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대군(大軍)이 남하할 때 군량을 잘 관리하여 결핍하지 않게 한 일에 대해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논상(論賞)을 계청한 자를 보면,
전라 감사 한효순(韓孝純)은 당시 총관사(總管使)로서,
행 부호군 이민각(李民覺)은 당시 분호조 참의(分戶曹參議)로서,
경주 부윤(慶州府尹) 이시발(李時發)은 역시 분호조 참의로서,
판교(判校) 유공신(柳拱辰)은
【심술이 부정하여 이[蝨]처럼 권간에 빌붙었다. 】 당시 강원도 조도 겸 독운(江原道調度兼督運)으로서,
교리 박이서는 당시 황해도 조도 어사(黃海道調度御史)로서,
헌납 최동립(崔東立)은 당시 경기(京畿) 등 4도 독운(督運)으로서 ,
직강 황민중(黃敏中)은 당시 함경도 조도(咸鏡道調度)로서
모두 공로가 많은데도
논상할 때 미처 서계(書啓)하지 못했으므로 외방의 여론이
억울하게 여기니 극히 미안합니다.
또 평안도 조도사(平安道調度使) 홍세공(洪世恭)은 이미 죽었으나
공로가 가장 많으니 함께 논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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