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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중랑장파20세대종손,충헌공할아버지의봉계일고번역문!!

어풍대08 2012. 2. 27. 20:55

저자개요 1541-1598 (중종36-선조31)字: 仲安‚ 號: 鳳溪‚ 本貫: 唐城(南陽)‚ 父: 甫‚ 母: 全州 柳氏
저자내용 서울에서 출생하여 1567년(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선조 6) 明經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승문원 正字‚ 典籍‚ 監察‚ 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고 黃海道都事‚ 海運判官‚ 戶曹參議‚ 咸鏡道巡察使 등을 거쳐 全州府尹‚ 全羅監司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원군이 조선에 참전하게 되어 군량 공급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자 平安道調度使로 임명되어 명군에 대한 군량보급을 전담했다. 죽은 뒤에 이조판서‚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왜란 당시 전쟁 수행의 일선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사람으로 평가된다.
내용제목 鳳溪逸稿 내용개요 청구기호 奎 1664
권제 권제목:卷二 (附錄)
제목 없음.

東萊東軒敬次先祖文良公韻‚ 附原韻‚

 淸州客舍見壁上韻次呈仲兄承旨公案下三絶‚ 附承旨公次韻‚

書懷‚ 偶吟‚ 義興東軒‚ 遊三聖山

請明賞罰啓 (2)

왜란 시기 함경도순찰사로 재임할 때 함경도 지역의 제반

사정을 왕에게 알리기 위해 쓴 글.

 三水民 가운데 여진족에게 포로가 된 자가 많음을 지적하고

 여진족들에게 布物을 많이 주어서 민들을 송환하게 해달라고

건의하였다. 왜란을 겪은 이후 各邑과 各鎭의 軍器가

엉망인 가운데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임을 지적하고

六鎭과 各堡의 방비태세를 급히 갖추라고 건의하였다.

왜적이 함경도에 들어오자 대부분의 수령들이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端川郡守 姜燦과 慶源府使 吳應泰만은 끝까지

성을 사수하면서 분전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왜적에게 빌붙어 伏誅된 자들의 妻子를 北道에서는 이미

 定配했음에도 南道에서는 불문에 붙인 것을 들어 罪惡이

같음에도 처벌은 다르다고 비판하였다.

各驛이 凋殘한 이유는 兵營의 軍官과 邊將들이 馬匹을 함부로

사용하기 때문이며 이 결과 각 驛의 驛卒들이 피폐해지고 지역

 간의 연락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임을 지적하고

그 폐단을 시정하자는 내용이다.

請罷奸濫守宰啓 (4)

함경도순찰사로 있을 때 도내의 농업상황 등을 보고한 글.

 洪原부터 安邊 지역까지는 그런대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으나

 咸興 이남의 7개읍은 陳田이 대부분이라서 거의 굶어죽게 된

처참한 상황이라 救荒대책이 시급함을 지적하였다.

민생의 休戚은 수령의 賢否에 달려 있는데 지금같은 전란 기간

동안에는 더욱 그러하다고 전제하고 백성에게 탐학을 일삼는

 文川郡守를 징계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본도의 사나운 인심을 순화하기 위해 義人을 찾아내어

포상하자고 건의하고‚

 咸興 등 7邑은 인구는 많고 곡식은 적어서 백성들을

延命시키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정을 보고하였다.

全羅監司告病乞免狀 (6)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자신의 질병이 극심하고 정신의 혼미함

을 들어 전란 중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사직을 청하는 내용.

請治土豪啓 (8)

전라도 지역은 토호들의 폐단이 본래 많았는데

특히 潭陽 지역이 극심하다고 보고하였다.

 담양의 進士 金應會는 토호 가운데 우두머리로서

 대소의 이서배들이 김응회의 존재는 알지만

 府使는 무시하는 정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담양부사 李景麟은 堂上文官임에도 토호 하나 제대로

 징치하지 못하는 위인이므로 속히 파직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調度軍民啓 (9)

平安道調度使로 재직 시에 軍糧과 馬匹을 조달하려 해도

 대부분의 백성들이 離散해버리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현실임을 지적하고

그것이 자신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탄하는 계문.

