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 머리에
필자에게는 희한한 책이 있다.
《이조실록난해어사전(李朝實錄難解語辭典)》(이하 《난해어사전》이라 간칭한다)이란 이름의 사전이다.
한국문화사에서 펴낸 책으로 북한에서 번역한 《이조실록》에 들어 있는 난해어풀이를 모아 하나의 책자로 만든 것이다.
220쪽에 달하는 아담한 책자이지만 이 책에는 정말로 《실록(實錄)》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정말 알기 쉽게 풀이해 놓았다.
이 책에는 "달로화적(達魯花赤)"이란 항목이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당시의 중국음으로는 '따루화츠'인데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 4권 신재류 13에서 몽골어로 두목이란 말이라고 한 '다로가'를 중국음으로 기사한 것이다.
《이문집람(吏文集覽)》 2권에서는 사신이란 뜻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 29권에서 '한 부분 또는 한 지역의 일을 담당하여 처리하는 관리'라고 해석한 것이 더 타당하다."라고 하였다.
(한국문화사, 《이조실록난해어사전(李朝實錄難解語辭典)》, 44쪽 참조)
이제 《난어해사전》에서 말하고 있는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 등의 출전에서 나오는 해당 구절을 차례로 확인해 가면서 달로화적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설명하고자 한다.
2.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 4권 신재류 13에서 말하는 몽골어 다로가
인터넷 《호동백과》에 의하면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중국 청대에 관찬한 《청문감(淸文鑑)》으로 명명된 사서이다.
만문(滿文)·
장문(藏文)·
몽골문(蒙古文)·
위그르문(維吾爾文)·
한문(漢文) 5종 문자 대조 분류 어휘집이다.
편찬자와 출간연도는 미상이다.
어떤 사람은 이 책의 완성시기는 1790년(건륭 55년) 무렵이요, 출간시기는 1805년(가경 10년)보다 빠르지 않다고 추정하였다.
(中国清代官修的以清文鉴命名的辞书 。 满文 、藏文、蒙古文 、维吾尔文、汉文5种文字对照的分类词汇集。编撰者和成书年代不详。有人估计完成时间为1790年(乾隆五十五年)前后,刊成时间不早于1805年(嘉庆十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 판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어제오체청문감(御製五體淸文鑑)》은 《어제증정청문감(御製增訂淸文鑑)》을 남본으로 하여 《어제사체청문감(御製四體淸文鑑)》 만문(滿文)·장문(藏文)·몽골문(蒙古文)·한문(漢文) 대조 어휘의 기초위에 위그르문(維吾爾文)을 더하여 만들었는데 소수의 어휘를 증가하거나 대체하였다.
어휘는 그 의미에 따라 분류하였다.
정편(正編)은 32권으로, 36부(部)·292류(類)·556칙(則)으로 나누어 어휘 17,052조를 수록하였고, 보편(補編)은 4권으로 26류·71칙으로 나누고 어휘는 1,619조를 수록하였는데 전체 수록 어휘는 18,671조이다.
5종 문자의 순서는 만문·장문·몽골문·위그르문·한문이다.
그 가운데 장문(藏文)의 난 아래에는 두 가지 만문으로 주음(注音)을 덧붙였는데, 한 가지는 절음(切音)(만문자모를 사용하여 개개 장문자모로 전사한 것), 다른 한 가지는 대음(對音)(만문자모를 사용하여 해당 어휘를 표음한 것)이다.
위그르문 난 아래에 대음(對音)이 덧붙여 있다. 따라서 5종의 문자는 모두 8난이다.
1957년에 민족출판사에서 고궁박물원(古宮博物院)에 보존된 초본분 3책을 근거로 영인출판하여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이라 제하였다.
1966년에 일본에서 라틴어 자모로 전사(轉寫: 다른 글자로 바꿔쓰는 것)한 《오체청문감주해(五體淸文鑑注解)》를 출판했다.
(《御制五体清文鉴 》是以《 御制增订清文鉴 》为蓝本,在《御制四体清文鉴》满文、藏文、蒙古文、汉文对照词汇的基础上,加上维吾尔文而成,并增加和替换了少数词。词按意义分类 。正编 32卷 ,分36部 、292类 、556 则 ,收词17052条;补编4卷,分26类 、71则 ,收词1619条 ;共收词18671条。5种文字的次序是满文、藏文、蒙古文、维吾尔文、汉文。其中在藏文栏下附有两种满文注音,一种叫切音(用满文字母逐个转写藏文的字母),一种叫对音(用满文字母为该词标音)。在维吾尔文栏下 ,附有“对音” 。因此5种文字共有8栏。1957年 ,民族出版社根据故宫博物院所存抄本分3册影印出版 ,题名《五体清文鉴》。1966年,日本出版了用拉丁字母转写的《五体清文鉴译解》。)"
주시하다시피 북한의 서물은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한자를 전혀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난해어사전》에서 말하는 "신재류"가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없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 전차책을 찾아 보기로 하였다.
