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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일대의근세격전지!!

어풍대08 2013. 2. 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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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2節 近代 激戰地

 


第 2節 近代 激戰地
1. 奉化에서의 10.1事件
10.1暴動은 8 ․15解放後 처음으로 左右翼間 一大衝突事件인데

이 騷擾는 大邱에서 처음 始發하여 全國的으로 擴散된 큰 事件이다.

本郡에서는 1949년 9월 28일 당시 慶尙北道 人民委員長이었던

 孫基榮의 指令에 따라 奉化郡人民委員會長으로 있던 鄭夢錫에

 의해 郡內 左翼團體인 民主靑年同盟,

 勞動組合, 民主女性同盟 等에 指示하여 關爭決死隊를

組織케 한 다음 이들 가운데 核心이 되는

 極烈分子와 各面 人民委員會代表等 約80餘名을

奉化邑 酉谷里 靑巖亭에 召集하여 大邱를 비롯한 慶北道內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大小事件의 경위를 說明하여 奉化에서도

警索署等 官公署를 襲擊하는 方法을 가르치며

 10月 3日에 擧事할 것을 謀議하였다.
左翼陣營에서는 10月 3日 奉化郡廳에서 無償으로

 救護準를 支給한다고 속이며 奉化邑 酉谷里의

住民 300名을 비롯 都村里 住民 200名과 石坪里

住民 300名 등 모두 700餘名에게 기만과 煽動으로

 動員하여 이들을 앞잡이로 세워 郡廳所在地를 向해 몰려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重大한 情報를 入手한 金永模署長은 待機하고 있던

警泰官들에게 九九式小銃과 三八式 小銃(日帝武器)으로 武裝시키고

 이들을 陣頭指揮 現地에 出動하여 無謀한

不法集會에 對한 解散을 종용하였다.

그들은 不應하고 오히려 投石戰으로 몰려오고 있어

부득히 空砲를 發射하며 3時間餘의 接戰을 通해 不法集會를

鎭壓解散시키고 主謀者 鄭夢錫, 權孝燮 등을 遠捕함으로써

 一觸卽發의 危機를 未然에 防止시키고 治安을維持한

8·15 以後에 처음 일어난 最大事件이었다.
2. 2.7事件과 法田支署의 被襲
2.7騷擾는 美軍 治下에서 우선 南韓만이라도 民主獨立政府를

 樹立해야겠다는 國民大多數의 意思로 우선 새政府樹立에

전제가 되는 制憲國會를 構成하기 위해 國會議員總選擧를

1948年 5月 10日로 日程을 定하고 있었다.
그런데 左翼系에서는 政府樹立을 反對하며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아니하고 깊은 山과 땅굴 속에서 避身을 하며

밤에는 山間 마을에 나가 暴惡한 선동과 만행을 敢行하고

 낮에는 山間奧地의 道路를 파괴하거나 電線을

切斷하는 行爲로 官憲과 距離가 떨어진

農村地域은 安逸한 날이 없었다.

 이러한 狀況속에서 1948年 2月 7日을 左翼系에서는

 總選擧反對 示威의 날로 定하고 있어 本郡에서는

 森嚴한 警戒를 펴고 있었는데 郡內에서 가장 無事한 地方으로

생각하고 있던 法田面 管內에서 多德鑛業所(楓井里葛坊)의

 勞務者였던 강상원, 장봉임 等의 主動下에 無智한 勞務者 500餘名이

 2月 7日 午後 1時경에 法田支署를 急襲하여 警祭官이 所持하고 있던

九九式銃을 빼앗고 支署主任 閔基鎬警査를

 비롯한 3名의 警寮官을 拉致하고 集團的으로

鷗打와 監禁을 하고 法田面 所在地를 돌며 總選擧

反對口號를 외치며 示威(데모)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不祥事의 情報를 入手한 奉化署에서는

搜査主任 金鳳生警衛를 비롯한 17名의 武裝警索官을 急派시켜

 “데모”를 鎭壓하고 姜相元을 비롯한

主謀者를 逮捕하고 事態를 收拾하였다.
3. 叛亂軍의 襲擊과 才山支署의 燒失
大邱에 있던 國防警備隊 第6聯隊에서 左翼系 軍人에 對한

 肅軍措置에 抗拒한 叛亂軍의 一部가 逃亡하여 明湖面 北谷里에

 潛入하여 淸凉山一帶에서 隱身하던 地方共匪와 合勢한

 暴徒 約70餘名이 1949年 1月 16日 밥 11時의 夜陰을 利用하여

 才山支署를 襲擊하였다.
阝曷支署를 지키고 있던 主任 李宰款警査 등 11명의 警祭官과 民保團員 15名 等 26名의 兵力과 約 2時間에 걸친 一大交戰이 展開되었다.

