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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재령이씨족보 경술보서문(族譜新刊序)

어풍대08 2018. 2. 19. 22:11

 

족보신간서(국역)

  아! 이것은 우리 이씨의 세본(世本)이며 족지(族志 씨족에 관한 기록)이다.  우리 이씨는 월성(月城)에서 계통이 갈려나와서 재령(載寧)으로 본관을 옮겼다.  재령이씨의 종족은 번성하고도 위대해서 이름난 고관과 휼륭한 인물이 우뚝하게 대대로 배출되어 월성이씨와 함께 동방의 저명한 성이 되었으니 사승(史乘)에서 고증하면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족보가 없었고 다만 가장(家藏)의 사록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우리 선조 운악(雲嶽)·석계(石溪) 부군께서 채택하여 수집하셨고, 태재부군(太宰府君)께서 수윤(修潤)하여 증감(增減)하셨다.  운악·석계·태재부군 3대를 거쳐 종선조(從先祖) 밀암(密菴)선생이 비로소 완보(完譜)를 이룩하셨으니 현재 인출 유행[印行]하는 병신보(丙申譜)가 이것이다. 매양 이 족보를 봉람(奉覽)할 적마다 그 고거(考據)의 정박(精博)함과 법례(法例)의 근엄(謹嚴)함이 이미 사가(史家)의 편년계통(編年系統)의 규식을 얻었고, 세대의 차례와 항렬(行列)의 순서가 손바닥을 가리키듯 환하니 참으로 백 대 뒤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하지 않는다는 휼륭한 책이라 할 만하다.
 다만, 그 연대가 점차 멀어지고 세고(世故)가 여러번 변해서 지금으로부터 1백 20년의 사이에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있는 대소의 후손들이 몇 개파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더러는 유리(流離)하기도 하고 더러는 끊어져 버리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소원해지기도 하고 더러는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여, 소식을 빙거(憑據)할 수 없고 조문이나 경사에도 서로 왕래하지 아니하여 막연히 길가는 사람처럼 남남이 되어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만 갈래를 모아 한 근본이 되게 하는 뜻이겠는가.  요즘, 원근의 제종(諸宗)이 의논을 모아, 말하기를 "옛날 사도(司徒)가 구족(九族)·외친(外親)과 친목하게 지내는 것으로써 규집영솔(糾集領率)한 가르침을 오늘날에 다시 볼 수는 없으나, 세계(世系)를 나타내고 소목(昭穆)을 밝히며 인심을 관섭(管攝)하는 것은 오직 이 족보를 편수하는 한가지 일에 있을 뿐이다.  하물며 구보(舊譜)가 간행된 지 두 갑자(甲子 1백 20년)가 되는 해를 당하여 더욱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음에랴! 지금 이 시기를 놓쳐 버리고 도모하지 아니하면 그 세대가 더욱 멀어짐에 따라 더욱 고증할 데가 없어지는 데에야 어찌하랴."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에 가첩(家牒)을 가지고 천리 먼길을 온 자가 십여 인이었다.  양운산(兩雲山) 속에 모여 수개월의 공력을 들여 대조 교감하고 참정(參訂)하여 그 번잡하고 너절한 것을 삭제하고 빠진 것을 보충하여 유별로 편집하고 차례대로 기록하여 대략 두서를 잡아 이룩하였다.
 대체로 중세(中世) 이상의 자세하고 간략함이 같지 아니한 것을 그대로 두고 감히 다시 논하지 못한 것은 선조의 뜻을 따른 것이고, 생졸(生卒)과 묘위(墓位)에 있어서의 모년(某年)·모소(某所)를 쓴 것은 훗일의 고증을 위한 것이고, 배실(配室)에 있어서의 아무의 후손이라고 자세히 밝힌 것과 외성(外姓)에 있어서의 아무 관향(貫鄕)이라고 기록한 것은 사족(士族)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구보(舊譜)에는 빠졌으나 신보(新譜)에 들기를 원하는 자에 이르러서는 그 유래한 바를 자세히 살펴 조사해서 애써 따른 것은 동종(同宗)을 중히 여긴 것이다. 판각(板刻)의 공역(工役)을 장차 시작하려 하는데 연말이 홀연히 닥쳤고 또한 이어서 문중의 화(禍)가 더욱 심해져서 미처 이 일에 대해 의논할 겨를이 없은 지가 10여년이나 되었다. 지난해 봄에 강우(江右 경남)의 종중(宗中)에서 다시 족보 간행에 관한 전의 논의를 거듭 밝히는데 말뜻이 정중하였다.  비록 나같은 어둡고 어리석고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도타이 권면하는 책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드디어 두셋 노성(老成)들과 전의 기록을 정리하여 일통보(一統譜)를 합성(合成)하니 모두 약간권이 되었다.