3개의 PDF파일로 된 이 전체의 자료는 무려 5,163쪽에 달한다. 다행히 필자가 가지고 있는 영인본 자료에는 권별로 목록이 정리되어 있어 해당 자료를 찾는 데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 모습은 이러하다.

<그림 1> 이 자료는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에서 캡쳐한 것이다.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만주말 다(da)에 대해서 제1단에는 만문(滿文)이요,
제2단은 장문(藏文)인데 절음(切音)과 대음(對音)으로 각기 구분이 되어 있고,
제3단은 몽골문(蒙古文)이요,
제4단은 위그르문(維吾爾文)인데 대음(對音)이 부기되어 있고,
맨 마지막이 한문(漢文)으로 써 있다.
필자가 만문과 몽골문을 공부한 바 있어 그 글자를 잘 알고 있다.
만주문은 다(da)를 표음한 것이요, 몽골문은 다루가(daruga)를 표음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도대체 "신재류"란 무엇인가이다.
우단 난외에 "臣宰類"로 써 있는 것으로 보아 한글로 쓴 신재류는 한자로 "臣宰類"로 쓰는 모양이다.
다시 사전에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한번 찾아 보기로 하자.
어지간한 사전에는 나오지를 않는다.
고대민족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중한대사전(中韓大辭典)》에 비록 이 말이 올려 있고, "재상, 대신"으로 그 뜻을 풀이하고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신재(臣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중한대사전(中漢大辭典)》의 서문에는 자사의 이 책이야 말로 일본 대동문화대학(大東文化大學)의 《중국어대사전(中國語大辭典)》에 올려 있는 23만 자를 능가하는 호왈 30만 자라고 자못 큰 소리를 쳤지만 이 말의 정확한 해석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고수가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바로 중국이 자랑하는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는 "재신(宰臣)은 원래 노예를 가리켰다.
나중에는 제왕을 보좌하는 신좌(臣佐)로도 일컬어졌다.
(本指奴隸。後亦以稱輔佐帝王的臣佐。)"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신좌(臣佐)란 또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뇨.
역시 이 사전에 따르면 "널리 신료와 관좌(官佐: 군관)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니 신재류란 제왕을 보좌하는 문무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나죽풍 주편,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축인본)(중권), 한어대사전출판사, 5030쪽 참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난어해사전》에서 지적한 대로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 4권 신재류(臣宰類) 제13에서는 만주말 다(da)에 대하여 몽골말에 해당하는 "다루가"를 한문으로 두목(頭目)으로 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사역원에서 번역한 《한청문감(漢淸文鑑)》 권2 제왕부(帝王部),
신재류(臣宰類) 제13칙에 두목(頭目)이란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두목(頭目)을 중국어 발음으로 "터우무"라 적고,
우리말로 "범사에 두목된 사람"으로 풀이하고,
다시 만주문자로 da로 쓰고 다시 우리말로 "다"라 쓰고,
그에 대한 설명을 만주말 발음 그대로 우리말로 "야야, 바타, 더, 다라하, 울서"로 적어 놓았다.
이 만주말을 현재 통용되는 묄렌도르프식 로마자로 전사(轉寫)하면
"yaya baita de daraha ulse"가 된다.
yaya baita는 만주말로 범사(凡事)를 이르는 말이요,
de는 처소격 조사요,
daraha ulse는 만주말로 우두머리를 뜻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뜻은 "두목이란 범사에서 우리머리가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림 2> 이 자료는 《한청문감(漢淸文鑑)》 영인본에서 캡쳐한 것이다.
3. 《이문집람(吏文集覽)》에서 말하는 사신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는 《이문집람》에 대해서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 《이문 吏文》에서 어려운 어구를 뽑아서 풀이한 책.
《이문집람》 권2∼4와 《이문속집집람》 1권으로 된 4권 1책.
《이문》은 명나라와 주고받은 외교문서를 모아놓은 책으로 최세진(崔世珍)이 이문의 학습참고서로서 사용하게 할 목적으로 1539년(중종 34)에 편찬하였다.
첫머리에 실린 최세진의 집람 범례에 의하면 어려운 어구를 상고하여 풀이하고 모르는 것은 승문원 소장의 《각년질정록(各年質正錄)》을 참조하여 풀이하였다고 한다.
또한, 권1이 없는 것은 《이문》권1이 한어(漢語), 곧 중국어인 선유성지(宣諭聖旨)이므로 이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집람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문》의 분량이 많지 않은 데다, 그 중에는 당시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것도 있었으므로, 홍치∼가정 연간의 문서에서 이문을 가려 《이문속집》을 편찬한 뒤에 그 집람도 만들었다고 한다.
