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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城府院君洪世恭諡狀(충헌공시장)

어풍대08 2020. 6. 20. 22:48

唐城府院君洪世恭諡狀(충헌공시장)

唐城府院君洪世恭諡狀(忠憲公諡狀).

통정대부(通政大夫)평안도조도사(平安道調度使) 贈 대광보국숭록대부 領議政 世子師 唐城府院君 洪公이 만력 戊戌(선조31년1598.7.3.)년에돌아가신지 甲후인155년뒤에(순조13년癸酉1813年) 公의9代孫 道根이 희순(金羲淳)에게와서 請하기를 先祖

의功積이 뛰어나셔서 나라에서 正1品의爵位룰 내렸으니 法이있는바와같이 마땅히 諡狀을請하는글을 태상(종묘의예의를맡은관서)께 올려주십시요.한다.

그래서 적기를 公의諱는世恭이요,

字는 仲安이며,號는鳳溪이고 本은唐城이다.

唐나라에서 東邦에오신8學士中의한분이시다.

諱吉旼께서우리太祖를도와서 南陽君에勳封되셨다.

아들인諱汝方도 이조판서에올라襲封南陽君하고 文良公이란시호를받으셨다.

그아들이諱元用으로 판돈령부사 江寧君하고 章簡公의시호를받으셨다.

3代를지나서 曾祖되시는諱繼福은永平縣令을지내시고 左通禮에追贈되셨다.

祖되시는諱俊卿은護軍으로 左承旨에追贈되셨다.

考이신諱俌는 永川郡守로 호조참판에추증되셨다.

江寧君으로부터 曾祖에서考의3代가追贈되어 加資됨은 公으로인해서參判公이의정부左贊成으로追贈되었기때문이다.

貞敬夫人에追贈되신 妣이신全州柳氏는內資寺判官이던 穀의따님이시다.

公은 어려서 영리하고 총명하였으며 망령된말이나 우스개소리를 하지않아 장래의 큰그릇됨이있었다.

중년에는 융경(隆慶명:목종의연호1567~1572)丁卯에(융경정묘:융경1년명종22년1567년)생원시에입격하고

(公의나이27歲때)

만력(萬曆:명나라신종의연호1573~1615)계유(癸酉:만력1년선조6년1573년)명경과급제(公의나이33歲때)하여

承文院正字에보임되었다가 전례에따라 典籍으로승서되었다.

사헌부감찰.지평.사간원정언. 호조와형조의좌랑과정랑을골고루역임하고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와서 黃海道都事와해운판관으로나갔다가 들어와서 成均館直講이되었다가 다시 승차되어 대동과 平壤庶尹에 제수되어 항상엄격하고 공명하게 다스려서 관민이 모두 존경 하며 또한 친애했다. 奉常寺의正으로 돌아왔다가 다시경상도 巡檢御使 로나가서 권세나 지위에흔들리지않고 재능의있음과없음을 규찰하여 州郡이엄숙해졋다.

통정대부로 품계가올라서 강계부사로 나갔다.

이듬해인 임진년에 왜구가 대거 쳐들어와서 우리 소경왕(昭敬王宣祖의시호)께서 서쪽으로가실때 鄭澈相公이강계의적소(죄인이유배되어있는곳)에있었는데 어가(御鴐)가개성에있으면서 앙자들을호종하라는 당부의명령이있자,鄭公이가려고하니까

公이 막으면서 "公의 이름이 아직도 죄인의명부에있고 아직 조회공문(闕文)도없이 미리출발한다는것은 不可합니다." 하자

임금이 평양에 이르러서들으시고는 사자를보내어서 궐문을보내왔다.

어려움에 임해서도 (전범을)지킴이 이와같았다.

鄭公이행재소(行在所)에가서 예알하고(禮謁:예궐하여배알함)호조참의로 천거하시니 부름을받아가서 동부승지로 이배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기고 命을받고 영변에갔다가 돌아와서 또 호조참의에 배명을받았다.