不幸하게도 李宰救主任의 負傷으로 支署를 지키던 兵力이 士氣를 잃고 “바리케이트” 밖으로 撤收하자 共匪들은 內部로 侵入하여 放火를 敢行함으로써 支署廳舍는 瞬息間에 災難被害를 입었다.

 支署를 불지른 共匪들은 새벽을 期해 安東郡 山面쪽으로 逃走한 이 事件은 郡內에서 처음 일어난 血戰였다.
이 戰鬪로 警寮官 3名이 負價하고 廳舍가 全燒한 被害를 입었다.

 急報를 받은 奉化署에서는 保安主任 李甲成警衛 등 26名의 경찰관을 急派시켜 假廳舍를 짓고 民心狀拾을하였다.
4. 明湖面 管內에서의 共匪討伐戰鬪
(1) 義城警察署 特警隊의 被襲
1949年 2月 13日 午後 1時頃에 산에 있던 共匪 300名(推定)이 才山支署를 襲擊한다는 情報를 받은 奉化警奈署는 討伐支援部隊인 義城署 特警隊의 村經仁警衛가 引率하는 小隊兵力과 奉化署 季亨馥警査로 하여금 分帶兵力을 이끌고 現地에 出動하도록 命令하였다.

 支援部隊가 明湖商 北谷里에 이르자 潛伏하고 있던 共匪 約 200名이 奇襲을해 옴으로서 不得已 緊急避難하였으나 警査 梁大岩, 朴性烈과 巡警 申鉉五, 朴河龍 等4名이 戰死하고 警衛 村經仁, 警査 李亨馥, 金亨洙와 巡警 司空祥, 張性鎬, 朴長洙, 金允煥 等 7名이 負修을 입는 被害를 當하였다.
(2) 淸凉山 血戰
1949年 7月 15日 明湖商 北谷里의 淸凉山主峰인 義湘峯 아래에 있는 “병풍바위” 一帶에 共匪 約 170名이 “아지트”를 構築하고 있다는 情報를 받은 奉化警察署長 楊弘植警監은 卽時管內에 駐屯한 陸軍第16聯隊 1大隊(山虎部隊)와 合同作戰計劃을 樹立한 다음 楊署長은 경찰兵力 50名과 大韓靑年團員 24名 等 74名을 인솔 現地로 出動하고 山虎部隊에서는 2個小隊가 경찰의 뒤를 따라 현지에 도착한 다음 淸凉山을 포위한 다음 압축戰을 펴는 일대 血戰을 展開하여 共匪 26名을 射殺하고 九九式小銃 等 武器 다수를 노획하는 큰 戰果를 거두었다.

 이 戰鬪에서 韓靑團圓 金振壽 1名이 戰死하는 被害를 입었다.
(3)淸凉山 殘匿掃讀
1949年 8月 12日 共匪들이 殘黨이 小川面 西川里의 將軍鑛山 附近을 거쳐 日月山쪽으로 入山하고 있다는 情報보고를 받은 才山支署에서는 警察遊擊隊員 10名을 비롯 韓靑團員 李相俊 등 14名을 포함한 25명을 앞질러서 才山面 葛山里에 急派시켰다

現地에 到着한 경찰은 共匪들의 進路를 따라 淸凉山까지 추적한 다음 가까운 距離에서 射擊戰을 펴 4名을 射殺하고 小銃2정과 탄약을 多數 노획하는 戰果를 거두었다. 多幸히 我軍의 被害는 없었다.
(4) 明湖面 所在地의 被襲
1949年 11月 14日 午後 9時頃에 太白山地域을 거점으로 갖은 蠻行을 하여 오던 共匪 約 150名이 초저녁의 夜陰을 期해 明湖支署를 襲擊코자 銃擊戰을 가해 오자 待機하고 있던 警寮官은 敵을 向해 勇敢하게 應射하는 反擊戰이 展開되었다.

