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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열전의홍복원가족기록....

어풍대08 2013. 9. 2. 23:18

 그 후 홍복원의 여러 자식은 아비의 죽음을 유한으로 여기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함하였다.
  원종 2년에 홍다구가 아비의 원통한 유한을 씻어 달라고 청원했더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네 아비를 바야흐로 애용할 무렵이었는데 형벌을 잘못 적용했다. 기왕의 잘못된 것은 유신(維新)의 혜택으로 씻어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너는 이미 내려 준 호부(虎符)를 띠고 아비의 관직을 계승하여 총관이 되어 투항한 고려 군민(軍民)을 관할하라!”라고 하였다.
  원종 12년에 홍다구가 조서를 가지고 와서 왕의 보고서도 배례(拜禮)를 하지 않고 중서성의 공첩으로 숙부(叔父) 홍백수를 찾아 내라고 요구했다.

 왕이 홍백수에게 추밀 부사 벼슬을 주고 치사(致仕)시켜 보내었으나 홍다구는 고의로 질질 끌면서 마침내 함께 데려 가지 않았다

. 그것은 추측컨대 황제의 노염을 격동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때 관노(官奴) 숭겸, 공덕 등이 반란을 일으켜 달로화적을 살해하려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후 국문당한 일이 있었는데 홍다구는 숭겸 등으로 하여금 본국을 연루시키고 이것을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서울을 일거에 강점해 보려고 은밀히 달로화적 탈타아(脫朶兒)를 유인해서 의논했다. 그런데 몽고 법에 일을 의논하여 합의되면 모자를 벗어서 동의를 표시하는바 이때 홍다구 등은 모두 모자를 벗었으나 탈타아는 모자를 벗지 않고 그 사건을 공명하게 처리하였으므로 나라가 화를 면했다.
  홍다구가 진도(珍島)로 가서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할 때 그의 일가 족속들이며 무뢰배가 많이 따라갔었다.
  이듬해 왜선(倭船)이 금주(金州)에 정박하고 있었던바 경상도 안무사 조자일(趙子一)은 원나라에서 우리 나라가 일본과 연계를 가지고 있다고 책망할까 염려하여 왜선에 비밀 명령을 전해서 돌아가게 했다.

홍다구가 이 소식을 듣고 조자일에게 엄한 문초를 가하며 사건을 만들어서 황제에게 보고하기를
  “고려가 왜나라와 서로 통한다”라고 했다. 왕은 장위(張暐)를 보내서 조자일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루는 홍다구가 갑자기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아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으며 왕은 좋은 말로 그를 어루만져 주었다.
  원종 15년에 황제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홍다구를 감독 조선관 군민 총관(監督造船官軍民摠管)으로 임명하였던바 홍다구는 기일을 엄하게 한정하고 독촉을 심히 급하게 했으며 부부사(部夫使)를 각 도로 보내서 공인(工人)을 징집하였으므로 전국이 소란스러워졌다.
  황제는 홍다구를 제점 고려농사(提點高麗農事)로 임명하고

 또 동정 부원수(東征副元帥)로 임명하였다.
  홍다구는 충청도에서 징집하는 키잡이(梢工)와 사공(水手)들이 기일에 당도 못했다 하여 부부사 대장군 최면(崔沔)을 곤장 치고 태부경(太府卿) 박휘(朴暉)로 그를 대신케 했다.
  홍다구는 홀돈(忽敦) 김방경(金方慶) 등과 함께 일본을 정벌했다.
  충령왕 3년에 황제가 또다시 일본을 정벌코자 홍다구를 정동 도원수(征東都元帥)로 임명하였는데 당시 위득유(韋得儒) 등이 김방경을 모해코자 허구 날조로 무고하여 큰 옥사가 벌어졌다.

 홍다구는 동경에 있으면서 이 소식을 듣고 황제에게 말하고 고려로 와서 심문하였는바 김방경에게 허위자백을 받아 가지고 그 화를 나라에 들씌우려고 극히 참혹하게 고문하였으나 미구에 황제가 소환해서 돌아갔다.