요컨대, 이 책의 편찬으로 이문의 학습서와 그 참고서가 어느 정도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집람이란 《노박집람(老朴集覽)》 등의 예에 따라서, 표제어 아래 한문의 협주를 다는 방식이다.
그 주석에 간혹 '향명'·'향언'·'속언'이라 하여 고유어를 한글로 적어서 대응시키거나, 독특한 이두어와 우리나라의 한자어를 대응시킨 것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명나라의 속어에 대한 참고서일 뿐만 아니라, 국어사자료로서도 가치를 가진다.
원간본은 1539년 간행되었을 것이나 전하지 않고 중간본이 전한다.
현재로는 16세기 중엽의 간행으로 보이는 《증정이문집람(增定吏文輯覽)》이 가장 빠르다.
이 책은 갑인자본으로 동국대학교 소장본이다.
흔한 것은 간기가 없으나 판식 등으로 미루어 을해자본(乙亥字本)의 복각으로 보이며 17세기 중엽의 목판본이다.
따라서, 원간본은 《노박집람》과 마찬가지로 을해자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의 모든 중간본은 방점은 없지만, ㅿ와 ?이 정확히 사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협주에 나타난 약 80여 개의 고유어는 물론이거니와 이두어와 한자어 역시 중세국어의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이 책은 1942년 《훈독이문(訓讀吏文》에 부록으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다."라고 하였다.(인터넷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 따름)
필자는 이 책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대해 오랜 동안 연구를 해 보았고 그 내용을 10여년 전에 감히 겁도 없이 우리말로 번역해서 주석까지 달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자료는 계간 《서지학보(書誌學報)》라는 학술지에 부록으로 나와 있는 자료를 예선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민원신청으로 카피해 두었던 것이다.

<그림 3> 이 자료는 《서지학보》의 부록으로 실린 《이문집람》에서 캡쳐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난어해사전》에서 지적한 바와같이
달로화적은 "원나라 때 사신을 가리켜서 이르는 말(元時指使臣之稱)"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4.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剳記)》에서 말하는 다루가치 관련 기술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중국의 책 이름 가운데 차기(剳記)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이 더러 있는데 요즘의 중국에서는 찰기(札記)라고도 한다.
찰기(札記)란 독서하여 얻은 바나 생각·견문 따위를 수시로 기록한 글을 말한다.
우선 이 책이 어떤 것인지 알아 보기로 하자.
인테넷 《바이두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십이사찰기(二十二史札記)》는 청대 사학자 조익(趙翼)(1727~1814)의 명저로서 작자가 역사를 공부하고 필기(筆記)한 것인데 역사로서 역사를 고증하는 방법으로 역대 정사(正史)(실제로는 24부의 정사를 언급했음)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고찰하고, 사저(史著)와 역사현상·사실(史實)·사건·인물에 대해서 객관적 평가를 한 것이다.
이 책은 경세치용(經世治用)에 치중하였고 그 종지는 치란흥쇠(治亂興衰)를 탐구하는 데 있었으며, 내용이 충실하고 조리가 분명하며 제목은 대체로 남달리 기발한 주장을 내세운다거나(標新立異), 어떤 것은 고증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논단을 하는 등 일반적인 독서 필기과 비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필기(筆記)는 붓으로 쓴 글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일종의 수필기록을 위주로 한 저작체제를 이르는 말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견문을 기록한다거나 물명을 변별한다거나 고어를 해석한다거나 역사적 사실을 술한다거나 정경을 기록하는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 수필·필담·잡식·찰기 등이 있다.
중국에서 발달한 특이한 장르이다.
이 책에서는 달로화적에 대해서,
"관인을 관장하고 일을 처리하는 장관으로, 문무(文武)·대소(大小) 를 막론하고 로(路)·부(府)·주(州)·현(縣) 등에 죄다 이런 관직이 설치되었다
(掌印辦事之長官, 不論職之文武大小, 或路、或府、或州、或縣, 皆設此官。)"라고 하였다.
그리고 달로화적은 몽골인이 주로 이를 담당하였는데,
한인(漢人)도 이 관직을 담당한 자로 4명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인을 관장한다는 말인 장인(掌印)이란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어느 행정관서의 직인 또는 관인을 관리의 실태는 공문서 수·발신을 담당하는 총무계장의 책상에 시정장치를 해 둔 관인함을 비채해 놓고 주로 총무계장이 문서의 발송을 요청하는 직원에게 발송대상 공문서와 발송대장의 등재 여부를 확인하고 관인을 찍어 주고 있다.
그러한 업무는 행정기관의 장이 할 일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인은 그런 뜻이 아니라 관인이나 직인을 관장한다는 것은 바로 그 업무를 책임지고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 다름 아니다.
