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 문과동방록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 문과동방록
해제 : 인동 장달수
왕대년 중종(中宗) 9
시험일 1514년 09월 18일
합격자발표일 1514년 09월 18일
시험종류 별시(別試)
시험명 갑술9년별시방(甲戌九年別試榜)
시험장소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문과장원 장원급제 : 박세희(朴世熹)
합격인원 : 21명
무과장원 장원급제 : 원팽로(元彭老)
합격인원 : 21명
시험실시이유 별시이다.
박세희(朴世熹) 1491(성종 22)∼?. 갑과(甲科) 1[壯元]위(1/21)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
안의(安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미창(美昌)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화(士華)이며, 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515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같은 해에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1517년에 정언에 임명된 후 이조좌랑·충청도도사·장령·홍문관응교를 역임하고, 1519년에 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처음에는 상주로 유배되었으나 다시 강계(江界)에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젊어서부터 조광조와 종유(從遊)하였으며, 김식(金湜)·김정(金淨)·김구(金絿) 등과 늘 교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황사우(黃士祐) 1486(성종 17)∼1536(중종 31). 갑과(甲科) 2[亞元]위(2/2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국보(國寶), 호는 용헌(慵軒). 사우(士佑)라고도 한다.
풍기 출신
영일현감 전(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봉예랑 귀경(貴卿)이고, 아버지는 희성(希聖)이며, 어머니는 진유경(秦有經)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고, 1514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1520년 지평이 되고, 그 뒤 문학·헌납·보덕·응교 등을 거쳐, 1529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부제학을 지내고, 1532년 한성부우윤·대사헌이 되었다.
1534년에는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우찬성에 올랐다.
정응(鄭譍) 1490(성종 21)∼1522(중종17). 을과(乙科) 1[探花郞]위(3/2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응지(譍之), 호는 소우당(素愚堂). 효경(孝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穗)이고, 아버지는 돈녕부정 인후(仁厚)이다. 어머니는 최순(崔洵)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1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에 초수(初授)되었다. 1516년 김정(金淨)·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전경·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재임 중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혁파 등 구제(舊制)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에 승보(陞補)되었고, 사간원정언으로 대사헌 이행(李荇)을 탄핵하여 면직하게 하였다.
그 뒤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518년 지평으로 전보되었는데, 이 때 훈구파로부터 조광조(趙光祖)를 영수로 하는 사림파로 지목되어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는 성리학의 이론서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인물로 추천되었다.
그 뒤 헌납을 거쳐 1519년 이조정랑을 역임한 뒤 홍문관응교를 거쳐, 전한 겸 예문관응교로 발탁되었다. 그 해 겨울 훈구파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주청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에 연루되어 부여로 유배당했고, 1522년 적소에서 33세로 죽었다.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로부터 크게 쓰일 인물로 촉망을 받았다. 기묘사화 이전의 개혁정치 시기에 사림파로서 전통적 명분의 회복, 새로운 통치 질서의 수립 등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박수량(朴守良) 1491(성종 22)∼1554(명종 9). 을과(乙科) 2위(4/21)
본관은 태인(泰仁). 자는 군수(君遂). 전라남도 장성 출신.
문아(文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손(賢孫)이고, 아버지는 종원(宗元)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김개(金漑)의 문인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 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광주향교(廣州鄕校)의 훈도로 취임했다가, 다음 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옮겼다. 이어 전적(典籍)·예조좌랑·정언(正言)·충청도도사 등을 거쳐, 1522년에 지평(持平)이 되었다.
