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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不遷位] 온계 이해

어풍대08 2017. 11. 2. 12:51


온계(溫溪) 이해

[不遷位 기행 52]

[출처] 영남일보 2012-06-13 김봉규 기자

죽음과 바꾼 선비의 , 과연 퇴계의 형답다

을사사화때 죄 뒤집어써, 혹독한 고문에도 심지 굽히지 않아, 결국 귀양길서 숨져

형의 죽음 본 퇴계, 훗날 후학양성 온정성

 

영남 유생 300여명이 온계(溫溪) 이해(1496~1550)에게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나라에 청했고, 그에 따라 시장(諡狀)이 작성됐다. 시장에 담겨 있는 내용 중 일부다.

 

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었다. 남과 더불어 말을 할 때는 온화하고 정성스러워 사납거나 거만한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옳고() 그름(), 나아감()과 물러남(退) 등을 논의할 때는 남달리 두드러지고 꼿꼿한 면이 있었다. 일찍이 화복(禍福)과 이해(利害)를 비교해서 남보다 앞서 나가거나 뒤로 물러나 숨는 일이 없었다. 군자들은 이러한 점 때문에 그를 흠모하고 사랑했으나, 소인들은 이러한 점 때문에 그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이 시장의 내용을 검토해 1784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니 정민(貞愍)’이다. 의미는 절조를 지키고 청렴하니 정이요(守節淸白曰貞), 백성들로 하여금 슬프게 하였으니 민이다(使民悲傷曰愍)’라는 의미다. 백성을 슬프게 했다는 것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실을 의미하는 듯하다.

 

온계는 이런 사람이었다. 부당한 일을 외면하지 않고 선비가 가야 할 길을 올곧게 갔다. 그래서 잘못된 권력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유배를 가는 도중에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런 온계는 그의 아우인 퇴계(退溪) 이황과 비교되기도 한다.

 

올곧은 언행으로 집권세력에 밀려 귀양가다 별세

 

1545년의 을사사화는 그 여진이 5년 가까이 계속됐다. 번암(樊巖) 채제공은 당시의 일을 명종이 나이가 어렸을 때인데 역신(賊臣) 이기()와 윤원형(尹元衡)이 얽어서 선동하고 옭아 넣어서 단아한 사람과 정직한 선비로 그 그물에 옭아들지 않은 자가 드물었다. 이러한 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고 표현했다.

 

1544년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된 온계는 이듬해 정월 윤원형의 심복인 이기가 우상(右相)으로 임명되자 사간원 헌납(獻納)인 이치(李致)와 더불어 양사가 함께 나서 탄핵,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기는 자신을 탄핵한 주동자가 이해와 이치인 것으로 보고 앙심을 품게 되었다. 이는 을사사화의 근원이 되고, 온계의 앞날을 불행으로 이끄는 원인이 된다.

  * 양사 : 사헌부와 사간원

 

온계는 1550년 결국 그들에 의해 죄를 뒤집어 쓰고 사지에 몰리게 된다. 이기가 주동이 되어 억지로 역적으로 몰아 이치와 함께 금부에 하옥시켰다. 이에 앞서 신임 대사헌이 온계를 만나보고자 했다. 주위 사람들이 온계에게 그를 만나 보고 화를 면할 수 있도록 권했다. 하지만 온계는 나는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하물며 나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대사헌에게 있지 않은데 그 집 문간에 가서 애걸하는 것은 비루할 뿐이라며 거절했다.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온 집안 사람이 놀라 울부짖었으나 온계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으면서 경동하지 마라. 나는 일찍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의금부에 가서 왕명을 기다리는데 친구들이 와서 위문(慰問)하자 화를 더 무겁게 하지 마라며 만류했다.

 

양사에서는 온계가 형장(刑杖)이 가벼워 자복하지 않는다며 형벌을 더하기를 잇따라 청했다. 그리고 공술서(供述書)를 억지로 갖추어서 서명하도록 협박하자 모르는 사실인데 어찌 거짓 자복할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다.

 

이치가 마침내 형장 아래에서 죽게 되고, 추관(推官)이 온계에게 형을 더 가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사형을 감해 갑산(甲山)에 유배를 보내도록 특명을 내렸다.

 

옥에 갇혀 있는 8일 동안 위태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온계가 옥에서 나오자 정신과 기색이 평소와 별 다름이 없어 보는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온계는 처음 신문할 때 심신(心神)이 산란함을 느꼈으나 곧 지기(志氣)를 굳게 정했더니 독한 형장도 고통스럽지 않고, 마지막 형장을 맞을 때는 마음이 새벽 해 같았다고 말했다.

 

귀양 길을 떠날 채비를 하면서 집안을 살펴보니 남아있는 쌀 두어 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귀양 길에 올라 양주에 이르렀을 때 병이 심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결국 별세했다.

 

뛰어난 자질로 동생 퇴계와 함께 금곤옥제로 불려

 

안동 도산면 온혜리에서 노송정종택 태실에서 태어나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고아가 된 온계는 8세 때 아우 퇴계와 함께 숙부 송재(松齋) 이우의 각별한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의 기초를 닦는다. 6형제 중 온계와 퇴계는 특히 자질이 뛰어나 칭찬에 인색한 숙부로부터도 종종 우리 형님에게 이 두 아이가 있으니 형님은 죽지 않은 것이라고 칭찬하며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형제는 어릴 때부터 금곤옥제(金昆玉弟)’ ‘금곤옥계(金昆玉季)’라 불리며 주위로부터 촉망을 받았다. 곤제(昆弟)나 곤계(昆季)는 형제를 뜻한다.