이 말의 출전은 《구당서(舊唐書)·직관지(職官志)三》에 "司記掌印, 凡宮內諸司簿書出入, 審而付行焉。"이다.
이는 당나라 때 궁관(宮官)의 하나인 사기(司記)의 직장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직무는 장인으로, 궁내의 여러 부서에서 들고 나가는 모든 공문서에 대해서 심사를 한 뒤에 직인을 찍어 주는 업무를 관장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한인(漢人)이란 결코 오늘날의 중화족(中華族)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여타 여진(女眞)·발해(渤海)·고려(高麗)·거란인(契丹인)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나라의 도종의가 쓴 《철경록(輟耕錄)》에서는 이를 한인팔종(漢人八種)이라고 하였다.
<그림 4> 이 자료는 민국시대 상무인서관에서 왕오운(王五雲) 주편의 총서집성본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剳記)》에서 캡쳐한 것이다.
5. 《고대예제풍속만담(古代禮制風俗漫談)》에서 설명하고 있는 달로화적
필자에게는 중화서국에서 문사지식문고(文史知識文庫) 시리즈로 펴낸 《고대예제풍속만담(古代禮制風俗漫談)》 5집을 소장하고 있다.
이 책에는 중국 고대의 예제(禮制)나 풍속(風俗)에 관하여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가끔 이 책을 볼 때가 있는데 예전에 달로화적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서 새삼스럽게 해당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전에 달로화적에 관한 글을 쓰기 몽골말 다루가치에 해당하는 말을 찾아보기 위해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소택중남(小澤重男)이 쓴 《現代モンゴル語辭典》과 중국 상무인서관에서 펴낸 《신몽한사전(新蒙漢詞典)》을 아무리 뒤적여 보아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 원인이 필자 자신의 미숙한 사전찾기 실력에 기인한 것으로 체념하고 해당어 찾기를 포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니라 오늘날의 몽골어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다고 말해 준 것은 바로 이 글을 통해서였다.
이 글의 제목은 《달로화적 풀이(釋達魯花赤)》이다.
필자는 양지구(楊志玖)라는 분이다.
달로화적(達魯花赤)은 몽고 원나라 때의 일종의 관명이다.
달로(達魯)는 몽골말 동사어간으로 압도(壓倒)·압박(壓迫)·진압(鎭壓) 등의 뜻이 있으며, 달로(達魯)에 어미 "花"를 덧붙여 명사로 바뀌었고,
다시 어미 "赤"이 더해지면서 그 의미가 진압자(鎭壓者)·우두머리 등으로 되었다.
오늘날의 몽골어사전에는 이미 달로화적(達魯花赤)이라는 말이 없고,
다만 달로화(達魯花)(daruga)라는 말은 여전히 보편적으로 응용되어 그 뜻은 장관(長官)·수장(首長)이다.
<그림 5> 이 자료는 몽한사전에서 캡쳐한 것이다.
몽골의 건국 초기에는 관제가 매우 간소하고 소박해서 그 본국 내에서는 달로화적이라는 관명이 발견된 바 없다.
달로화적은 몽골이 대외로 발전하고 나서 피정복지구에 설립된 관직이었다.
예를 들어 칭기스칸이 중앙아시아의 호라즘(회회국)을 정복한 뒤에 "달로화적을 두어 그 지역을 감치하였다(置達魯花赤監治之)"라고 하였다
(《원사(元史)·태조기(太祖紀)》.
《원조비사(元朝秘史)》에도 이 일을 기록하여, 달로화적을 "答魯合臣"(즉 chi 다음에 n자가 붙었다)이라 쓰고, 방역(旁譯)하기를 "鎭守官名"(263절)이라고 하였다.
그후 원나라 태종이 금(金)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도 남경(南京)(지금의 개봉)과 중도(中都)(지금의 북경)에 달로화적을 두었다.
원헌종(元憲宗)도 달로화적을 파견하여 "아라사를 진수하였다(鎭守斡羅思)"(《원사(元史)·헌종기(憲宗紀)》.
원세조가 즉위하여 전국을 통일한 뒤에 달로화적의 설치는 더욱 보편화되었다.
달로화적의 직무는 전술한 바와같이 감치(監治) 혹은 진수(鎭守)로서, 당시의 한인(漢人)은 또 이를 감림관(監臨官)이라고 칭하였다
(《원문류(元文類)》 권58 《중서우승상사공신도비(中書右丞相史公神道碑)》). 최초에는 황제 혹은 중신이 파견한 사람으로 황실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해서 한인(漢人)들에게 "선차(宣差)"로도 일컬어졌다.