1525년 양친을 봉양하기 위해서 고부군수로 나갔다. 1528년에 부친상을 치르고 이어 헌납(獻納)·장령(掌令),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1531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사성(司成)을 사퇴하고 보성군수로 나갔다가, 이듬 해 사예(司藝)가 되었다. 이어 사성·내섬시정(內贍寺正)·군기시정(軍器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1534년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지방 관서를 순시하던 중, 안원보(安原堡)·권관(權管)·전주남(全周男)이 야인들에게 임의로 우마(牛馬)를 준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되었다. 1536년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을 역임하고, 이어 통정대부로 승진해 병조참지·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수찬관(修撰官)을 지내고 좌승지로 옮겼다. 이어 가선대부로 승진해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나주목사로 기용되어 찰리사(察理使)를 겸했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였다. 1537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이어 한성부판윤·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또 어머니 봉양을 위해서 담양부사로 나갔다가 1542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다가 1546년(명종 1)에 다시 상호군(上護軍)에 나아가 곧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자헌대부로 승진해 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50년 우참찬에 임명되어 지경연의금춘추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이듬 해에는 경기도관찰사를 겸임했고 숭록대부로 올랐다. 1552년에 우참찬을 비롯, 호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554년에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주세붕(周世鵬)과의 교유가 깊었으며 사람됨이 간중신밀(簡重愼密 : 곧으면서 신중함)하고 예법을 잘 지키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30여 년의 관리 생활에서도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해 청백리에 뽑혔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황효헌(黃孝獻) 1491(성종 22)∼1532(중종 27). 을과(乙科) 3위(5/21)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숙공(叔貢), 호는 축옹(蓄翁)·현옹(玄翁)·신재(愼齋).
한성 출신. 영의정 희(喜)의 현손이며, 보신(保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형(從兄)이고, 아버지는 부사 관(灌)이며, 어머니는 집의(執義) 강미수(姜眉壽)의 딸이다.
진사로서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홍문관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26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성과 황해도관찰사, 1528년 이조참의, 그리고 이조참판에 올라 1530년이행(李荇) 등과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32년 안동부사로 외보(外補)되었다가 갑자기 죽었다.
사람됨이 담론(談論)을 좋아하고 풍의(風儀)가 아름다워 귀공자 같았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므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많은 사람이 애석하게 여겼다 한다. 상주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유성춘(柳成春) 생몰년 미상. 병과(丙科) 1위(6/21)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천장(天章), 호는 나옹(懶翁)·성은(城隱). 양수(陽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준(公濬)이고, 아버지는 계린(桂隣)이며, 어머니는 최보(崔溥)의 딸이다. 대사간 희춘(希春)의 형이다.
1513년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춘추관의 기사관을 거쳐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대사헌 이항(李沆) 과 대사간 이빈(李蘋) 등의 합계(合啓)에 의해서 좌상 안당(安塘), 좌찬성 최숙생(崔淑生)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윤구(尹衢)·최산두(崔山斗) 등과 시주로 교우하였으며 호남의 삼걸이라 불렸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아깝게 죽었다.
이약빙(李若氷) 1489(성종 20)∼1547(명종 2). 병과(丙科) 2위(7/21)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초(熹初), 호는 준암(樽巖).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현감 자(滋)이며, 어머니는 광주 안씨(光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1508년(중종 3) 왕이 성균관에 행차해 시험할 때 수석으로 뽑혀 『예기』가 하사되었다. 1513년(중종 8) 수석으로 생원에 합격한 뒤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당(湖堂 : 독서당)에 뽑혔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18년 공조정랑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될 때 형 약수(若水)가 동료 유생 150여 명을 이끌고 조광조의 신원을 호소하다 옥에 갇히자, 이조정랑으로서 조광조와 약수의 사면을 주청하다가 파직되었다.
1537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한산군수로 있으면서 1539년에 연산군과 노산군(魯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복성군(福成君)의 신원을 청하다가 잡혀 들어와 삭직당하였다. 그리하여 충주 북촌(北村)에 가서 살면서 스스로 호를 준암이라 하였다.
그 뒤 1543년 경기도의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었고, 이듬 해 수원부사·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지냈다. 1547년(명종 2)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재직 중 소윤인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이 정언각(鄭彦慤)의 양재역(良才驛)의 벽서고발사건을 계기로 대윤 일파를 숙청할 때 대윤 윤임의 인척이라 하여 처형당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그 뒤 1570년(선조 3)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복직되었고, 몰수당한 가산도 돌려 받았다. 대흥(大興)의 우천사(牛川祠)에 제향되었다.
박원겸(朴元謙) 1470년(성종 1)~미상. 병과(丙科) 3위(8/21)
자는 희익(希益)이다.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증조부는 박성보(朴成輔)이고, 조부는 박중(朴仲)이며, 부친은 박효순(朴孝順)이다. 외조부는 민희(閔曦)이다. 첫째 부인은 이씨 부인이고, 둘째 부인은 원성렴(元誠濂)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식년시 진사 3등 18위로 합격하였으며, 1514년(중종 9) 별시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경성교수(鏡城敎授)‧양근군수(楊根郡守)‧풍천부사(豊川府使)‧혜민서교수(惠民署敎授)‧전적(典籍)‧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등을 역임하였다.
