와 대비되어 부정적 뉘앙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 때의 명신 이명덕(李明德)은 다섯 아들 이름을 원근(元根) 형근(亨根) 정근(貞根) 녕근(寧根)
효근(孝根)이라고 지었다.
 이(利)를 피하려는 경향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져 연산군 때 멸문지화를 당한 이세좌(李世佐)는
 네 아들 이름을 수원(守元) 수형(守亨) 수의(守義) 수정(守貞)으로 지었다.
 이(利)를 의(義)로 바꾼 것이다.
반면 태종 때의 최고 정승 하륜(河崙)은 적자 1명과 서자 3명을 두었는데,
 이름이 하구(河久) 하장(河長) 하연(河延) 하영(河永)이다.
 뭔지 모르지만 영구(永久)히 연장(延長)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또 세종 때의 최고 정승 황희(黃喜)의 세 아들 이름은 치신(致身) 보신(保身) 수신(守身)이다.
 하륜에게서는 난세의 꿈을, 황희에게서는 난세의 지혜를 읽어내야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