예를 들어 저명한 시인 살도라(薩都剌)가 일찍이 진강로록사사(鎭江路錄事司) 달로화적으로 출임(出任: 외직으로 관원이 되는 것)하자, 바로 그의 친구들인 우집(虞集)과 간문전(干文傳)으로부터 "진강록사선차(鎭江錄事宣差)로 일컬어졌지만(《안문집(雁門集)》부록), 설령 그러할지라도 녹사사(錄事司)의 달로화적이란 것은 8품의 말단관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청인 조익(趙翼)이 말하기를, "達魯花赤, 掌印辦事之長官。"(《이십이사차기(廿二史剳記)》 권29)라고 하였는 바, 대체적으로 차이가 없다.
실제로는 달로화적이 있는 곳은 바로 이 기관이야 말로 대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는 가장 첫째 가는 소위 수장(首長)을 말하는 것이다.
원세조(元世祖) 이전에는 달로화적의 설치가 아직 정형화되어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칭기스칸은 일찍이 찰팔아화자(札八兒火者)를 황하이북철문이남천하도달로화적(黃河以北鐵門以南天下都達魯花赤)으로 봉한 적이 있고,
원태종(元太宗)은 속가(速哥)를 산서대달로화적(山西大達魯花赤)으로 봉한 적이 있었다. 이런한 것은 죄다 황제가 일시 기분내키는 대로 임명한 것으로 명칭(名稱)과 직수(職守: 직분) 모두가 매우 애매매호하다.
원세조(元世祖) 즉위 이후에 달로화적의 건치(建置)가 비로소 제도화 되었다. 그 정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중앙정부의 주요기구: 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어사대(御史臺)의 장관에는 모두 달로화적이 설치되지 않고 여전히 한인(漢人)의 구제를 답습한 관직을 설치하였고, 중서성(中書省)의 이·호·예·병·형·공 6부 수장도 달로화적이라 부르지 않고, 각부상서(各部尙書)라고 하였으며, 단지 호·예·병·공 4부의 일부 부속기관 중에서 비로소 이 관직이 설치되었다.
추밀원(樞密院)도 역시 단지 일부 부속기관에만 설치되었으며, 어사대(御史臺) 및 각 지역에 분설된 행대(行臺)는 모두 달로화적이 설치되지 않았다.
대체로 한인(漢人)의 구제를 답습한 기구 중에는 죄다 설치되지 않았으나 신설된 기구에는 설치되었으며, 몽골인의 생활관습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든가 재부(財賦: 재화와 부세)를 관리하거나 군대를 영솔하는 여러 기구에 설치되었으며, 그밖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이는 대체적인 개괄일 뿐 전면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2) 지방기구: 행중서성(行中書省) 장관에는 달로화적이 설치되지 않았으나, 로·부·주·현 기구에는 모두 설치되었었다.
달로화적이 각 기관의 최고의 장관인 이상, 그로 인해서 인선(人選)에 대해서는 매우 중시되었다.
최초에는 공로가 있는 사람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 그리고 황제와 가까운 사람들이 임명되는 과정에서 그 중에는 한인(漢人)·여진인(女眞人)과 거란인(契丹人)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원세조(元世祖) 지원 2년(1265)에 칙령을 내려
"각 로(路)의 달로화적은 몽골인으로,
한인(漢人)은 총관(總管)으로,
회회인(回回人)은 동지(同知)로 충임하는 것을 영구한 격식으로 하라!(以蒙古人充各路達魯花赤, 漢人充總管, 回回人充同志, 永爲定制。)"라고 하여 한인(漢人)이 달로화적이 되는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지원 5년(1268)에 칙령을 내려,
"각 로(路)의 여진(女眞)·거란(契丹)·한인(漢人)으로 달로화치로 있는 자들을 그만두게 할 것이며, 회회(回回)·위그르(維吾爾)·내이만(乃蠻)·탕구트(唐兀) 사람들은 종전 그대로 하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회회 등 색목인(色目人)들은 여전히 달로화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원 56년에 또 "한인(漢人)으로서 달로화적에 있는 자를 논의하여 없앴다(모두 《원사(元史)·세조기(世祖紀)》 참조)"라고 하는데 이와같이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명령을 하달하여 한인(漢人)들이 달로화적이 되는 것을 금지한 것은 원나라의 민족 차별 정책의 표현이요, 또한 한인(漢人)들이 지방에서 대권을 장악한 뒤에는 아마도 통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과 동시에 한인(漢人)으로서 달로화적에 있는 자도 적은 숫자가 아니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원대에 편찬된 《지순진강지(至順鎭江志)》의 통계에 의하면, 원세조(元世祖) 지원 13년에서 26년까지 진강로(鎭江路)의 달로화적으로 전후하여 7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몽골인(蒙古人) 1명, 한인(漢人) 3명, 회회인(回回人) 2인, 야리가온(也里可溫)(기독교도) 1명이다. 이는 이 기간에도 한인(漢人)이 달로화적으로 임명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지원 26년에서 원문종(元文宗) 지순 2년(1331)까지 전후하여 15명이 달로화적으로 임명되었는데 전부가 색목인(色目人)이요, 한인(漢人)은 한 사람도 없다.
