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의성김씨 개암종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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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개암종택은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새로 단장된 건물이다. 목재·기와·담장을 제외하고 모든 벽은 백회로 하얗게 새로 칠했다. 천정의 서까래 사이 부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담장은 미사처리를 하였으므로, 은은한 흙의 색감을 드러낸다. 건물의 외벽을 모두 백회 처리를 하여 집 전체에 통일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도록 했다. 하지만 가볍고 차갑게 느껴지기도 해서, 옛집이 갖는 넉넉하고 푸근한 모습을 느끼기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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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개암종택의 대문은 좌우로 행랑채를 거느린 3칸의 솟을대문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랑채 건물 중 좌·우 각 1칸씩은 방으로 되어 있고, 중앙의 2칸은 마루방이다. 서쪽의 방은 앞의 끝 선까지 벽이 나와 서 있고, 동쪽의 3칸은 반 칸 정도 뒤로 물러나 있다. 이 부분에는 정면 3칸, 측면 반 칸 규모의 마루가 있다. 서쪽 방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 부분에 ㄴ자 형상으로 쪽마루가 있다. 서쪽으로부터 제 2칸의 마루 안 천장 아래로는 ‘개암정’ 현판이 달려 있다. 이 건물은 뒤쪽으로는 약 반 칸 규모가 누다락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까 안채 쪽에서 보면 정면 4칸, 측면 반 칸 정도의 공간이 아래쪽 전체가 일선으로 마루처럼 들려 있는 것이다. 안채에서 보았을 때 서쪽으로부터 두 번째 칸에는 또 반 칸 넓이의 작은 마루가 있다. 이 건물의 동쪽에는 반 칸 정도 북으로 물러나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세워져 있다. 사랑채와 중문을 영역으로 하여 건물과 담장으로 이어진 영역이 안채 영역이다. 안채 영역은 중문과 좌·우 측문에 의하여 바깥채 영역으로 통한다. 바깥채 영역은 정문과 동쪽 측문을 두고 크게 바깥담을 두르고 있다. 바깥담의 동북쪽 뒤편으로는 산기슭과 잇닿아 사당이 있다. 사당은 조금 높은 기단을 쌓아 앉혔다. 앞으로는 작은 칸으로 3칸 규모의 정문채가 있고, 뒤로는 또 낮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사당 건물이 있다. 안채에서는 작은 동쪽 측문을 통하여 사당 영역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사당채는 키 낮은 담으로 완전하게 둘러싸여 있다. 안채는 사랑채 쪽으로 앞이 터진 ㄷ자 형상이다. 안채의 북쪽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좌·우에 방을 두고 중앙에 2칸 규모의 마루를 두었다. 그런데 사실 이 안채의 경우, 좌우에 건물채를 두고 중앙에 2칸 규모의 마루를 만들어 ㄷ자로 이어 놓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이 건물채의 뒤편 구조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뒤쪽의 벽은 좌우의 각 1칸이 지붕 아래로 ㅅ자 형식의 좌·우 건물채 지붕 끝이 30cm 정도 돌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돌출된 지붕의 구조물 위로 동서로 이어지는 지붕이 올라붙어 있다. 이 돌출된 부분은 좌·우에 있는 방들이 북쪽 건물채에 속한 건물이라기보다는 동·서로 벌려 선 건물채에 속한 구조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보면 안채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동·서 2 채의 건물과 그 사이에 가설되어 있는 북쪽의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마루 영역은 좌·우로 각 1칸 규모의 쪽마루가 발처럼 앞으로 튀어나가 있는 모습이다. 마루 영역에서 보면 좌·우의 방들은 낮은 평면의 천정 위로 서까래 부분까지 빈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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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정 (開巖亭) | ||||||||||||||||||
김우굉의 아호를 쓴 정자 현판개암정은 사랑채 건물에 남면하여 붙어있는 현판이다. 파조인 김우굉의 호로부터 오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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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 김우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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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의 부친은 권신이 농단하는 세상, 사림이 동서로 갈려 서로 대립하던 시기를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닌 능력을 제대로 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의 부친인 김희삼은 당시의 권력자인 이기(李芑)의 미움을 받아 자원해서 삼척 부사로 7년간 재임하였다. 그때 김우굉은 주변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아울러 43세 때에는 동생인 사계(沙溪) 김우용(金宇容),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사암(徙庵) 노관(盧祼),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송암(松庵) 강익(姜翼) 등과 함께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아울러 함안(咸安)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를 지었는데, 탈속(脫俗)한 듯한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아울러 60세 이후에는 동서의 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잇달아 외직을 구했고, 날마다 자연과 벗 삼아 기심(機心)을 잊으려는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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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세 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요승 보우를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경상도 내의 선비들에게 통문을 돌려 상소를 올리도록 주도하였고, 한 달 동안 22번 상소를 올렸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 인해 곧은 명성을 세상에 떨쳐 사림들의 존중을 받았다. 