1531년(중종 26) 풍천부사(豊川府使) 재직 당시, 전에 양근군수(楊根郡守)를 지냈다
이언적(李彦迪) 1491(성종 22)∼1553(명종 8). 병과(丙科) 4위(9/21)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수회(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소(昭)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학문세계와 저서]
그는 1517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통해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고,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 도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비해 훨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미완성 저술로 주희의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인 9경(九經: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내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의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하며, 후에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을 근본강령으로 규정하고,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1517년 저술한 「오잠(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기준(奇遵) 1492(성종 23)∼1521(중종 16). 병과(丙科) 5위(10/21)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덕양(德陽).
아버지는 응교(應敎) 찬홍(禶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해,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에 임명되었고,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스승 조광조의 노선을 견지했으며, 사경(司經)으로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1516년 저작(著作)으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했으며, 검토관(檢討官)·수찬(修撰)·검상(檢詳)·장령(掌令)·시강관(侍講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이성언(李誠彦)이 임금을 속이고 부정을 저질렀다 하여,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한 당시 대각(臺閣)이 이를 묵인하였음을 논박해 훈구파(勳舊派)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으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1519년 응교가 되어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시해 김식(金湜)·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고, 이어 아산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죄가 가중되어 다시 온성으로 이배되었다. 어머니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터져 다시 유배지에 가서 교살되었다.
시에도 능해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복재집』·『무인기문(戊寅紀聞)』·『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1545년(인종 1)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최희삼(崔希參) 병과(丙科) 6위(11/21)
자는 노백(魯伯)
아버지는 최문성(崔文星)
관직은 교서관권지(校書館權知)에 그쳤다.
남주(南趎) 생몰년 미상. 병과(丙科) 7위(12/21)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계응(季應), 호는 서계(西溪)·선은(仙隱). 아버지는 계신(繼身)이다.
1514년(중종 9) 진사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가 되었으나 전라도 곡성에 살 때 현감의 과실을 관찰사에 고발한 것이 부민고소죄(部民告訴罪)에 해당되어 1516년 삭직되고, 이듬해평안도 의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남곤(南袞)에 의해 추방되었고, 1522년전라도 동복현감 재직중 아랫사람들과의 불화로 해임되었다. 남긴 시(詩) 중에는 남곤을 비꼬아 지은 「촉영부(燭影賦」 가 유명하다. 나이 28세에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으나 요절하였다.
송세정(宋洗精) 병과(丙科) 8위(13/21)
본관 여산(礪山) 자는 국화(國華)
아버지는 송숙기(宋叔琪)
관직은 예조좌랑. 황해도사 역임
이반(李胖) 병과(丙科) 9위(14/21)
본관 고성(固城) 자는 중서(仲舒)
아버지는 이명(李洺)
승정원 주서. 형조좌랑. 덕은현감. 사간원 정언 역임.
유형(兪炯) 1482(성종 13)∼1525(중종20). 병과(丙科) 10위(15/2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명중(明仲), 호는 도원(桃園).
집현전직제학 상지(尙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지(尙智)이고, 아버지는 세건(世建)이며, 어머니는 김중손(金仲孫)의 딸이다.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삼사의 여러 관직을 지냈다.
이조정랑·충청도도사·회양부사·양주목사·청풍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사간원정언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조광조(趙光祖)를 신구(신구 : 지은 죄를 바로 잡아 구함.)하는 소를 올렸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조공(趙珙) 병과(丙科) 11위(16/21)
본관 한양(漢陽) 자는 정서(廷瑞)
조부는 집의 조민(趙岷), 아버지는 조문거(趙文琚)
생원 진사 양시. 문과급제
정언, 지평, 강서 현령(江西縣令) 역임
이구령(李龜齡) 1482(성종 13)∼1542(중종 37). 병과(丙科) 12위(17/21)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미지(眉之). 할아버지는 신효(愼孝)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덕숭(德崇)이며, 어머니는 홍순성(洪循性)의 딸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외삼촌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참봉이 되어 151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19년 예조좌랑이 된 뒤 1521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지평으로 있을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유신들을 구출하려다 무고를 당한 안처겸(安處謙) 등의 죄를 엄정히 처리할 것을 강변하였다. 1523년에 문학을 거쳐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이 되자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사헌부의 장계로 체차(遞差 : 관직에 있는 사람을 임기 만료나 기타 이유로 인해 해임시키고 후임자를 임명하는 것)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1525년 보덕을 역임한 뒤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거쳐 전라도어사로 파견되어 지방 수령들의 근무 태만과 부정을 조정에 보고해 이들을 면직시켰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응교를 거쳐 1526년에는 전한이 되었다.
