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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4차 대전 청주 답산자료

어풍대08 2006. 9. 10. 08:45
 

현공풍수 24차 대전 청주 답산일정 (2006.09.17일)

 



1)송요년, 세영, 응서, 이창의 묘 : 대전시 동구 이사동

영의정 송준길의 선영(5대가 한곳에)을 보며 과연 명당은 어떤것인가 알아본다.

송요년(宋遙年)

1429(세종 11)∼1499(9운). 조선 전기의 문신. 송계사(繼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종흥의 딸이다.

1479년(성종 10)에 문과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옹원정에 특배되었다. 뒤에 상주·홍주목사로 나가 치적이 있었다. 예빈시정과 선산부사를 거쳐 군자감정에 배수되었다.

송응서(宋應瑞)

1530(중종 25)∼1608(6운).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세영(世英)의 아들이다.

성제원(成悌元)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천거에 의하여 순릉참봉 이 된 뒤 한성부참군·판관·중추부경력 등 내외 관직을 거쳐, 1606년 절충장군 부호군에 올랐다.

송이창(宋爾昌)

1561(명종 16)∼1627(7운).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군수 응서의 아들이며, 준길의 아버지이다. 어려서 신응시·김계휘에게 배우고 다시 이이·송익필·서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신령현감으로 재임중 칠서지옥(七庶之獄)주모의 한 사람인 서양갑의 처남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인 회덕에 돌아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

가계도 : 송유-송계사-송순년-여해-세량-귀수-응기-갑조-시열

                                                     세훈-남수-희원-국전-규렴 

                                 송요년-여집-세영-응서-이창-준길 


2)송유 선생묘 : 대전시 동구 판암동

쌍청당은 은진송씨의 대전 입향조로 은진송씨의 중흥조 이다.

쌍청당 송유의 묘는 판암동 산수골의 은진 송시 묘역에 위치한다.

봉분의 직경은 6m이고, 높이는 1.8m이며, 전면에 10m 정도 장대석을 놓았으며, 상석은 최근에 만든 것이다.

#송갑조(송시열의 父) 묘

 

3)민수, 민귀손 묘 :대전시 대덕구 삼정동

대명당으로 소문난 남양주의 보검 출갑을 차지한 인현왕후와 명성황후 선조들의 음택을 살펴보며 선조들의 음택은 어떠한가를 감결해 본다.

가계도 : 민충원-민수-귀손-(제인-사용-여건-기-광훈)-유중-인현왕후


4)순흥안씨묘 :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5)송귀수-청원군 문의면 문당리

송시열이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명당으로 소문난 송시열의 증조부 귀수의 묘를 감결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  옥녀직금으로 알려져있다.


6)청주한씨 시조 한란 묘-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산18

 청주 한씨는 세보(世譜)의 출발점을 기자조선(箕子朝鮮, B.C 115년)으로 적고 있다.  마한의 8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우평(友平), 우성(友誠), 우량(友諒)은 각각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귀의하여 우평은 북원 선우씨(北原 鮮于氏), 우성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우량은 청주 한씨(淸州 韓氏)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청주 한씨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선우씨, 기씨와는 한 핏줄이라 하여 서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청주 한씨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란은 우량의 32세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개국공신이다. 그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토란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의 청원군 남일면 방정리 속칭 대머리부락에 길지를 택점하여 기거하게 되었다. 마을 앞의 암석을 쪼아 방정(方井)파서 몸소 농사에 힘을 써서 누만석 거거부가 되어 이 일대의 호족(豪族)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침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러 행군할 때 청주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는 식량을 내어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사기를 충천시킨 다음, 스스로도 종군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 개국원훈 공신<개국공신고려삼중대광태위(開國功臣高麗三重大匡太尉)>이 되었다.

   현재 묘소는 본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지만 고려의 묘비와 상석 등이 현존하고, 효종 때의 문인석과 용마석이 보존되어 고려 초기 묘역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행하던 풍수지리의 특성도 이 묘에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손대대로 고관대작을 끊임없이 배출했으니 이 묘의 발복이라 후손들은 믿고 있다.

출처 : (사단법인)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청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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