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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名宰相노수신선생에대한학술대회가열린다.

어풍대08 2015. 4. 22. 21:07

조선 중기 관료이자 유학자인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선생에대한학술대회가고려대100주년기념관에서

탄생500주년기념학술대회가열린다.

조선 중기 관료이자 유학자인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남들은 한 번 하기도 어렵다는 재상(宰相) 자리에 올라 120여 차례나 사직(辭職)을 청했다.

흥미로운 건 그때마다 우의정에서 좌의정, 영의정으로 오히려 승진했다는 점이다.

이황·이언적 등과 교류한 대유(大儒)이자 이이를 추천한 경세가(經世家)였던 노수신 탄생 500주년을 맞아 그의 학문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기념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24일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는 노수신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조성을 아주대 교수는 이날 발표 예정인 '소재 노수신의 정치활동과 정치관'을 통해 "노수신은 동인과 서인, 온건파와 급진파를 막론하고 유능하고 개혁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등용하고자 했다"며 초당파적 입장과 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흔히 노수신은 범(汎)동인계로 분류되지만

 "범(汎)서인계로 분류되는 이이를 추천해서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게 했다"는 것이다.

노수신은 중종 후기에 장원급제하고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로 임명됐다.

하지만 명종 즉위 직후인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파직된 뒤 19년간 순천·진도·충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1568년에야 유배에서 풀려나 홍문관 직제학과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차례로 지냈다.

하지만 노수신은 승진을 거듭할 때마다 10~20차례씩 사직을 청했다.

모친과 본인의 병 등 이유는 다양했다.

조 교수는 노수신의 거듭된 사직 청원이 당시 격화되기 시작한 동·서인의 당쟁과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조 교수는 "노수신은 가장 중립적인 입장에서 당쟁을 조정하고 화합시키기 위해 진력했으며, 그의 정치적 입장은 영·정조대의 탕평 정치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이동환 고려대 명예교수, 정호훈 서울대 교수 등이 노수신의 정치 사상과 학문에 대해 발표한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