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휘는 섬(暹)이요, 字는 퇴지(退之)요 호(號)는 인제(忍齊)이며 시호(諡號)는경헌(景憲)이다
서기1504년9월10일(연산10년갑자)묵재공(默齊公*휘언필字자미,號묵제,諡號文僖)을 아버지로
정경부인여산송씨를 어머니로 하시어 출생하시었다,
공의신체는 단중 端重하시고 용모(容貌)는영수(英秀)하시며 수염이 잘나셨고왼쪽눈섭가운데
검은사마귀 하나가 별 같이 반짝이었다.
나시면서부터 뛰어나게 영리(怜悧) 하셨고 성장하시어 경서를 배우시는데 한번만보시면 다외우셨다한다.
겨우8세때는 시종들과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 시는데 때마침 뇌성벽력이치며 소낙비가 내리면서
벼락이 떨어져 천지가 깜깜하여 앞길을 분간할수 없어 가마를 메고 가던 하인 들은 모두 놀라 쓰러져 정신을
못 차리는데도 공은 천천히 걸어서 벼락친 집을 지나서 남의집 문턱에 서서 비 를 피하고 계셨다한다.
어리신 나이에도 얼마나 침착하시고 그 그릇됨이 큰분이신가 짐작할수있다.
공은초배(初配)로 진산군(晋山君)유홍(柳泓)의따님에게 장가 드셨으나,贈貞敬夫人晋州柳氏는일찍돌아가셨고
계배(繼配)로 현감증참판한자(縣監贈參判韓慈)의따님으로 정경부인청주한씨로 1남1녀를 두셨는데
女는종실인 하원군이정(河原君李呈)에게 시집가셨고 삼배(三配)는 신창현감전주이창번(新昌縣監全州李昌番)의
따님으로三男을 두셨다
공은 학문에 힘쓰시어 나이가 20도 채 못되어 대책시(對策試)를 보이는 과거에서 고시관은 그 재주를 대단히
칭찬하고 특등에 뽑았으며 서기1528년(중종23년무자)사마시 에 합격하고
그이듬해서기1529년정시대책(庭試對策에서 장원 하고 서기1531년전시(殿試)에서합격하여
그해 겨울에 홍문관정자(弘文館鄭字)가 되셨으며 다시 박사 로 옮겨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를 겸임하시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광을 받고 조금뒤 사간원정언 으로 승진하시어 이조좌랑(吏曺左郞)으로옮겼으나
서기1535년1월에권간(權奸).김안로(金安老)의 횡포 로 고문을 당하시고,흥양현(興陽縣)으로귀양을가셨다가
서기1537년에 김안로 등이 죄를 받게됨에따라 귀양에서 풀려나,수찬(修撰)으로 불러 올라오는도중에
사헌부지평으로승진하시고 賜暇 讀書 케 되시었다
그때에 권간김안로에게 아부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던 무리들을 치죄하는데도 공은 보복하실눈치를 보이지
않으시고 公明正大하게 처리해야한다"고하셔 조야 가 공의 덕성을 극찬하여마지않았다
서기1538년에 홍문관교리.이듬해 사헌부장령 집의 를거쳐 서기1540년11월1일홍문관부제학,
서기1541년에 참찬관이되시고 3월에사간원대사간,그리고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 등을거쳐서
도승지(都承旨)가 되시고 서기1543년겨울에,경기관찰사가 되시어 도민을위한어진행정을펴시다가24개월의
지방행정관의임기를끝내고동지중추 (同知中樞)가되셨다
이해에는 공의 아버지이신 묵재공이 영의정이되신해이기도하다
그리고 공은 대사헌이 되시고 가을에는 공조참판에 옮겨서 동지경연에부총관을 겸임하셨고
서기1545년에 예조참판,을 거처서 서기1547년에는 자헌개(資憲階)에올라지중추 가 되셨고
서기1549년에묵재공이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마치신뒤에 지중추 로 나오셨다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되셨다
서기1552년에는 청백리 로 뽑혔으며 그해 구월에평안도관찰사로 나가셨고 서기1554년에 공조판서가되어동지경연
성균관,예문관,의제학(提學)을겸임하시고,서기 1555년에 예조판서로 옮겨서 지의금부도사 를 겸하셨고
서기1558년4월에우찬성을 제수받고 예조판서와세자이사(世子貳師)를 그대로 겸 하셨으며6월에는특명으로이조판서
11월에 좌찬성에 홍문관예문관의양대제학 이되시고 다른벼슬도 그대로가지고 계셨다
서기1559년에 벼슬을 모두 내어놓으시고 판돈령(判敦寧)만을 가지고 계시다가 서기1563년에 다시 예조판서로
문형(文衡)을맡으셨으며 서기1564년에 좌찬성에 서기1565년애는숭록계(崇祿階)에올라, 그해 겨울에 큰 흉년이들어
공은 진휼사(賑恤使)로 제수받고 전국을 돌아보시고,수많은 기아선상(饑餓線上)의백성을 구휼하시었다
서기1567년에 명종임금이 돌아가시자 어린상감인 선조(宣祖)가 왕통을계승하게되어 공은 원상이 되시어
정치의전행하시면서국리민복에 온힘을 기울이시고 정원(政院)을 지키면서 국기와사직을튼튼히 하셨다
서기1568년5월에 어필(御筆)로 우의정 을 받으시고 총제관(摠裁官)으로명종실록을 감독편찬하셨다
서기1569년에좌의정에 오르셨으나 분수에 지나친다고 사양하셨으나 상감은 허락하시지 아니하시고 잔치를
베풀어 주시니 공은 다시 몸에 병이 있다고 하시면서 사양하시어좌의정을 내어놓고 영중추(領中樞)로 옮기셨다
서기1574년4월4일에 공은 영의정으로 승진하셨다가 가을에 한사코 사양하시고 영추부 (領樞府)로옮기셨다
서기1575년가을에 다시영의정이 되시고 공은 다리에병이 있어 걸음걸이가 불편하므시로 상감은 내시(內侍)에게
명(命)하시어 임금님 앞에서도 항상 부축을 받고 다니시도록특별히명령을 내리시었다
이같은일은 전무후무 한일로서 아무리 국가에 큰공로 가 있다 하더라도 이같은 융숭한대우는할수가 없는데도
오직 공 만이 받으신것이다 그리하여 8차례나 상소를 올리어 영의정을 사양하시고 겨울에 다시좌의정으로 계시다가
상감은 다시영의정을 시켰다 그리하여 공은 세차례나수상(首相)에 올라 계시었다
그러나 공은 계속하여 열차례나 차(箚)를 올려 사양 하시어 서기1579년에영추부(領樞府) 로 바꾸게 윤허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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