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해(權文海, 1534-1591)선생의초간정(草澗亭)
권문해(權文海)선생의초간정(草澗亭)
“ 웅장한 자연을 섬세하게 품고….
1582년 2월 8일, 공주 목사 권문해는 죄수의 탈옥으로 파직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향 예천에 돌아온 그는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 서둘러 정자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매서운 추위에도, 마을의 역병에도 정자 짓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권문해의 아지트 ‘초간정’이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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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자연을 단아하고 섬세하게 품고 있는 초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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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草澗亭)을 짓고 난 후, 권문해는 하루가 멀다고 초간정을 찾아 시간을 보냅니다.
홀로 소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교우들과 술자리를 갖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곳을 찾았습니다.
5월이 되어 날씨가 맑은 날이 연일 계속되자 초간정에 머무르는 시간도 늘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만의 공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온종일 초간정에 앉아 있다가 더위를 먹고 보름 넘게 심한 몸살을 앓고 물조차 마시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초간정에 가지 못해 애를 태웁니다.
1582년 6월 4일 맑음
기운이 연일 편치를 않아 초간정(草澗亭)에 왕래하지 못한 지 오늘 벌써 10여 일째이다.
- 권문해의 <초간일기> (1582년 6월 4일 일기) 중 -
초간정에 가고 싶은 권문해의 마음과는 달리 이후로도 병이 쉽게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권문해는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1582년 6월 9일 의원을 불러 침으로 피고름을 터트리고, 굼벵이와 지렁이 즙을 죽에 타서 마시며 건강 회복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조금씩 차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외출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아 여전히 초간정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침을 맞고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닷새째인 6월 14일, 몸이 거의 회복되자 권문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초간정으로 달려갔습니다.
몸이 아플 때도 가고 싶었던 그곳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1582년 6월 21일, 권문해 선생은 아내를 잃었습니다.
1553년 아내 숙인 곽씨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30년을 함께 했습니다.
그런 아내를 잃은 권문해는 상복을 입은 채 홀로 초간정에 오르곤 했습니다.
1582년 7월 15일 구름이 끼어 흐림
가묘(家廟)에서 차례를 지냈다.
나는 복(服)을 입고 있는 중이라 참여하지 않고 정원(靜元)이 혼자 지냈다.
그리고 나는 홀로 초간정에 올랐다.
- 권문해의 <초간일기> (1582년 7월 15일 일기) 중 -
초간정은 권문해에게 어떤 의미일까….
2014년 봄, 432년 전 권문해가 정성을 다해 지은 초간정을 찾았습니다.
초간정으로 가는 길은 포근하고 맑았습니다.
부드럽게 이어진 산길을 따라 활짝 핀 벚꽃이 긴 터널이 되어 맞아 주었습니다.
그 벚꽃 터널을 지나 마주한 초간정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절벽 위에 아찔하게 서 있는 모습은 매혹적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자연에 몸을 의탁하여 세상의 시름을 잊기도 하고, 세상에 맞설 용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자연을 하나의 이상 세계로 인식하고 자연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는 수양과 성찰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자연을 가득 품은 누정을 짓고 그곳을 아끼고 가꾸듯, 자신을 닦고 가꾸었습니다.
왜 그토록 권문해가 초간정을 아끼고 가꾸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의 웅장하고 화려함을 섬세하고 단아하게 품고 있는 초간정을 보며, 권문해도 분명 자상하고 섬세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을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초간정(草澗亭)
위치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초간정은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1582년 공주 목사에서 파직된 이후 고향 예천에 돌아와 세운 정자이다.
권문해 본관 예천. 자 호원(灝元). 호 초간(草磵).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선조 24) 사간(司諫)이 되었다.
권문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20권)을 저술하였다.
예천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초간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1612년에 고쳐 지었지만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타 버려 1642년에 후손 권봉의가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870년 후손들이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지난 1985년 경북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