세조가 제정한 제도가 실현된 셈이다.
달로화적은 몽골 구제와 민족편견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원조 통치의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대예제풍속만담(古代禮制風俗漫談)》(제3집), 중화서국, 86~88쪽 참조)
필자가 위와같은 자료에 대해 장황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려는 것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3장에 나와 있는 목조(穆祖)가 몽골인(혹은 여진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천호소 달로화적이 될 수 있었겠느냐는 일인 학자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곱씹어 음미해 보고자 함이다.
어떻거나 우리는 위와같은 자료의 검토를 통해서 적어도 원세조 이후에는 몽골인이 아니면 결코 원나라의 중요 지방기구인 천호소의 달로화적이 될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차단되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 쿨하게 접근해야 할 것은 쌍성총관부가 있었던 화주(和州) 이북은 고려 공민왕 때 이성계에 의해 구강이 회복할 때까지는 거의 1세기 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당시 원지배하에 고려인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원나라는 그들의 통치하에 있는 여러 민족들을 4등급으로 분류하였다.
원나라가 제1등이요,
색목인 등이 제2등이요,
여진(女眞)·고려(高麗)·한인(漢人) 등은 제3등이요,
제4등은 몽골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중국 송나라의 잔존세력들인 남한(南漢)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따로 《원대의 사등인제》라는 글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6. 《고려사(高麗史)》와 달로화적
필자에게는 국내의 모 대학의 사학과 학생들이 PDF파일로 만든 《고려사》전자책을 가지고 있는데 참으로 유용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검색 기능이 아주 뛰어나서 검색어를 집어 넣으면 순식간에 해당어가 튀어 나온다.
<그림 6> 이 자료는 국내에서 사학도들이 《고려사》를 쉽게 검색하기 위해 정리한 자료이다.
검색창을 보았더니 이 파일은 전체가 2,481쪽에 달하며, 《고려사》 전체에서 달로화적이라는 말이 128회나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기사를 일일이 확인하면 좋은 연구거리가 될 것이다.
특히 몽고에서 고려의 주현에 다루가치 72명을 두었다는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과 관련된 기사이다.
<그림 7> 이 자료는《동사강목》에서 캡쳐한 것이다.
이러한 기사는 조선 숙종 때의 사학자 임상덕(林常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권8 하 고려 고종 19년 1월 기사에서도, 몽고가 주현에 다루가치 72명을 두었다(蒙古置達路花赤於州縣)라는 제하에 "경부(京府)와 주현(州縣)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인을 두어서 이 지역을 감독했다(置京府州縣達魯花赤七十二人以監之·)"는 기록이 확인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설치한 다루가치를 살해해 버렸다는 《원사(元史)·고려전(高麗傳)》 태종 4년(1232) 6월에 "고려왕 철(철: 고종)이 원조정에서 둔 달로화적 72명을 모두 죽이고 배반하여 마침내 왕경 및 여러 주현의 백성을 인솔해서 해도로 도망하였다.
(철盡殺朝廷所置達魯花赤七十二人以叛,遂率王京及諸州縣民竄海島。)"는 기록의 진위 여부이다.
이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서영수 주편의 《중국정사조선전(中國正史朝鮮傳)》 역주편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
"달로화적(達魯花赤)은 몽고어로서 그들의 점령지역 내의 민정을 감시하기 위한 관원의 칭호이다.
여기의 다루가치 설치설은 《원사(元史)·홍복원전(洪福源傳)》이나 《원고려기사(元高麗紀史)》에 실려 있다.
《고려사(高麗史)》 고종 19년 5월 기유조에 '北界龍岡、宣州蒙古達魯花赤四人來'라 하였고, 이어서 동년 7월 임오조에서도 '遣內侍尹復昌往北界諸城奪達魯花赤弓矢, 復昌到宣州, 達魯花赤射殺之。'라고 하여 위의 중국측 기사와 같이 반드시 72인이 주둔하였는지는 미심하다.
몽고의 제1차 침임이 있는 뒤에 설치된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몽고가 고려에 다루가치를 설치한 뒤에 고려에서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는 기록들이 문제시 되고 있다.
