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연선생일고의.서.순찰사홍세공
번역문해설
홍순찰에게(世恭)
각하께서 남쪽고을의안렵사로영남을도시니,赤子.(적자;백성)들은 넓게맑으신은택을입고
있읍니다.
엎드려 아뢰오니旬宣(순선;순행의뜻)비롯되면서 台體(태체;높임말)沖穆(충목;화평하고
건강함)하시나이까??
敏道(눌연선생의諱 ,스스로를낮춤)는시골구석에頹伏(퇴복몰락하여엎드린다는의미니,
역시스스로를낮추시는어법)하여 스스로고기낚고 나무하는것으로살아갈뿐이오니,
世間의보잘것없는일과는관련코자아니하였읍니다.
그러나 살고있는이고을에 公이던지,私이던지.간에 세력이있다고하야
마음내키는대로하는위인이있으니, 바라건데자세히살펴주시기바랍니다.
本郡은,옛날에는東面의여덟마을에縣倉(현창)이없읍니다.
동쪽으로는경주와연하고,북쪽으로는永川과접하고,남쪽으로는彦陽과밀양으로
연한곳입니다.
本郡,백여리는산곡이매우깊고,마을이서로이어져있으며,
긴강이감돌고있읍니다.
수석이險阻(험하다)장마가조금들어도,通적이나관적(통적,곡식유통.관적;관청에서춘궁기에백성에게곡식을빌려주는일)이불가능하여,백성들이매우고생을합니다.
이고을에삼족당(三足堂)김선생(大有)과逍遙堂,(소요당)박선생(河淡)이있어서
이러한폐단을진정하여건의하였는데, 그때의郡守와監司가社倉(사창;기근때빈민구제를위하여설치한米倉,쌀창고)을처음설치하였읍니다.
法耳山아래東峽의중앙대로에있는번화한거리입니다.
앞에는雲水亭이있어서 우리고을에서 제일경치가좋은곳입니다.
영남에서오는그때使賓과使者들의행차는,으례이곳게머물러쉬었읍니다.
곡식을거둬들이고,나누어주는데道理가골랐으므로 창고는제자리를잡고,백성들은
그혜택을입은지,그뒤로도오래되었읍니다.
그뒤에도,계축년에는一倉을가설하였고,무인년에一倉을증축하여
비축한곡식이五만석이되었읍니다.
倉宇는매우커서 삼십여칸이나되었기에 이것은한때假設한창고는아니었읍니다.
대체로 이러한연고로하여 東面의백성들은 그분들의덕을사모하고 나아가
무궁토록하려고.二公을위하여 사당을짓고春秋로제사지애면서보답코져하였읍니다.
갑자기,임진왜란의변을만나,倉舍는비록무너져버렷으나.담장은형체가있고,
주춧돌은아직온전합니다만, 자손들과,흩어진백성들은重建의힘이미치지못하고
있읍니다.
뜻하지않게도,倉基는이제.郡에사는,貞夫人李氏가 자기땅인데.이氏가戶曺에값을
치루고 자기것이되었다는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어찌 그럴수있다는것입니까??
무릇倉基는진실로官田일수없읍니다.
兩先生께서건의하여 設倉할때 동면백성들이힘을합하여재물을걷고,民田을買得하여
倉舍를營建하였으므로 이제 비록 중건하지는못하였으나 이는실로萬民의公田입니다.
관에서도 팔수없고 개인도살수는없는 이러한이치는 매우명백하여 누구나쉽게 이해할수있는것입니다.
이제李氏의狀辭(문서)를볼것같으면이미본관사또가 이를 (몽허)蒙許하였다는것입니다.
민도(눌연선생)는실로訝惑(아혹:의심)에는심상한사람입니다.
前郡守가重營할것을결정하였으니,감사(監司)는결단코 몽허(蒙許)하지는아니
하였을것이분명합니다.
古賢께서말씀하시길,*自之는子澮로부터연나라를물려받을수없었고,子澮도自之로
부터연나라를되받지못했다***하였읍니다(史記.연소공세가참고)
따라서 나라의창기는만백성의公田이므로,누구가줄수있으며.
누구가받을수있겠읍니까??
그가말한.몽허의설은실로 허망한데서나온것입니다.
息城君,李雲龍이亂中임을틈타서 倉舍가무너질때에 그의 先父母를倉의主山二里쯤
되는곳으로移葬하였으니 모든법리를보더라도,이는말할나위없는것입니다.
夫人이氏가유독 그전철을밟고 戶曺를속이고 황폐한버려진땅이라고,暗稱하였읍니다.
따라서,만민의公基를제집물건으로하고져하니,敏道(눌연선생)는 그연유를자세히
알면서어찌끝내 잠자코있을수가있겠읍니까?
陳荒의땅도 다른사람에게경작시키려면 비록 公法이라도 반드시 주인이없는다음이라야
시행할수있는것입니다.
하물며,倉基는 지난역사가昭然(이치가밝은것)합니다.
삼가輿論을굽어살펴戶曺로帖移(이첩과같은뜻)하여주시기를바랍니다.
公께서내리시는처결은백성들의소망에부응할것이오니,나머지民狀가운데
불필요한것은낱낱이 들지않겠읍니다
불선(不宣;편지글끝에쓰는말.다~~말하지못한다는의미)敏道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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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도(丁敏道, 1553~1635)
정민도의 자는 덕소(德邵), 호는 눌연(訥淵),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 복(復)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이다.
눌연선생은 임진왜란 후 청도지역의 선비들과 우연서원(愚淵書院)에서 경학을 강독하며 예설을 강론하고 후학을 양성한 유학자로,
선조(宣祖)가 그를 남학교수(南學敎授) 겸 구군훈도(九郡訓導)로 임명하여 지역 유생들의 체계적인 교육을 맡겼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사후에는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禮曹參議)로 증직되었다.
▶ <눌연선생일고(訥淵先生逸稿)>
<눌연선생일고>는 조선중기의 유학자 정민도(丁敏道;1553~1635)의 문집으로, 1915년 10세손 정규호(丁圭浩)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문집은 현재 나주정씨 문중을 포함하여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도서관, 성균관대학교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본(木板本). 2권 1책(62張)
목판은 처음 33점으로 판각되었으나 4점은 유실되었다.
서문(序) : 甲寅(1914) 이재집(李在緝), 乙卯(1915) 류필영(柳必永)
발문(跋) : 乙卯(1915) 정대식(丁大植), 정우섭(丁右燮), 정규호(丁圭浩)
권1에는 부(賦) 1편, 시(詩) 11수, 서(書) 4편, 축문(祝文) 3편, 발(跋) 2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2는 부록으로 유사(遺事) 1편, 행장(行狀) 1편, 축문 1편, 묘갈명(墓碣銘), 중수기(重修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書)의 <여홍순찰세공(與洪巡察世恭)>은 정무에 관한 서한으로 청도현의 창고가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으므로, 황폐된 터에 백성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