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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이익선생의遊淸凉山記(유청량산기)

어풍대08 2014. 2. 6. 22:53

 

성호선생의遊淸凉山記(유청량산기)

내가 순흥부에서 벗 신택경과 청량산 유람하기로 약속하고 서둘러 여장을 꾸려 출발한 것은

 기축년(1709) 11월 초하루였다.

 저녁에 안동 경계 청암정에 이르렀는데, 고 충정공 충재 권벌이 살던 곳이다.

도랑을 내고 둑을 쌓아서 물이 구복암을 감싸고 넘실대며 흘렀다.

바위 위에 정자 세웠는데 매우 절묘하여 즐길 만하였다.

 이어서 삼계서원에 들렀는데, 바로 충재를 제향하는 곳이다.

금명구, 권보, 권모 세 사람과 함께 서원에서 잤다.

 두 권 씨는 충재의 후손이다.
  이튿날 아침 봉화읍에 이르렀는데

홍세전이 문득 와서 동행하였다.

느지막이 불퇴령에 올라 청량산을 바라보았다.

 이 산은 태백(백두)에서 뻗어 나와 남쪽으로 달려와서 우뚝이 높이 솟아서 작은 구역의 명산이 되었다.

 마치 창과 깃대가 빽빽하게 늘어선 진영 모양 같기도 하고, 또 여러 부처가 연화탑 속에서 무리지어 옹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하늘 높이 떠서 구름과 어울려 있는 형세가 나지막한 산들 가운데서 빼어나니, 참으로 이른바 명불허전이다.

 날이 어두워져서 촌락 사람들에게 관솔불로 앞길을 인도하게 하여 낙동강을 건너고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산에 도착했다.

 하늘이 이미 캄캄해져서 길을 찾느라 애를 먹어 골짜기와 구렁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연대사에서 자고, 다음 날 중들과 함께 걸어서 절 문 주위를 돌아 두루 둘러보았다.

 산이 맑은 못, 거센 여울, 괴상한 바위, 첩첩한 봉우리와 같은 기이하고 뛰어난 경치는 없으나 사방 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 공중을 이고 있지 않은 것이 없어서 병풍을 치고 휘장을 드리운 모양 같았다.

바라보니 마치 넘어져서 덮칠 듯하여 아득히 더위잡고 기어오를 방법이 없었다.

 이런 점은 금강산과 속리산에는 없는 것으로서 여러 명산이 한 발 양보해야 한다.

余自順興府, 與申友澤卿約遊淸凉, 率爾裝出乃己丑十一月初吉也. 夕至安東界靑巖亭, 故冲齋權忠定公諱橃所居也. 引渠築堤, 水溶溶環繞乎一箇龜伏巖. 巖上爲亭, 甚妙絶可喜. 仍過三溪, 卽冲齋芬苾所也. 與琴生命耈, 權生莆, 謩三人, 同宿院中. 兩權是冲齋之後也. 翌朝至奉化邑, 洪生世全忽來會同行. 晩登佛退嶺望見淸凉. 蓋自太白迤而南, 突立矗矗爲一小區名山. 或如戈纛森列爲營陣狀, 或如衆佛羣擁於蓮花塔裏, 浮天和雲, 勢拔於培塿, 眞所謂名下無虛也. 昏黑使邨氓以松明導前, 涉洛川, 夜深始到山. 天色已黯黯, 艱難覓路, 殊不知洞壑之爲如何也. 宿蓮臺寺中. 次日與僧徒步繞寺門而周覽焉. 山無淸潭激湍之奇, 怪巖重巒之勝, 而四壁削立, 無不橕空, 如張屛垂帷狀. 見之若將壓倒, 邈邈然無計可攀援也. 此則非金剛俗離之所有而諸名山之讓一頭也.
 
- 이익(李瀷, 1681~1763), 「유청량산기(遊淸凉山記)」, 『성호전집(星湖全集)』

 

  
  이익의 청량산 유람기를 읽어보면 청량산을 여실하게 묘사하여 마치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외청량, 내청량의 열두 봉우리 가운데 경관이 빼어난 주요 봉우리와 누각처럼 평평하게 펼쳐진 바위와 최치원, 김생의 전설이 어린 기암절벽과 자기 학맥의 큰 스승인 이황의 흔적을 낱낱이 들고 청량산에 깃들어 사는 산승들의 삶의 한 모습까지도 담아내었다.
이처럼 옛사람들의 유람기는 한 시대를 주름잡은 문인의 글이라도 담담하게 그려내고, 호흡이 부드러우며, 마치 걸어가는 사람의 템포로 시선을 옮겨가서 자연스럽다.

 깊은 학식을 지니고서 사물의 진상을 꿰뚫어보고 자연과 세상사 이치를 달관한 이라도 현학을 뽐내지 않는다.

 청량산은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산이다.

청량산 발아래를 흐르는 낙동강 물이 도산서원 앞을 지나 안동댐에서 잠시 모인다.

그리하여 청량산 먼발치는 안동과 경계를 이룬다.

성호 이익이 청량산을 유람했을 때는 행정구역이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그리하여 지금은 봉화읍에 속해 있는 닭실마을 충재 권벌의 유적과 청암정을, 역사에서 소재를 따온 영화에 가끔 등장하는 그 아름다운 정자를, 이익은 안동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봉화일대는안동부에속하는곳이많이있었다. 

  당시에 지금의 봉화읍은 내성(乃城)이라 불렸고, 안동부의 속현이었다고 한다.

그 이웃이 지금 봉성면에 속하는 원래의 봉화현이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에는 원래 봉화현이 지금의 봉성면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조선 말에 잠시 춘양면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봉화읍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봉화군으로 이어져 온다.

 낙동강의 한 지류가 되는 내성천이 바로 봉화읍 한가운데를 흐른다.

내성천이라는 이름은 봉화군 물야면에서 발원하여 지금 봉화읍의 옛 이름인 내성의 중심을 흘러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낙동강 본류는 바로 이익 일행이 유람한 청량산 발밑을 흐르는, 황지에서 발원하여 부산까지 흘러가는 강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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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은법전면,소천리이니,운곡천이청애정에서낙동강을만나.

옥천터를지나

졸천에이르는곳이고향이니어풍대라는돈대바위가있는곳이기도하다.

나의직계선조이신남양(당성)홍씨린주도령중랑장파26세에서27세대종가의대종택이있었던곳이다.
봉화와안동일대는예로부터완고한선비가많이살던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