충선왕 때의 거유인 이제현(李齊賢)은 달로화적의 분치설(分置說), 더구나 살해 운운은 신용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다루가치의 분치설은 앞에 든 중국측 기사나 고려측 기사로 미루어 이를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이들을 고려측에서 살해하였다는 기록은 앞서 인용한 《고려사(高麗史)》의 동년 8월 기사에 의하면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대장군(大將軍) 민희( 閔曦) 등이 장교들을 시켜 사록 최자온(崔滋溫) 밀사장교들과 같이 다루가치를 모살하려고 했더니 서경인(西京人)이 이것을 듣고 이렇게 되면 우리 서경(西京)도 평주(平州)와 같이 몽고병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이라 하여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고려 정부에서는 최자온을 잡아 가두었는데 이때 서경유수(西京留守) 최림수(崔林壽)와 판관(判官)·분대어사(分臺御使) 육조원(六曹員) 등은 모두 저도(楮島)로 도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해 9월 몽고 관인에 답하는 국서에서 경읍(京邑)의 다루가치들에게는 그 대우를 매우 잘하고 있다는 것과 열읍(列邑)의 다루가치들도 후대케 하고 있는데 간혹 명령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곳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 실려 있다.
또 11월에 몽고에 보내는 진정서에 보면 북계 1,2성의 역민(逆民)들이 그 성의 다루가치들을 유도하여 평민을 살육케 하고 정부에서 보낸 내신까지도 죽였으며, 또 그곳의 반역민들은 난을 일으켜 몽고의 병마(兵馬)가 침입한다고 외쳤다고 한다.
위의 《고려사(高麗史)》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서경을 비롯하여 특히 북계 지방에는 제법 많은 다루가치가 주둔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나 내신 윤복창(尹復昌)이 북계 달로화적의 무기를 탈취한 이유 또한 미심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난동을 금지하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복창이 선주(宣州)에서 달로화적에게 피살된 것은 역시 그들의 무기탈취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 민희(閔曦) 등의 달로화적 살해계획도 실은 그들의 행패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한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달로화적 진살설(盡殺說)은 어찌하여 생긴 것인가. 이것은 역시 추측이지만 홍복원(洪福源)과 같은 반역분자가 몽고군의 재차 침입을 유인하기 위한 허위선전, 허위 보고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서영수 주편, 《중국정사조선전(中國正史朝鮮傳)》 역주편(3), 국사편찬위원회, 390~391쪽 참조)
몽고 달로화적 72명 진살설(盡殺說)은 안정복의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청말민초에 편찬된 《신원사(新元史)·고려전(高麗傳)》에 의하면, "권신 최우(崔瑀)가 고종을 겁박하여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고, 최우가 환관 윤복창(尹福昌)을 북변 여러 성(城)으로 보내어 몽골에서 설치한 다루가치를 몰아내려다가 복창은 선주(宣州)의 다루가치에게 살해되었으며, 민희(閔曦)는 최자온(崔字溫)과 더불어 서경(西京)의 다루가치를 모살하려다가 성민(城民)들이 최자온(崔字溫) 등을 잡아 투항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진상과는 사뭇 다르다.
생각건대, 만약 고려가 원나라에서 설치한 72명의 다루가치 전원을 살해했다면 아마도 몽골족들이 중국 남부에서나 유렵 정복과정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들은 그 주민들과 함께 몰살시키는 처참한 보복전에 직면했을 것이다.2)
《고려사(高麗史)·고종세가(高宗世家)》 고종 41년 년말 기사에 의하면, 동왕 7월 몽골이 차라대(車羅大)를 원수로 하고 홍복원(洪福源)을 길잡이로 한 5천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를 침입해 온 소위 5차의 몽고침입 단 한 차례의 침략으로 당시의 아국의 피해 규모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 해에 몽고군에게 잡혀 간 남녀가 무려 26만 6천 8백여 명이요, 살륙을 당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그들이 거쳐간 고을들은 죄다 잿더미로 변했다.
몽고의 병란이 있은 뒤로 이보다 심한 때는 없었다.
(是歲, 蒙兵所虜男女, 無慮二十六萬六千八百餘人, 被戮者不可勝數, 所經州郡皆煨燼。自由蒙兵之亂, 未有甚於此時也。)"라고 하였다.
《송사(宋史)·고려전(高麗傳)》에 의하면 고려초의 고려의 인구가 기록되었는데 약 2백만 명이라 하였고, 또 어떤 기록에 의하면 개경(開京)의 인구가 10만 명 선이라고 하였는데 이 한 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고려의 인구 10분의 1 이상이 포로가 되었고, 도륙당한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림 9> 이 자료는 《신원사(新元史)》에서 캡쳐한 것이다.
한편, 《고려사(高麗史)·반역열전(反逆列傳)》에 올려 있는 홍복원(洪福源)의 선대는 원래 중국 사람으로 우리에게 귀부했던 사람이다.
그는 결국 고려를 배반하여 몽고에 붙었다.