이듬해 예조참의·동부승지를 거쳐 승지가 되었을 때 강서(講書) 시험의 시관으로 부표(付標)를 누통(漏通 : 비밀을 누설해 알려줌)한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고의가 아니라는 왕의 옹호로 무사하였다.
이 해 대사간에 임명되자, 지난날 부표의 누통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것을 왕에게 아뢰어 체차를 자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528년 관찰사가 되고, 이어 1530년에 대사성의 물망에 올랐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곧 좌부승지가 되었다.
1532년 특명으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534년 한성부우윤이 되고 이듬 해 유수·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537년 호조참판이 되고 이듬 해 공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 실록이 소실되자 춘추관의 실록을 베껴 옮겨 재배치할 것을 청해 이를 실현하게 하였다.
이어 1539년 빈객(賓客)이 되고, 이듬해 좌참찬이 되자 동반 정3품 이상, 서반 2품 이상의 중신들은 유일지사(遺逸之士 ; 과거를 거치지 않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으로 생원 안백증(安伯增), 유학 성수침(成守琛)을 천거하였다.
곧 우참찬을 거쳐 병조판서가 된 뒤 1542년에 지돈녕부사로 죽었다. 척신으로 고관을 지냈으면서도 국사에 소홀했다는 사가들의 평을 받았다.
박영건(朴永健) 병과(丙科) 13위(18/21)
본관 죽산(竹山) 자는 백강(伯强)
아버지는 박중화(朴仲和)
관직은 부정(副正)
노극창(盧克昌) 1482년(성종 13)∼1568년(선조 1). 병과(丙科) 14위(19/21)
본관 함평(咸平) 자는 영경(榮卿)이고 호는 송계(松溪).
호군(護軍) 노상지(盧尙枝)의 아들이다. 1490년(성종 21) 아버지 노상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光州) 우치(牛峙)에서 함평군(咸平郡) 나산(羅山)으로 옮겨 산 것으로 전해진다. 문헌이 드물어 노상지와 노극창의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 시조의 사적(事蹟) 등을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실제 나산면 송암리(松巖里)와 죽암리에 마을이 형성되어있고 그 후손들이 노극창을 시조로, 함평(咸平)을 본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교유한 인물로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등이 있다.
1514년(중종 9) 갑술(甲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14위로 급제하였고,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남원부사(南原府使)‧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면서 치적으로 송덕비가 세워졌다.
1884년(고종 21) 송계사(松溪祠)에 배향되었다.
황유중(黃有中) 병과(丙科) 15위(20/21)
본관 미상 자는 정오(正吾)
아버지는 황자수(黃子壽)
예조좌랑. 성균관 전적
안처순(安處順) 1492(성종 23)∼1534(중종 29). 병과(丙科) 16위(21/21)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순지(順之), 호는 기재(幾齋)·사재당(思齋堂). 남원 출신. 구(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주부윤 지귀(知歸)이고, 아버지는 전적(典籍) 기(璣)이며, 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 능성현령(綾城縣令) 옥산(玉山)의 딸이다.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판서 침(琛)에게 의탁하여 성장하였다. 1513년(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정자 겸 경연전경(正字兼經筵典經)·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1517년 홍문관박사가 되었으나,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하여 구례현감으로 제수되었다.
이 해 2월 구례현감으로 제수될 때 왕이 불러서 학교를 일으키라고 교시하자, 그는 『근사록(近思錄)』을 간행, 보급하여 지방학교 진흥에 노력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이행(李荇)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겨우 화를 면하고 은퇴하였다가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경성교수(鏡城敎授)를 지내고, 1533년 전적(典籍)으로 제배된 뒤 양현고주부(養賢庫主簿)·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에 이르렀다.
43세에 병을 얻어 남원부 흑성산(黑城山)에 안치됨으로써 일생을 마쳤다. 그의 성품은 암약(暗弱 : 소극적이고 약함)하여 강직성과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간특하지 않아 사화 때에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