 

온계는 152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8년 문과에 급제, 권지승문원정자로 벼슬길에 올랐다. 관직생활을 시작하고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542년 경상도 진휼어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삼도(三道)에 기근이 크게 들어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임금이 유능한 적임자를 선발해 구제하도록 했다. 온계가 그 중 한 사람으로 발탁돼 영남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온계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기민 구제에 지혜와 열성을 다해 수많은 백성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깊숙한 골목과 궁벽한 곳이라도 찾아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나는 길에 평소 가보고 싶었던 명산과 절경이 있어도 탐방할 겨를이 없었다. 거쳐가는 고을에서 간혹 맞이해서 유람을 청하면 백성을 구하는 일이 나에게 달려있고 굶어죽은 송장을 직접 보고는 유람할 마음이 진실로 없다며 사양했다. 백성들은 이런 온계를 자애로운 부모처럼 우러러 보았다.

 

임무를 마치고 복명하자 임금이 고마워하며 통정대부 벼슬로 승진시켰다. 이후 1543년 도승지로 승진하고 다음해 사헌부 대사헌으로 근무할 때 우상(右相)이 된 이기를 탄핵,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이기와 윤원형에 의해 사지로 몰려 죽게 된다. 1567년 관작이 회복되고, 1691년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 수양하려던 꿈 못 이뤄

 

퇴계는 온계의 묘지명에서 공은 조정 벼슬을 하고 몸가짐에 있어, 자신의 도리를 지키기에 힘쓰며 시론(時論)에 따르거나 권세에 아부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평생 남을 해쳐서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남의 급함을 구제하는 데는 반드시 최선을 다했다고 평했다.

 

온계는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2품에 이르렀으니 포의(布衣)로 영광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즐거움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벼슬생활을 할 때 퇴계가 온계 집을 찾아가서 함께 청산을 기약한다라는 시를 두고 가자 온계는 돌아가서 휴양하기를 서로 기대한다고 답했다. 이처럼 온계는 동생 퇴계와 함께 벼슬에서 물러나 수양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온계는 서울에 있으면서(1533) 남산 밑 한적한 곳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 ‘취미(翠微)’라는 현판을 걸고 조정에 물러나오면 항상 문을 닫고 그 집에 있으니 사람들은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의 집인 줄 몰랐다. 비록 벼슬살이로 외지에 있으면서도 항상 돌아갈 것을 생각했던 그가 변을 당하지 않고 퇴계와 함께 고향에서 살려던 원을 이루어 산수에 고요히 머물며 학문을 토론하고 제자를 기르며 살았더라면 하남부자(河南夫子)의 집으로 불렸을 것이다.

   * 하남부자(河南夫子) : 송나라 정명도정이천 형제

 

퇴계는 온계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변을 당한 것을 슬퍼하여 온계 별세 후부터는 더욱 벼슬길에 뜻이 없어지고,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후인들은 그래서 온계가 퇴계의 올바른 학문을 계발(啓發)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번암 채제공은 온계 신도비명에서 임금을 섬기면서 충절을 다하고, 다시 처음 옷(初衣)을 찾아 주정(主靜)하는 공부를 궁구했더라면 하남 양정씨(兩程氏)라는 아름다운 일컬음이 옛날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온계가 귀향의 뜻을 실현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다.

   * 처음 옷(初衣) :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

   * 양정씨(兩程氏) : 정명도정이천

 

이해 약력

 

1496년 안동 출생

1503년 숙부에게 수학

1528년 문과 급제, 권지승문원정자

1542년 경상도 진휼어사

1547년 황해도 관찰사

1550년 갑산으로 유배가다 별세

1567년 관작 회복

삼봉서원(1654)청계서원(1667) 위판 봉안

1691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증직

1784년 시호 정민(貞愍)’

 

온계 불천위이야기

抗日의 상징이던 온계종택, 1896년 일본에 의해 방화되는 수난 겪어

 

온계도 그 후손의 4대 봉사(奉祀)가 끝나면서 바로 불천위에 오른 것으로 온계 17세 종손 이목씨(1949년생)는 보고 있다.

 

불천위 제사(기일은 음력 814)는 지난해 5월 복원 낙성식을 가진 온계종택 별당 대청에서 자시에 지낸다. 별당의 당호이자 온계종택의 별칭이기도 한 삼백당(三栢堂)은 온계 손자인 이유도의 호다.

   * 온계종택 :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온계 종가는 1896년 종택이 일본에 의해 불탄 후 종택이 없는 상황에서 그동안 불천위 제사를 모시느라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서울에서 살았던 종손은 재실에 사당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야 했다. 온계종택은 18967월 온계 12세 종손 이의화의 동생으로 예안 의병장인 이인화의 항일 의병활동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한 방화로 소실되었다. 다행히 사당은 피해를 면했다. 덕분에 사당에 봉안돼 있던 불천위 내외 신주도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종손의 배려로 온계 부인 신주의 뒷면부(後身)의 안쪽(전신후신이 합쳐져 있는 신주를 분리하지 않으면 볼 수 없음)을 볼 수 있었는데, 보기 드물게 부인의 이름(淑貞)이 적혀 있었다. 전체 내용은 고 정부인 김씨 휘 숙정 신주(故 貞夫人金氏諱淑貞神主)’이다.

 

100여년 동안 제대로 된 종택도 없이 지내다가 국비와 지자체 예산, 자부담 등 14억원을 들여 지난해에 종택 복원 후 모신 첫 불천위 제사에는 50~60명의 제관이 참석했다. 그 전에는 분정(소임 정하는 일)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관도 적었다. 종손은 향후 불천위 제사는 가양주를 담가 제주로 사용하는 등 제사를 더욱 정성들여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영남일보 2012-06-13 김봉규 기자

 


출처 : 용형호제(容亨互悌)
글쓴이 : 同伊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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