請褒賞納穀人啓 (10)

평안도조도사로 활동할 때 곡식을 모아들이는 양상‚

곡식을 바친 사람들의 명단‚

 바친 수량을 조정에 알리고 그들에게 적절한 상을 내려줄 것을

청한 계문. 납속한 자들 가운데 실제 재능이 뛰어난 자는

뽑아서 京職이나 守令職을 제수하면 부민들이

다투어 곡식을 바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請治運糧遲緩罪啓 (12)

평안도의 각 고을에서 군량을 운송해 올 때 수령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 운반이 더디어지는 양상을

서술한 뒤에 그 책임이 궁극적으로는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請罪하는 계문.

答或人 (13)

일본군이 南原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명군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데 명군이 오면 그들에게 군량을 공급할 것이

큰 걱정이라는 것과 조선과 명 사이에 곡물을 저울질할 때

사용하는 말(斗)에 차이가 있어

명나라 장수의 노여움을 샀다는 내용의 답장.

寄子時述 (14)

아들에게 자신은 명군에 대한 군량 보급 문제 등

 國事 때문에 바쁜 상황에 있음을 설명하고

집안 인척들의 전란 중의 안부 등을 물은 뒤‚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편지.

寄從子時勉 (15)

아들에게 가뭄이 심한 상황에서 농사의 작황을 묻고

고조부의 제사는 전란을 맞아 정상적으로 지낼 수 없으니

神位를 땅에 묻으라고 지시한 편지.

平安道調度節目 (15)

평안도조도사로 있을 때 군량보급 대책 전반에 관하여 상세하게

 언급해 놓은 내용.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변 지역의 田稅 담당자에 관한 언급∕ 도량형의 校正 문제∕

各官의 곡식 未納分을 재촉할 것∕

명나라의 군량이 올 때를 대비해서 미리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가마니를 마련할 것∕ 군량 모집 시에 애쓴 사람에 대한 언급∕

 백성이 바친 소(牛)를 이용해서 군량을 운반하는 문제∕

 癸巳(1593)·甲午(1594)年의 各司奴婢 身貢의 미납분을

作米하여 거두는 문제∕ 군량을 모으기 위해 影帖을 내려달라는

 요청∕ 지친 백성들에게 懲役과 收米를 동시에 요구할 수는 없다는 내용∕ 각 관아의 衙前과 奴婢들이 면역될 수 있는 곡식의 수량 규정∕

이미 곡식을 바치고도 직첩을 받지 못한 자들의 명단을 開錄함∕ 곡식을 납부한 僧徒들에게 시상하는 문제∕ 소금을 판매해서 곡식을 구하는 문제∕

곡식을 받고 私賤人을 면천시키기 위해

 면천첩을 내려줄 것을 요청∕ 도망한 노비들의 신공 처리문제∕

곡식운반을 위한 수레를 마련하는 문제∕

명에서 들어오는 양곡을 보관하는 문제∕ 數法에 능한 자를 구함∕

 僧軍을 수송에 동원하는 문제∕

楊摠兵·吳遊擊 등 중국장수들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문제∕

 都事·評事 등의 양곡운반 독촉을 담당하는 문제∕

왕래하는 明軍에게 1인당 지급하는 군량의 양∕

국가의 운명이 朝夕에 달렸는데도 사람들이 財穀을

아끼는 형편이니 군량 모집을 위한 선전과 노력을

좀더 열심히 할 것∕ 지금부터 營屬 이외의

 兼軍營屬자는 모두 납속하여 그 品에 따라 면역시킬 것∕

 熙川에 사는 納粟堂上 金忠良은 쌀을 또 다시 납부했으므로

 加資할 것∕ 지금은 海運에 의지하고 있으나

 머지 않아 겨울이 닥칠 것이므로 陸運 대책을 세울 것∕

 各官의 稅鹽을 예년처럼 作米할 것∕

 의주 부근에 大軍이 오래 주둔하여 군량이 부족하니

 明의 군량으로 대치할 것∕ 왕래하는 중국

差官들에게 양식을 지급하는 문제∕

중국에서 들어오는 양곡을 저장할 창고의 건설 문제∕

敗船米와 곡물의 감축분 처리 문제∕

임진년 이후 各官의 倉穀이‚ 주관하는 자가 없어서

 현재 부족분을 제대로 보충할 수 없는 상황 설명∕

乙未年 노비 身貢의 미수분을 거둬들이는 문제∕

本道 上番군사를 금년에 한해 停番시키는 문제∕

종이로써 쌀을 무역하는 문제∕

 전라도 일대에서 明軍의 작폐가 심하다는 보고 등이다.