임금이말하기를 '이미 上國(명나라)에군대를요청해놓았으니 마땅히 미리(명나라군대에)물건을주어 규제할대책을강구하지않으면 안되갰소" 하며 임금이누가 적합하겠소?하고묻자,

左議政 尹公斗壽께서 公에 대하여임금께천거하니 公이 軍糧을관리하는 調度使에 拜命을받았다.

公은 命을받고 關西지방의여러고을을 순회하며 군대와 식량을모았다.

임금이양책관에서 명나라장수인 조총병과 사유격을 만난다기에公도 어가를 맞아 길좌측에서 배알하고 조도(調度)를위한 순행을떠나서 희천. 운천.박천.영변. 개천.의다섯고을에서 양곡을조달하여 安州에도착했다.

公이더위에 상해서 설사를하는 질환으로 7일간을 머물며 廟堂(廟堂:조정)에늦어진대 대하여 品階를낯춰주기를請하자 류성룡相公이말하기를바꿀수없다고 말하면서 軍糧을옮기는 것을 독촉하도록시켰다.

그후 복명(復命)을하고호조참의에서 다음날 平安道巡察使에제수되어 산성의파수보는곳을순시하고 또 맹산과영원 에서 試射를하고

여러고을을두루다니면서 병사들을모집하고 식량을조달했다.

계청(啓請)하여 都體察使와元帥등에게모은 재물과얻은쌀가콩이6천여석을나누어보냈다.

다음해에 평양이수복되자 나머지적들은 南道로 숨고가또기요마사(加藤淸正)는아직도關北을점거하고있어서 公에게 咸鏡道를순찰하도록 命해서 倡義한장수와병사들과 가로막은적을죽이며행군해가면서 公과 명나라장수 풍중영(馮仲纓)과 金湘등과 서로비밀리에임기응변으로 적을공격하여 적들이모두ㅡ도주해서 두장수와함께 關西로 돌아와서 復命을했다.

이때 임금이명나라李如松提督을만나려고 다행히 肅寧에있었다.

復命을하고關北으로다시돌아가서 굶주린 백성들을구휼하여 먹이고 편안하게 머물며 살도록 하고반대로 많은죄수들도 보살펴서살렸다.

본도(本道:咸鏡道)와 북쪽 오랑케땅과인접해 있어서 되놈 도적들이 자주침략해서 노략질피해를입기에 왜구가 물러갔다고 해도 느슨한방비는 불가하다고 계청을해서 병장기의수리가시급함을알렸다.

또 亂이나자 端川郡의수령인 姜燦은 의병군을 규합하여 많이참획한공로가있고,慶興의병졸인 金匡國은 되놈들의노략질에도屈하지않고 죽었다고 포상(褒賞)해 주도록 요청했다.

三水郡에서는노략질로잡혀간70여명을재물을주고쇄환해줄것을요청했으며 병마절도사들이래왕하면서 치례함을 도우는것을公務외에는私的인驛馬와기병을얻지못하도록 上奏해서 모두재가되었다.

전주부윤에제수되어 전란으로 모두쪼개진대다가 거듭되는흉년이 계속되자 진심으로 어루만지고 무마해서 백성들이 소생함을입었다.

本道의 按廉使가 公에게 嫌疑를두고 주워모으고져했으나얻지못할정도로다스려졌다.

이를임금께서 들으시고 本道의觀察使겸府尹으로 拜命을받았다.

이전의湖南方伯들은모두1년만에갈렸는데 이처럼 府尹을겸하고2년을연임함은特旨이다.

가을에 도 큰흉년이 들자 土賊(지방에서일어난반란도적)인 金希.李福.등과경상도의土賊 高波등이 서로 도와 여러번 관군이 敗했다.

回文山을근거지로 재화와부녀자들을노략질해서 날로 熾盛해지자 公은 비밀리에 關文을보내8개郡의병력을지휘하여 토적의목을베인것은 公의힘이었다.

體察使李元翼公과權慄公을 남원에서 만나일을계획했다.

