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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민 장달수선생의조모님이야기

어풍대08 2019. 5. 28. 00:32

조용헌 살롱] [1195] 장달수 할머니의 일생.

내가 어줍잖은 컴퓨터실력으로 집안자료를얻고검색을할때 많은자료를제공해주신어른이바로 낙민선생이시다.

 

구독하던조선일보 칼럼에 낙민선생의이야기가 있어서 휘리릭 빌려왔다.ㅎㅎ

 

 

 

영남 사대부 집안 후손들의 특징이 직장 퇴직 후에 한문과 보학(譜學) 공부에 열심이라는 점이다.

 

직장 다닐 때는 먹고산다고 공부를 못 하다가 퇴직하고 난 다음에는 청소년 시절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유림사회(儒林社會)에 대한 이야기들을 추적하게 되는 것이다.

 

70대가 되면 일가견을 갖게 된다.

 

서울 인사동에서 이런 인물 2~3명과 만나면 점심때 만나 밤 10시까지 이런 주제들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호남 출신인 나에게는 문화인류학적인 인터뷰에 해당한다.

 

증권회사 다니다가 퇴직한 장달수(72)는 여헌 장현광의 15대손인데, 보학과 묘비명, 양반 집안의 생활사에 훤하다.

 

장달수의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히다.

 

할머니는 남자 이름 같은 김병기(金炳基·1901~1995).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심산 김창숙의 따님이다.

 

친정아버지가 독립운동하니까 왜정 때 핍박이 심했다.

 

"너희 나라는 남의 집 안방에 들어올 때 신발 신고 들어오느냐"고 큰소리로 외치다가 일본 순사한테 구둣발로 허리를 얻어 차여서 평생 허리가 아팠다.

 

친정 남동생 환기(煥基)는 독립운동하다가 대구 감옥에서 죽었다.

 

동생 찬기(燦基)도 독립운동하다가 중국 중경에서 죽었다.

 

해방 후에 백범 선생이 유골을 메고 왔다.

 

아들 장경익(張慶翼)은 와세다대를 나와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 사형당할 뻔했다.

 

이때가 1946년. 할머니 남편이 장세형이었는데, 장세형이 당시 집안 간이고 수도경찰청장을 하던 장택상을 찾아갔다.

 

"당신 할배가 우리 집에서 공부했는데, 내 아들을 죽일 작정이오?"

 

장택상의 조부 장석용(張錫龍)은 대과 급제하여 형조판서를 지냈다.

 

장석용에게 공부를 가르쳐준 인물이 장석이(張錫頣)였다.

 

장석이는 경주 최 부잣집 따님과 결혼하였고,

 

이 최 부잣집 따님이 시집올 때 가져온 상당한 돈으로 동천학당(東泉學堂)을 고향인 경북 인동(仁同)에다 열었다.

 

동천학당에서 공부하여 대과 급제한 장석용이 장택상의 할배가 된다.

 

장석이는 장세형의 고조부에 해당한다.

 

결국 장경익은 장택상의 도움으로 '전향서'를 쓰고 살아 나왔다.

 

할머니의 작은아들 장상익(張尙翼)은 국방경비대에 있다가 6·25 때 전사하였다.

 

심산 김창숙이 이승만에게 밀려 1955년에 경북 영주에서 살던 딸네 집에 피신해 있었다.

 

심산을 만나러 각지에서 손님들이 밀려드니까 그 접대 비용을 대기 위하여 대원군이 그려주고 간 석파란 병풍을 2개 팔아서 쌀값을 댔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가 이렇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26/20190526022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