敎全羅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全州府尹巡察使洪世恭書 (1)

홍세공을 전라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로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 전라도는 나라의 남쪽 관문이며

外敵에 대해 빗장과 같은 구실을 하는 곳으로 사변이 생기면

 그 피해를 먼저 받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方伯의 선택은 항상 타도에 비해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기존의 방백들은 이곳을 고식적으로

 다스려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었다.

 오늘날 南原에는 왜적이 머물러 있고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나는 등 湖南의 형세는 급박하다.

 전쟁 수행과정에서 백성은 어깨를 쉴 겨를이 없고

밭갈이를 못하여 沃土가 쓸쓸하니

<岐豊舊基>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다.

경에 대한 기대는 참으로 크니 백성을 安集시키고

 수령의 黜陟을 신중히 하고 明軍에 대한 군량 보급에

각별히 힘쓰고 군율의 적용을 엄히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諭全羅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全州府尹巡察使洪世恭 (3)

전라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로서 홍세공의 임무가 막중함을

 다시 강조하고 符節을 내린다는 내용의 유시.

諭咸鏡道巡察使洪世恭 (3)

홍세공이 함경도순찰사로 있을 대 왕이 내린 諭示.

 平壤城전투 이후 왜적은 서울 쪽으로 퇴각하고 있는데

 加藤淸正 휘하의 함경도의 왜적만은 아직도 그대로 있다.

그래서 홍세공에게 휘하의 將士와 합심협력하여

왜적이 西行하는 것을 차단하고 숨어 있는

적을 요격하여 뒷날의 후회를 막으라고 지시한 내용.

行狀 (4)

李光庭(1552-1627)이 홍세공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전 생애와

 활동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글.

 2권 1책의 문집전체 분량에 비해서 양이 많은 편이고

 내용 역시 여타 부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눈에 띤다. 그 중 중요한 부분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어려서부터 비범했던 그의 재능과 활동은 국가적 위기였던

임진왜란 시기에 크게 발휘되었다.

왜란 직전 그는 江界府使로 있었는데‚

당시 강계에 유배 중이던 鄭澈이 유배지를 이탈하여 大駕를

호위하려하자 ‘舊規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가 위기에서도 원칙을 지켰다고 평가하여

호조참의로 서용하여 明軍에 대한 군량공급의 大任을 맡겼다.

 그는 1592년 7월 調度使로서 평안도 熙川·運山·博川 등지에서

 569석의 군량을 마련하였고 이후 平安道巡察御使가 되어

 列邑을 순행하면서 募兵과 調食에 진력하였다.

 1593년에는 평양성 패전 이후에도 함경도에 남아 있던

 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고

 다시 關北지방을 순행하면서 기민을 구제하여 백성들을 安集하

는데 힘썼다. 또 관북지방의 무기와 城池 등이 형편 없는

상황으로 방어대책이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것을 중시하고

조정에 대비책을 촉구하였다. 또 전란 중에 공을 세우거나

 백성들을 학대한 수령의 功過를 기록하여

그에 합당한 상벌을 내릴 것을 촉구하였다.

1593년 6월 전주부윤을 거쳐

1594년에는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해 9월 대기근으로 ‘

人相食’의 지경에 이르러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그들의 소굴을 불태우고 그를 진압하였다.

1595년 당시 남원에는 劉綎이 지휘하는 명군이 수천명이나

주둔해 있었다. 또 명나라가 豊臣秀吉을 日本國王으로 봉하면서

 일본에 다녀온 李宗城‚ 楊方亨 등 명나라의 고위사신들이

전라도에 들어왔다. 따라서 이들을 접대하고 뒷바라지하는 것이

 큰 일이었을 뿐 아니라 이들과 연관하여 왕래하는 使節 등에

대한 送迎의 비용이 엄청나서 민들이 대거 離散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조정에 대해 민들의 逋欠을 견감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이를 관철하여 민들을 어느 정도는 安集시켰다.

 전라도 지역의 방어태세를 강화하기위해 關防을 설치하고

 蟾津江·八良峙·六十峙 등의 요해처에 장수를 선발해 배치했다. 또 전통적으로 심했던 이 지역 土豪들의 武斷행위를 근절시키고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령들을 도태시켰다.

