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60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5월 7일(기미)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곧 거애(擧哀)하고자 하니,
지신사 안숭선이 아뢰기를,
“오늘은 잔치를 베푼 뒤이고, 또 예조에서 아직 정조장(停朝狀)을 올리지 않았으며,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니, 내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흰 옷과 흰 산선(繖扇)으로 홍례문 밖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의식과 같이 거행하였다.
관의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인데,
뒤에 이름은 관(寬),
자를 경부(敬夫)로 고쳤다.
황해도 문화현 사람으로 고려 정당 문학(政堂文學) 공권(公權)의 7대손이다.
신해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옮겨서 전리 정랑(典理正郞),
전교 부령(典校副令)이 되고,
봉산 군수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성균 사예가 되고,
내사 사인(內史舍人)과 사헌 중승(司憲中丞)을 거쳤다.
태조가 원종 공신권(原從功臣券)을 하사하고,
대사성·좌산기(左散騎)와 이조·형조의 전서(典書)를 거쳐, 강원·전라 두 도의 관찰사와 계림 부윤으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예문관 대제학, 형조 판서를 지나,
두 번 대사헌이 되고,
의정부 참찬과 찬성으로 옮겨 갑진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관은 공순 검소하고 정직하며,
경사(經史)를 널리 보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며, 《무경(武經)》에 이르러서도 모두 섭렵(涉獵)하였다. 집에 있을 때 살림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서사(書史)로 스스로 즐기고, 비록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불공을 하지 말고 일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따르되, 포해(脯醢)만은 없애라.
시속에서 놀라고 해괴히 여길까 두렵다.
비록 기일(忌日)을 당할지라도 불공을 드리고 중을 먹이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수(壽)가 88세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치조(致弔)하며, 관에서 장사를 다스렸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는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한결같이 닦고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간(簡)이다.
아들 셋이 있으니,
유맹문(柳孟聞)·
유중문(柳仲聞)·
유계문(柳季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