 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아서 합하는 것은 장차 나아갈 조짐이고 흩어지는 것은 물러가기 쉬운 징후이다." 하였다. 지금 이 일도 이미 모아서 합하였으니 또한 그 우리 종족이 다시 나아갈 조짐인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종족을 수합하는 의리를 알고자 할진대 마땅히 종족을 수합하는 근본을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몸으로 천만 사람의 몸으로 나뉘었다.  천만 사람의 몸으로 그 시조의 처지에서 보면 한 사람의 자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기[一氣]가 서로 연접하여 소원한 차이가 없으니 이것은 마치 물이 파류(派流)가 있으나 동일한 근원임과 같고 마치 나무가 가지와 잎이 있으나 동일한 뿌리임과 같다. 그러므로 군자가 종족을 취합할 적에 반드시 조상을 높이고 종통(宗統)을 공경하여 근본을 도타이하고 인륜을 독실히 하였으며, 친소(親疎)나 내외(內外)로써 그 마음을 달리하지 않았다. 대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천성의 참다움을 조전할 수 없고 효도·공경하는 점이 뭉클 생겨날 길이 없는 것이다.
 원하건대, 우리 종족은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더욱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실행에 힘써서 비록 다른 고을, 다른 마을의 먼 곳에 있더라도 모두 같은 당(堂), 같은 자리의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여겨서, 조선(祖先)의 끼친 음덕(蔭德)을 사모하고 후손의 계승 전술(傳述)을 생각하여, 학문은 날로 더욱 힘쓰고 행은 날로 더욱 닦아서 근본이 확립되어 도(道)가 생기고, 덕이 후하여 풍속이 이루지게 할 지어다.  그렇게 하면 천도(天道)는 위에서 응하고 인사(人事)는 아래에서 화협(和協)하여 장차 근원이 멀어서 흘러감이 장원(長遠)하고 뿌리가 깊어서 잎이 무성함을 보게 될 것이다. 제종(諸宗)들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아니하랴.
 족보 간행의 일을 마치자, 제군들이 나에게 그 뒤에 기록하기를 요구한다.  내가 생각컨대, 우리 이씨가 지금의 관향(貫鄕)으로 된 사실과 이 족보의 창시한 유래는 석계(石溪)·밀암(密菴) 두 할아버지의 서문에 이미 다 말하였으나, 하찮은 후손이 다시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한마디 말인들 덧붙이겠는가.  그러나 상해(桑海)가 변천하고 세도(世道)가 쇠락(衰落)하였으나 타고난 천성과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니 성기(聲氣)의 융함은 멀고 가까움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이 1백여 년 동안 가급이 없던 일을 가문이 쇠체하고 재물이 피페한 오늘날에 변통해 만들어 각자가 마음을 다해 성취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가상함 직하고 기록함 직한 일이다. 그러므로 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그 전말을 위와 같이 대강 서술한다.

  숭정(崇禎)병자 뒤 2백 15년 경술(1850년) 청명절(淸明節)에 증판서공 7세손 상규(相奎)는 삼가 쓴다.

         (국역자 : 전 문화재전문위원 李廷燮 宗親, 載寧李氏宗報 第29號)

 

 

 

출처 : 載寧李家의 족보이야기
글쓴이 : 秉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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