을미년(선조28년1595년)에 중국조정에서 풍신수길을일본왕에봉하고 전쟁을그치자는 강화논의로황제 의사자 인 이종성과양뱡형 이사명을 받들공리본을가는길의 관활구역 끝까지 公이연도를순시하면서 돋구를갖추어 길을닦도록했다.

유정방도독이 남원에주둔해있고 두사신이 딸린人馬가數千이연5~6개월이나 머물고 사명을띈관리들을 맞이하고보내는데 번거롭게비용이많이들었다.

움직이는데 온갖 계책들을낸 수령들이 재물모을곳이없자 급기야 민간의집들을 멋대로뒤져서 마을이 계속소란하고 큰길의고을들은 가난한사람들을구휼하여안심시키는 일을감당하지못하고 서리들은 도망하여흩어지는사람들을 서로바라볼뿐이어서 公이조정에 稟申하여각사의노비를더지급받아서 領內의 各邑에나누어配屬시키니 큰길의 邑들에 말과인부와 비용을지불하여그힘을고르게했다.

조세를면제토록 請해서오랜 조세의무를진 백성들의부담을덜어주었다.

각사의奴婢들의身貢인綿布를쌀로대신납부하도록바꾸어서 그힘을느긋하게했다.

湖南은水耕(수경)이많아서 이양과 김매기 때를 미치지못하여흉년을초래하자 公이 백성들께 먼저가르치기를 십대의대오를갖춰서 양쪽에깃발을세우고 북을치며 노래하며 권장하자백성들이서로興이나서하니 지금도 경작하는 효과가있다.

體察使가함양에머물때면 公이왕래하면서묻고 계획하여 방어관문을설치해 수비를엄중히하며 섬진강과팔량.61치,등지에모두장수를뽑아 배치시켜 지키게하고 담양과김제 에主鎭을두었다.

무력으로 일을처리하는 土豪는법률로다스리고,소임을이기지못하는 수령을파직시키니 武威와德化가함께 한길로 흘러서 맑아지고숙연해졌다.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와서 右承旨가되었다가 또 平安道調度使에제수되었다.

이때에는 兩西(황해도와평안도)지방및근기지방에 항벅한왜적들이교만하고횡포를부리며 여럿이 한곳에모여있으면서노략질을해서 도로가 단절된때인대도 公은命을받자 단기(單騎)로치달려 나아가 여러번위태로움을겪으면서 治所에도착했다.

정유년에(丁酉:선조30년1597)오ㅑㅐ가 다시창탈해오자 명나라조정에서 또 토벌하려고 출병했다.

조정에서는 關西의모든일을 公에게위임해서 糧穀을 모아서 군량을 수송하는일을 맡아다스렸다.

양곡을모아취하는일을 우선적으로해서 힘써 모자라지않도록하고 기근을 구휼하고 농사를짖게해 모든조치를 시행하는데 心力을다했다.

그리하여 등창병이생겨서 安州에서 享年58歲로돌아가셨다.

부음을들은 임금께서 심히 애도하시며 애통해하셨다.

모월모일 장단의 판부리서쪽언덕에庚坐甲向에장사지냈다.

조정에서는心力을다해 王命의일로奉公하다가죽은데대해 吏曹參判으로 追贈했다가정미(선조40년정미1607)에 호성선무1등공신으로책록하고 判書로追贈했다가左贊成으로추증하고,또 領議政 世子師 唐城府院君 으로追贈했다.

公의타고난 天性은굳세고 바르며 정직했으며 평소에 居하면서 빠른말투나 당황한얼굴빛을 보이지않으며 가정안에서라도 게을러 빠진 모양을볼수가 없었다.

남의착한것을들으면 옳음을 빌려서라도 미치지못한것처럼하고,善하지않은것이있으면 또한 조금의용서도없이 엄하게 자기자신을법도로 단속해서 보는법도기준대로했다.

세력을따르지않고 낮추었다가높였다가하는 바가 있으면 먹은것을 토했다.

이렇게함이 全州府尹일때李廷馣公이全羅監司로있어 公이 매일冠帶를하고 禮를갖추어 보기를 조금도게으름을보이지않자 李公이 그만두게 했지만 公은변함없이했다.

