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에서는 봉화 울진 사이를 연결하는 36번 도로와 태백 안동 사이를 연결하는 35번 도로가 十자 방향으로 교차한다.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의 동남쪽으로는 해발 607m의 월암산이 눌산 방향으로 벌려 서 있고, 서남쪽 방향으로는 해발 540m의 감의산이 자리 잡고 있다. 감의산의 남동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감의마을이다. 감의산 자락 속에 파묻혀 있으므로 감의마을이라고 한다. ****나의7대조고,風臺,諱錫範할아버지의음택과재실이있는곳!!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광정이 1739년 이곳에 은거하여 어은정을 짓고 살았다. 어은골이라는 마을 이름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온 것이다. 정자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정자가 서 있던 자리만 남아 있는데, 그 이름은 침향대라고 한다. 마을 앞터가 마치 물고기가 숨은 모양과 같아서 어은동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아래쪽의 평지마는 평촌이라고도 한다. 비교적 평지로 이루어진 곳이라 해서 붙여진 마을이다. **우리의남양홍씨중랑장파대종가,종택이있던곳으로~영조임금으로부터하사받은 含月堂이있었으나~지금은의성김문에양도되어~~옛이름조차없어져벼렸다. 단지,나의7대조고께서정자(停字)어풍정을지어,인근의선비들과교유하던자취만이 희미하게남아있을뿐이다**** 근세1970년대까지만해도,평지말일대에남양홍씨중랑장파대종가직계후손들이많이살았으나 지금은모두떠나버렸고.나역시10대소년시절을이곳에서뛰어놀며살아왔다.***** 여기에는 조선 영조 때 우부승지를 지낸 조덕린이 1727년에 지은 사미정이 있다. 사미정이라는 이름은 네 개의 미자를 말하는데, 즉 미자를 포함하는 해, 월, 일, 시에 지은 정자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미정 앞은 냇물과 반석, 절벽과 나무 등이 잘 어울려 있다. 조래는 조내·졸천·소천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원래 안동부에 속한 소라부곡이었다고 한다. 옛날 소라왕이 도읍했던 곳이기도 한데, 1895년에 봉화로 편입되었다. 이곳에서 물길을 건너 반대편으로 나가면 어풍대가 있다. 옛날 소라왕이 패해 달아나다가 이곳에서 쉬며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고 해서 어풍대이다. 사미정의 주인인 조덕린이 이곳에 와서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을 보고 스스로의 호를 옥천이라고 한 이래, 이 마을은 옥천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후에 의성김씨가 이주해 와서 이곳은 의성김문의 세거지가 되었다. 옥천서당·김갑동가옥 등은 이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이다. 그 교차점에서 법전 쪽으로 붙어 있는 마을이 오미(梧味)이다. 오미는 오산리라고도 하며, 조선 영조 때 참판 권두추가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양도하고 이곳으로 들어와 정착하여 오미라고 불렀다. 마을의 뒷산은 까마귀가 날개를 편 형상이라서 오산(烏山)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오산(梧山)이라 불린다. 오미와 옥천터 사이에는 시내를 중앙에 두고 창애정과 창랑정사가 나란히 벌려 서
옛 소라왕의 도읍지, 소천리
감의산의 동북쪽 편으로는 어은골·어은동이 있다.
춘양의 옥돌봉과 시루봉 사이의 산줄기들이 모은 물은 운곡천을 이루며 의양 쪽으로 흘러내려 옥천터 앞에 이르고, 소천리를 가르며 아래로 흘러내려 어은·감의를 감아 돌고, 명호 쪽으로 나아가서 낙동강의 본류에 합류한다.
어은고을의 북쪽으로는 막골·막곡이 있다. 예로부터 인근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이곳에 막을 치고 비를 피하곤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막골의 동쪽으로는 옥천터·조래·사미정·평지마 등이 위 아래 방향으로 나란히 벌려 서 있다.
평지마의 위쪽으로는 사미정이 있다.
사미정의 위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조래이다.
조래의 위쪽으로는 옥천터가 자리 잡고 있다.
옥천터의 위쪽에서 36번 도로는 35번 도로와 十자 형태로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