1596년 조정으로 돌아와 右副承旨를 거쳐 다시 평안도조도사가

 되었다. 당시 각지에 왜군의 패잔병들이 屯聚하여

약탈을 일삼고 도로를 막아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單身으로 임지로 부임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명군이 다시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정은 그에게 명군에 대한 군량 보급의

임무를 전담시켰는데

그는 동분서주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病死하였으니

향년 58세였다.

죽어서 그는 長湍의 선영에 묻혔고

왜란 직후인 1600년 조정은 그의 ‘竭心奉公’을 인정하여

 이조참판으로 추증하였고

 1607년에는 唐城府院君으로 봉작되고 領議政兼世子師로

 다시 추증되었다. 그는 宏厚한 인품에 孝友忠直하였고

 대인관계에서 상대의 善·不善에 따라 好惡가 분명하였다.

그가 전주부윤으로 있고 李廷馣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그는 이정암에게 워낙 예의를 엄격히 갖추어

이정암이 그를 말릴 정도였다.

그런데 후일 그가 전라감사가 되고 이정암이 전주부윤이 되었을

 때 이정암이 예의상 다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자

그는 가차없이 이정암의 태만을 힐책하였다고 한다.

 왜란 당시 북부지방에서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고

  ‘평안도에서는 이원익을 그리워하고

 남방에서는 홍세공을 못잊는다,(西路思元翼 南方憶世恭)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망이 깊었다.

그의 부인은 高靈朴氏 壽春의 딸이었는데 왜란 중

 咸興의 山中에서 왜적에게 항거하다가 죽었고

후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다.

諡狀 (14)

1824년(순조 24년) 홍세공에게 ‘忠憲’이란 시호를 내릴 때

홍세공의 9대손인 道根의 요청으로 金羲淳이 쓴 글.

홍세공이 죽은 지 한참 지났지만 그의 忠義와 勞苦를

 세상에 다시 알리는 것이 公議를 키우는 것이라 전제하고

李光庭이 찬한 行狀과 몇몇의 전해오는 자료에 의거해 찬했다.

 홍세공의 행적과 일화에 관련된 전체적인

내용은 이광정이 쓴 행장과 대동소이하다.

墓誌銘-幷序 (20)

趙述道가 홍세공의 9世孫인 最根의 요청을 받아 쓴 묘지명과

그 서문. 앞부분의 序文은 이광정이 쓴 행장의 내용과

비슷하며‚ 뒷부분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을 중심으로

 홍세공의 업적을 찬양한 銘이 부기되어 있다.

祭文 (30)

홍세공이 죽은 1598년 李好閔(1553-1634)이 쓴 제문.

國事를 위해 죽은 그를 애도하고 있다.

送洪書狀仲安赴京 (30) 홍세공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갈 때 黃暹이 써준 전별 詩
送巡察使洪仲安還朝 (30)

홍세공이 전라감사를 마치고 조정으로 복귀할 때

이정암이 써 준 전별시.

 홍세공이 호남에서‚ 또 북방에서 조도사로서 이룬 업적을

칭찬하고 이별의 아쉬움을 담고 있다.

亂中雜錄抄 (31)

趙慶男의 ≪亂中雜錄≫가운데 홍세공의 활약상과 관계된

 내용을 뽑아 놓은 것.

 1593년 6월 이후 홍세공이 호남지방에서 監司‚

全州府尹을 역임할 때의 행적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당시 호남지방에서 맹위를 떨치던 지방 劇賊들을‚

홍세공이 그 근거지인 回文山을 火攻으로 제압함으로써

소탕했다는 기사와 中國將卒들이 폭주하여

그 접대문제 등으로 湖南一路의 백성들이 피폐해졌을 때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면서 안집시켰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또 1596년 이후 그가 호남지방의 방어를 위해 각지에

山城을 쌓은 사실과 탐학한 守宰들을 제어함으로써

백성들이 다리를 펼 수 있게 되었음을 적고 있다.

跋文 (跋1)

1900. 후학 柳道獻과 12代 후손 洛鐘이 쓴 발문.

유도헌의 발문은 임진왜란 당시의 홍세공의 활약상을

서술한 뒤 그의 저술들이 병화 중에 대부분 산일되었다는

 것과 그 중 남아 있는 詩文·雜著 약간을

후손 學鐘이 수습하여 자신에게

 발문을 부탁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12대손 洛鐘의 발문은 홍세공의 유문들이 家傳되다가

 7대손에 의해 정리 노력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자신의 종제인 학종에 의해 그나마 정리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한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