형조 참의로 재직 중이던 60세 때 서얼인 곽사원과 사노가 교하에 있는 언답(堰畓)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붙었다. 곽사원은 권력자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형조에서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고 오랫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곽사원이 제출한 증거가 위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형조 정랑과 형조 판서는 권력에 빌붙어 곽사원을 두둔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형조 참의를 사직하였고,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게끔 하였다. |
가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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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굉은 동생 김우옹과의 17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학덕을 쌓고 유교의 고전을 비롯한 성리서(性理書)를 공부하며 지행(知行)의 정실(精實)을 추구하는데 매진하는 한편, 홍문관에서 같이 근무하며 충언직설로 시폐를 극론하다 탄핵대상이 되는 등 정치적 행보에 보조를 맞추어 나갔다. 그들 형제의 정의는 김우옹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떠날 때 김우굉이 병중임에도 상주에서 영주까지 도보로 달려와 통곡하며 애틋한 정을 나누기도 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김우옹은 귀양지에서 지은 제문에서 형제가 외로운 자취로 갈 곳을 모르고 서로 의지하였다고 회고하며, 자신의 성품이 우둔한데다 어리석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선행의 방도를 알지 못해 항상 형의 근심거리가 되었을 뿐이라며 그의 인생역정에 끼친 형의 영향을 술회하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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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개암에 살던 그는 만년에 봉화의 해저(海底)에 터전을 잡아 그의 자손들이 세거하였다. 특히 현손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의 후손들 가운데 현달한 이들이 많이 나왔다. 지금도 해저(속명 바래미)에 세거하는 의성김씨는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중 하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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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굉의 부인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자식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김득가(金得可)·김달가(金達可)이다. 딸은 유성귀(柳成龜)와 혼인하였다. |
학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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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盧祼), 정복현(鄭復顯), 강익(姜翼), 류성룡(柳成龍), 노수신(盧守愼), 강사상(姜士尙),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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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굉은 일찍부터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대인군자의 덕목을 습득하였다. 그 스스로 퇴계 이황(李滉)보다는 조식의 학통에 가깝다고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동생 김우옹과 함께 이황에게 예제(禮制)에 관한 서신을 교환하며 감화를 받았다. 1560년(명종 15) 그가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합격할 때 출제관(出題官)으로서 그의 책문(策文)을 보고 감탄한 바가 있었던 이황은 그와 서신을 교환하는 가운데 “진정 그 명성이 헛됨이 없다.”라며 그의 박식함에 칭찬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중간에 서로 만나지 못했어도 그의 풍의를 생각하여 잊지 않았다. 이제 편지를 받고 보니 이취(理趣)와 사채(詞彩)가 모두 뛰어나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했을 만큼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를 보면 그의 사승관계는 일찍이 남명의 문하에 있다가 과거 급제 후 아우 동강과 함께 도산에 급문했다는 시간적인 전후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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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유 관계가 상당히 넓었다. 노관(盧祼)·정복현(鄭復顯)·강익(姜翼)·류성룡(柳成龍)·노수신(盧守愼)·강사상(姜士尙)·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 당대 경상도의 명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류성룡은 안동 하회에서 배를 타고 그가 살고 있던 낙동강변의 개암까지 와서 이틀을 묵으며, 학문하는 요체와 세상을 구제할 원대한 포부를 서로 토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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