 이 일은 김방경 전기에 기술되어 있다.
  홍다구는 항상 본국을 원한했으나

홍군상은 영녕공(永寧公)을 원한할지언정 감히 조국을 배반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본국을 위해서 이로운 일을 적극 방조하고 해 되는 일이면 제거하기에 극력 힘썼다.
  원종 18년에 황제가 또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배를 짓게 하려고 하니 홍군상이 건의하기를
  “전쟁을 하는 것은 지극히 큰 일이니 먼저 사신을 고려로 보내서 문의한 후에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도 그렇게 여기고 홍군상을 보내서 문의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말하기를
  “내가 입조(入朝)하지 않는 나쁜 자들과 인접하여 있으니 마땅히 자력으로 토벌해서 적은 힘이나마 다하겠다”라고 하였다.
  다음해에 원나라에서 홍군상의 형 홍웅(洪熊)의 셋째 아들 홍파두아(波豆兒)를 파견해서 조선 사업을 관리하게 하였는바 홍파두아는 멀리 왕궁을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직무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니 참으로 부끄럽다”라고 하였으며 그는 재상들에게 깍듯한 예의를 갖추어 아주 공손하게 대했다.
  원종 20년에 황제가 죽자 홍군상이 승상(丞相) 완택(完澤)에게 제의해서 일본 정벌을 중지케 하였다.
  원종 21년에 왕이 홍군상의 공로를 가상히 여기고

 삼한벽상 공신(三韓壁上功臣) 칭호와

 삼중대광 익성후(三重大匡益城侯)로 봉하였다가

이어 도첨의 중찬 수문전 태학사 감수국사 세자사 임안공(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世子師臨安公)으로 봉했다.
  나라 제도에 과거에서 급제한 사람이 아니면 문한관(文翰官)이 되지 못했다.

최이가 국정을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스스로 감수국사(監修國史)까지는 했으나 그래도 수문전(修文殿)은 겸하지 못했는데

 홍군상은 당시 원나라 집현 태학사(集賢太學士)였으므로 그 벼슬을 할 수 있었다.
  홍백수의 아들 홍선(洪詵)은 여러 관직을 거쳐 첨의평리로 승진했으며 충선왕 초에 찬성사로 임명됐다가 이어 인성군(麟城君)으로 봉해졌고 그 후 강녕군(江寧君)으로 고쳐 봉해졌으며 충숙왕 5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에 홍수(洪綏), 홍탁(洪鐸), 홍익(洪翊)이 있었다.

서자 명리 화상(明理和尙)은 탐욕하고 횡포하며 교만했다.

 그의 누이가 원나라 총신(寵臣) 역랄적(亦剌赤)에게 시집 갔으므로 명리 화상도 따라가서 드디어 역랄적의 애호를 받았다.

 그는 일찍이 어향사(御香使)로 되어 와서 평리 홍순(洪軍)의 딸을 강간했으므로 그 여자의 종형(從兄) 홍승연(洪承衍)이 면대해서 욕했더니 명리 화상은 행성(行省)에 고소해서 홍승연을 가두었다.
  장위(張暐)는 흥해(興海) 사람으로 직위가 중찬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81세에 죽었으며 시호는 순정(純靖)이었다

그는 무슨 공로나 기능은 없으나 홍군상 등이 원나라에서 벼슬하면서 본국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대개 사신을 원나라로 보낼 때는 많은 경우에 장위로서 부사(副使)를 삼았고 벼슬이 최고위에 이르렀다. 장위의 아들 장석(張碩)은 과거에 급제하고 판밀직사사 벼슬까지 했다.
  유종(柳宗)이란 자는 당초에는 최항에게 아부해서 강화 판관(江華判官)이 되었는데 그 후 김준(金俊)이 최항의 아들 최의를 죽였을 때 유종과 문황(文璜)이 김준을 죽이려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섬으로 귀양 갔다.
  유종은 일찍이 과부가 된 누이와 한 방에서 자다가 호랑이가 벽을 뚫고 들어와서 그 누이를 물어 가고 유종의 한쪽 팔을 물어 끊었다. 그 후 유종은 또 홍다구에 아부하여 국가 비밀을 말하기를 즐기다 가죄를 지고 가산을 몰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