그러다가 公이監司가되고李公이府尹이되어(직위가서로바뀐적이있다)李公의禮貌가 다소해이해지면 문듣그태만을경책하니 李公이 감탄하여말하기를公이엄하게 禮를잡음에나는 미치지못하겠다 라고했다.

公은 政務에임해서는 청렴하고 자기를규약함에는 엄격히 해서 법도 아래서 국사 봄이 가사를돌보듯이하고 시비를반드시 분변해서 나라의이익이 있게하고 백성들에게 편리하도록함을 좋아흐는듯했다.

임진왜란으로(龍蛇之亂)종사가 거의 위태로운 7년동안 임금이 거느리는 군사로 3번이나 나갔으며公이처음으로 조도사(調度使)가되었을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신으로써 다만 나라를위해 이직책으로 죽을것이다."라고 하고 命을듣는즉시 가니 柳成龍政丞이누누이칭송하며 기렸다.

關北을순행하면서멀리떨어진 인적미답의산끝까지 몸소 가보지않은곳이없어서 무릇 국경수비의緩急,軍兵의많고적음 기계의예리함과둔함,읍길 리수,의멀고가까움,토지의개간함과안함,등 모두를닥치는 대로 차제에기록하여 마치손바닥을보듯이하였다.

湖南에서府尹이나方伯을하면서 백성들의이익과손해를따져해서 고을백성들이두루알아서 이를칭송하고있다.

李廷馣公이詩를지어서傳送하기를

鈞情趙茼人爭服:감정구부리는조통에감복하고)

照謄奏銅鬼亦驚:심중비춘 진동은귀신도놀라네)

라고했다.

아아!!

옛사람에대하여 사람들이 비록같은 또래와사람들이좋아하며 더불어 중히 공경하며 받들며 公에대ㅎ해 한마디 말도 경솔하고 소홀히 할수없는지금에 이와같은 것들로써 公의사람됨을알수가있다.

배필은高靈朴氏로壽春의따님이신데 임지왜란때 함흥산중으로 갔다가 왜적을만나자 屈하지않고 적을꾸짖다가죽어서 그자리에 거적을싸서 假葬했다가 조정의命으로 갖추어장사지내고 뒤에公과함께장사지냈다.

여러번추증되어 정경부인에이르렀으며宣祖께서참죽나무판자의문설주에 御筆로써 旌閭했다.

아아!!!

公의진심이서 우러나온 충성스런 계략은 어찌 족히 나라를도왔다고하지않을쏜가?

오히려근본삼음을 구제하다가 불행하게도 어려움을혜아려 命을받고 전쟁터 속에서 힘을서로합하고 높고 마른땅과 낮고습한땅 사이에서 마음을수고롭게 고생하다가 그生이떨어져서 마쳤으니 難은 평정한 여러신하들과 훗날 兵器를녹이고 화살촉을 꺾는평화시에 조정에서 예복을입고 심오한이치나 소양을말하고 즐기며 부귀를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 어찌 그命이랴?

그래서 왕실에서 고마음을 갚으려고 功臣과그先祖에게封爵과名號를내리는榮典을한번돌아보니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제일 으뜸가는 功臣들은 가지런히 기린각에걸린많은賢人들이네.

아아!! 그盛함이여!

이는마땅히 빨리논의해서 크고 아름다운 훌륭한 시호로 그생전에 다하지못한 임금의은덕으로 지금 그후사가미미하고 나타나지않아서 다하여 없어져 뜻을 받들도록시키지않으면 요즘사람들은公의 忠의노고를 다시알지못힐것이니 이것이 세상에 있는公論이라말할수있겠는가?

재주없이 어리석고 비루함도 혜아리지 못하고문득 故 洗馬李光庭이지은 公의行狀과아울러관장한바를상고하여 채록하고 그집에서믿을만한기록을한두가지묶어서 諡狀을지었으니 종묘의예의를맡아보는관리가 上考하리라 믿는다.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同知 經筵事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원임(原任)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金羲淳은삼가짖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