필자가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았더니 우리나라 역대 인물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泉男生)과 홍복원(洪福源)이 유일하게 명신(名臣)으로 올려져 있음을 보았다.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는 조국을 배신한 만고역적이지만 저들에게는 저들의 통치에 협조한 인물로 그려져 있으니 아이러니칼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 10> 이 자료는 《성경통지》에서 캡쳐한 것이다.
그리고 《반역열전(反逆列傳)》에 올려 있던 또 한 사람의 역신인 이현(李峴)이란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그는 고려 고종 39년 봄 정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서 시랑 이지위(李之葳)와 함께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졌던 사람인데 2년 동안 몽골에 억류당하여 있을 때 자발적인 것인지 아닌지 저들의 회유에 넘어간 것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하옇든 저들의 주구로 변신하여 몽골의 장수 야굴대왕(也屈大王)에게 고려를 침략하도록 부추기고 또 침략을 감행했을 때 그의 향도가 되어 몽골군사를 따라 와서 여러 성의 투항을 권유하여 두 성이 투항하자 야굴대왕의 위세를 업고 스스로 그 성의 다루가치로 자칭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을 통해 실로 우연하게도 《고려사(高麗史)》에도 입전(立前)된 필자의 시조 장일(張鎰)이란 분이 고려 고종 때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얄궂게도 바로 이현(李峴)의 서장관(書狀官)이셨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고려사(高麗史)·이현열전(李峴列傳)》을 인용하기로 하자.
"이현은 고종 때 사람인데 재물에 탐욕스러웠고 남을 중상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찌기 선군별감(選軍別監)으로 있으면서 뇌물로 은을 얼마나 많이 받아 먹었던지 사람들이 은상서(銀尙書)란 별명까지 붙였을 정도였다.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전임되어 몽고로 사신이 되어 갔다가 2년 동안 억류되어 있으면서 야굴(也屈)을 달래어 말하기를, '우리나라 국도는 해도(海島: 섬) 사이에 끼어 있고 공부(貢賦)가 주·군(州郡)에서 나오므로 만약 추수 전에 주·군들을 엄습하면 서울 사람들이 틀림없이 군색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금패(金牌)를 받고 야굴의 길잡이가 되어 몽고병을 따라 와서 여러 성에 투항을 권유하였다.
양근(楊根)·천룡(天龍) 두 성에 와서 위협하여 말하기를, '이번에 양산(椋山)·등주(東州)·춘주(春州) 등 성들에서 모두 항복 않겠다고 버티다가 도륙을 당했으니 너희들은 어서 나와서 항복하라.
만약에 성을 수비하는 장수가 허락하지 않거든 즉시 죽이고 나오라!'라고 하였다.
두 성이 모두 항복하자 이현은 제 스스로 달로화적이 되어서 두 성의 항복한 주민들을 인솔하고 충주성(忠州城)을 70여 일이나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몽고병이 돌아 갈 때에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자기 군중에서 사로잡은 부녀자와 노획한 재물과 보물들을 죄다 제 소유로 만들어 버렸는데 은비녀가 대바구니 하나에 가득하였다.
재추(宰樞)들이 회의하여 말하기를, '이현은 재상으로서 반역죄를 범했으니 그 족속을 멸해야 한다.'고 하여, 이현을 기시형(棄市刑)에 처했고 그 집을 몰수했다.
어떤 사람이 발로 그 놈의 입주둥이를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몇 사람의 은과 비단을 먹어 치웠겠느냐!'라고 하였다.
이현의 아들 이지서(李之瑞)·이지송(李之松)·이지수(李之壽)·이지백(李之柏)·이영년(李永年)을 바다에 던져 죽이고, 그의 처와 누이들, 사위들은 모두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하는 제 스스로 다루가치가 되었다는 말은 몽고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다루가치가 아님 차칭 다루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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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영수씨의 주장은 이병도씨의 주장을 그대로 원용한 것이다.(이병도 주편, 《한국사(韓國史)》(중세편), 을유문화사, 558~560쪽 참조)
2) 1219년 칭기스칸은 서쪽으로 방향을 바뀌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중앙아시아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여 호라즘 국왕 알라딘 무하마드를 징벌하러 갔다가 그가 칭기스칸이 보낸 상인과 사절이 살해당했기 때문에1220년에 2월에 이르러, 칭기스칸의 군대는 이미 중앙아시아의 도시인 부화라(不花剌, Bukhara)를 모조리 약탈하고 1개월 내에 사마르칸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노략질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 대부분을 도살하고 단지 수공업 공장과 건축공장 3만 명만 남겨두었다가 그들을 모두 몽골로 보냈다.(미국 Morris Rossabi 저 조정치 번역, 《쿠빌라이와 그의 세계제국》(KHUBILAI KHAN HIS LIFE AND TIMES), 중경출판사, 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