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세 파조중랑장 휘 후공 인주도령 세습사적
공 의 관명은 중곤 태사 휘 은열공 의 이세후손 이요. 중랑장파 파조 이시다.
고려조 무신으로 옛 고구려 영토였던 인주의 도령이요 직함은 중랑장 으로서 인주일대를 수호 하고 외세침입을 방어 하는 요새지의 수령이다. 몽고세력의 완충지대에 속하였던 이 지역의 지배하는 수령을 도령이라 하였으며, 패권은 고려 왕조의 임명직이 아니었다. 고려사 절요 명종 26년 서기 1196년11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동11월 설팔관에 하고 왕칙북계제 도령 관락 할새 인주도령 중랑장 자충, 견, 판함문사 왕규, 장읍불베하야 유사핵주 무례하니 왕왈여빈동락총지야라. 이죄가호아 유사,재청윤지 하니 자충,초발, 제도령왈, 국가 소오배 하야 개유지, 의오입조 어늘 욕이미사로 시지여장죄하니 아,시, 조정유인부즉, 시외아야 로다.겨울 11월에 팔관회를 베풀고 왕이 인주도령을 위시하야 북계 제도령을 초청하여 팔관회에서 절을하지아니하고 읍만 올리는 것을 본 유사판함문사 왕규가 그 무례함을 탄핵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변방백성을 사랑하여 같이 즐기고저 한지라 어찌 허물을 묻겠는가 하니 유사가 다시 주청하여 윤허 하니 좌충 본주인주를 비롯하여 제도령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우리를 초대하였으니 다같이 그뜻에 따라 우리가 입조했는데 작은 일로서 우리를 시해하고자 하니 우리는 본시 조정의 사람이아닌 즉, 나에게 죄를주려하니 두려운 일이로다 하였으니 그들의 지위와 고려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즉, 그들은 고려조정의 사람임을 부정하였으며 오직 선린관계임을 은연중 부곽 시키고 있는것이다.따라서 요동과 고려와의 완충지대로서 어느정도 독립된 지배권을 향유하고있음이 명백하다. 다만 고려에서는 변방을 회유하기위한 책략으로 중랑장 벼슬을 제수하고 일정보수를 시해하여 변방직무에 방책을 삼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지역은 공의 현손인 휘 인공의 일이기까지 백삼십여년간을 세세 계승하여 인주에서 도령을 세습하였다. 삼세 휘 유기 공은 중윤으로 추봉삼중대광하고 인주도령을 하였으며 사세휘덕공은 중랑장 인주도령 으로서 명종4년 갑오 서기1174년에 반적강부를 역참하고 서경유수조위총의 난을 막았다.5세 휘 제선공은 검교비서에 중랑장 인주도령을하고 육세 휘 인공은 초휘, 대선 사작대순 고려정관은청광록대부상서좌복야 응양상장군 이시며 인주도령이었다. 고종18년 신묘 1231년에 몽고 살리탑을 총수로 인주를 침공해 오니 휘 인공은 인주도령으로서 몽고군을 공격하였으나 중과 부족으로 몽고군에게 패하였다. 고종18년 임진 고려조정은 몽고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항이 없이 스스로의 생존만 생각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여 당시 직권자 최우가 강화도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농민들에대한 가혹한 수탈로 민심을 잃었고, 고종20년 계사1233년에 평북 일대에서는 고려조정의 반기를들었다. 그이유를 인주도령의 위치에서 살펴볼때, 자기종족의 생존을 위하여 몽고와 타협하고 고려를 멀리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것이다. 몽고는 약30년동안에 여섯차례나 침입하여 고려가 입은 피해는 막심하여 20만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많은 문화채가 소실되었다. 고종 45년 무옥 서기1258년 고종이 태자전 원종을 몽고에 보내서 원에 항복하고 속국으로 전락한 후에 원나라에서는 고려를 다스리기 위하여 정동성사 및 고려군사를 평양에 주설하고 고려를 통치하였다 초대 정동성사 휘 인공의 장자 복원공이었다. 그후 복원공의 아들 다구공이 고려군사로 부임하여 고려를 강권통치하였으며 원종 15년 갑술 서기 1274년에 다구공은 여몽연합군을 지휘하여 왜를 침공하다가 폭풍으로 실패하고, 충렬왕 칠년 서기1281년에 제2차 일본정벌을 하였으나, 이번에는 태풍을 만나 참패하고[이태풍을 일본에서는 가미가제라고, 즉 신풍이라고 한다.] 원세조의 부름으로 원나라로 귀국하였다. 다구공의 아우 군상공은 형을따라 원나라에가서 원세조의 사랑으로 글을배우고 고려원종 칠년 병인 서기1266년에 고려인삼백호로 군단을 만들어 통과했다. 그후 원세조가 죽자 고려로 환국하여 고려의 많은 공을 세우니 충렬왕이 그의공을 가상히 여겨 삼중대광 익성후 첨의중찬 정승에 봉작하였다. 고려에서는 휘 군상공을 위하여 관향인 익주를 강령이라 개칭하고 강령부로 승격시켜 이후 중랑장파에서는 강령군이라는 군호가 조선 중기까지 세습 된 것 이다. 상고컨대, 우리 중랑장파는 12세기 이전부터 이일대를 지배하였던 호족으로 창성하여 13,14세기동안 원을 대신하여 고려를 통치하던 실세였음을 부인할수없다.
[강령부는 지금의 화성과 수원일대(남양일대)이다.]
-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