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명호의청량정사....(淸凉精舍)..
.청량정사(淸凉精舍)
소 재 지 | :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245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245) | |
건 축 주 | : | 이우 | |
건축시기 | : | 16세기 | |
중건시기 | : | 1832년(순조 32), 1900년 | |
문 화 재 | :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4호, 1991-05-14 지정, 정면 5칸, 측면 1칸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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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정사는 자연을 배우고 자연 속에서 배우고 자연이 되고 자연의 마음을 갖고자 하였던 옛 선비들이의 의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놓고 있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청량정사는 퇴계 이황이 주세붕(周世鵬)의 「청량산유록(淸凉山遺錄)」에 발문을 달면서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고 지칭한 것에서 연유한다.
오가산이란 우리 집 산처럼 나의 자연배우기를 이끌어 주었던 중요한 배움터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역 사림은 이황이 청량산을 드나들면서 배우고 닦았듯이, 여기 오산당에서 이황의 족적을 따라 배우고 닦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청량정사는 청량산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청량정사는 정자 전체의 이름이고 오산당은 마루방의 이름이다.
청량정사의 마루방은 상당히 깊다.
지숙료의 마루 쪽 밖으로는 청량산에 관계된 이황의 시 몇 편이 걸려 있다.
오산당과 이황 사이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현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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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는 청량정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이(武夷)의 36동천(洞天)은 세상에 유명하니 회암(주자)선생은 정자를 짓고 노래해 말하기를, ‘나의 샘과 바위에서 살리라.’하였다.
청량의 12봉우리는 해동에 이름이 높으니 퇴도(退陶) 이황 선생은 산놀이의 기록에서 ‘우리집 산’(吾家山)이라 하였다.
이에 우리의 두 선생이 나와 노닐고 감상하는 여가에 경치 좋은 곳을 차지해서 그 인자함과 지혜로움의 끝없는 즐거움을 의탁하였다.”
즉 청량정사는 주희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본따 지은 것이고, 그 안에는 정통 주자학을 계승하는 이황의 자부심이 표현되어 있다.
집의 규모도 그렇다.
오산당은 3칸 건물인데, 이는 무이정사의 3칸 집을 본받아 도산서당의 3칸 집으로 전해주는 연속과 계승이다.
오산당은 작지만, 오산당은 제대로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봉화,명호,북곡리에대하여....
낙동강과 청량산 사이의 북곡리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은 중앙에 청량산을 두고, 아래쪽으로 해발 845m의 산성, 위쪽으로 해발 849m의 문명산 사이에 펼쳐져 있는 산마을이다. 서쪽 영역은 낙동강 줄기가 확정하여 주고, 동쪽으로는 재산면 영역이 나누어준다. 12번 도로의 서쪽 입구 부분에는 북곡이 있다. 뒷실·뒤실이라고도 한다. 원래 안동부에 딸린 재산현 지역이었으나, 1914년 이후 명호에 편입되었다. 낙동강변 마을이고, 북곡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북곡리 위쪽에 산재하는 마을들은 반드시 이곳을 통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이 북곡 본동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옛날에는 여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절터골 아래로 있는 것은 갈평이다. 갈화낙지(葛花落地)의 명당이라 한다. 비교적 넓고 평평한 곳인데, 마을 뒤편에는 왜목이라는 곳이 있다. 낙동강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인데, 임진왜란 때 여기까지 왜병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구름재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운산정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청주정씨 정사성이 왕의 화상을 가지고 피난하여서 그 공으로 하사받은 땅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북곡리는 6·25 때 격전지이지만, 이곳만은 병화를 입지 않았다. 북장곡의 동편으로는 윗뒷실이 있고, 또 그 동편으로는 옥산이 있다. 그 후 영천이씨·진성이씨가 들어와 제법 큰 마을을 이루었다. 이곳 앞에는 청량산 박물관이 있다. 이 길의 중간지점에 약간 못 미친 곳에서는 청량사로 오르는 길이 갈라진다. 청량사는 청량산 일원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청량산의 동편으로는 청량정사·오산당이 자리 잡고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리로 피난하였다고 하며, 공민왕당·오마대 등이 여기에 있다. 14번 도로의 동쪽 끝으로는 윗청량골이 있다. 이곳을 벗어나며 길은 오르막으로 접어들고, 다시 심한 내리막길이 되어 재산의 남면 쪽으로 내려선다.
오산당에대한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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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씨 송당공파 족보에 의하면 이우가 청량산에 오산당을 지었고, 퇴계 이황 등이 이 집에 출입하며 배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퇴계집』의 여러 부분에서 이황이 청량산에 들었을 때 절집에 머물고 있는 모습과 배치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황 시대, 또는 이황 이전 시대에 오산당이 있었다는 견해는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
오산당의 건립과 관계된 사정은 아마도 척암 김도화가 쓴 「오산당중건기」를 통해 알아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오산의 당은 (이황의) 후인들에 의해 세워졌으니, 이른바 시(詩)는 이루어졌으되 집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건릉 임진년에 일부 뜻 있는 선비들이 원근 각 지역의 인사들과 상의하여 비로소 3칸의 당을 자운봉 아래 세워 선생의 유지를 미루어 이루어서 여러 선비들의 여망에 부응하고 도리를 강의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곳으로 삼았으니, 편액하여 오산당이라고 한다.”
이황의 후손 이만여가 쓴 「오가산지」의 후기에 의하면, 오산당이 지어진 건릉 임진년은 순조 임진년, 그러니까 1832년이라고 한다.
이 처음의 오산당은 1896년(고종 33)에 병화로 소실되었다.
오산당의 중건은 1900년(광무 4)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