支署를 占領코자 한 目的을 達成하지 못한 共匪들은 明湖面所在地에 侵入하여 金融組合(現在의 農協)을 불태운 다음 醴造場과 右翼團體 要人들의 住宅을 찾아 放火하고 民保團長 郵龜燮을 비롯한 5名의 人士를 殺害하고 逃走하였다.

 이 事件으로 공공건물 1棟과 민가 3棟이 全燒되고 5名이 人命被害를 입었다.
(5) 淸凉山의 共匪 “아지트” 急襲
1949年 12月 9日 共匪들이 山에서 내려와 民家를 털고 逃走하였다는 申告를 받은 才山支署에서는 警察官 3名과 韓靑團員 8名 등 11名을 急派하여 淸凉山 義湘峯 아래서“아지트”를 發見하고 集中射擊戰을 펴 共匪 5名 全員을 射殺하고 小銃 3정과 食糧, 衣類 等 多數를 노획하는 戰果를 거두었다.
5. 日月山 共匪討伐作戰에서의 凱歌
太白山을 活動 근거지로 오지를 찾아다니며 散發的으로 亂動을 敢行하여온 共匪 約30名이 才山面 東面里에 所在한 日月山 아래 山 기슭에 숨어 있다는 情報를 받은 奉化警察署에서는 査察刑事 5名과 韓靑團員 6名 等 11名을 構成員으로 하는 유격대를 編成하여 現地에 急派시켜 討伐토록 任務를 부여하였다.

이들은 1949年 11月 8日 한밤중에 東面里에 도착하여 搜索中 “갯밭골”에서 敵을 發見 包圍綱을 압축하고 熾烈한 銃擊戰을 展開하여 7名을 射殺하고 칼빈小銃1정, 九九式小銃 2정을 비롯 彈藥과 食糧 多數를 노획하는 凱歌를 올렸다.

 이 戰鬪에서 警察被害는 없었다.
6. 池龍浩署長 殉職
1949年 6月 17日 才山支署가 約 200名의 武裝共匪에 의해 襲擊을 받고 있다는 急報를 받은 奉化警察署長 池龍浩警監은 警察官 20餘名을 비롯하여 金東旭 奉化郡內務課長, 金泰洙 大韓靑年團 奉化郡團長 等 公務員과 靑年團員 46名의 人力과 武器, 食糧 等을 3臺의 車輛에 分乘시킨 다음 才山으로 가던 중 明湖面과 鳳城面의 面境界地點인 “미륵재”에 이르자 道路의 兩便 山陵線에 潛伏하고 있던 武裝共匪 약 100名이 集中으로 射擊하여 오자 車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全滅당할 危機임을 생각한 池龍浩署長은自動車를 즉시 멈추게 하고 용감하게 뛰어 내려가 敵들에게 警察署長이라는 身分을 밝히고 같이 탄 警察官이나 民間人은 責任이 없는 사람들이니 本人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은 돌려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共匪들도 支署長의 殺身成仁의 忠勇精神을感歎하고 池署長의 遺言에 따라 生存者들의 옷을 벗기고 돌려보냈다.

共匪들은 池署長을 殺害한 다음 自動車 3臺를 불태우고 車輪에 積載한 食糧과 武器와 衣服을 奪取하여 逃走하였다.

이 事件 現場에서 殉職한 人士는 池龍浩 警察署長을 비롯하여 警査 辛淸一, 巡警 柳燮, 長泰植 等 警察官 4名과 大韓靑年團(韓靑) 奉化郡團部의 團長 金泰洙, 總務部長 金斗汝, 監察隊員 嚴吉守 등 8名이 殉節하고 나머지 38名은 九死一生으로 生還하였다.
奉化群民들은 殉職者 8名의 合同慰靈 群民祭를 擧行하는 한편 故池龍浴 서장의 忠節을 길이 後世에 거울로 삼기 위해 精誠을 모아 “미륵재”에 1970년 10월 15| 殉職碑를 建立하고 每年 6f 6日 顯忠日을 期해 郡內 機關團體長을 비롯하여 學生과 住民들이 故人의 장한 忠節을 欽慕하는 追幕式을 擧行하여 오고 있다.
7. 春陽面 管內에서의 對共戰鬪
(1) 慶北警察局 特警隊의 人民軍遊擊大隊擊退
6․25事變이 일어나고 首都서울이 共産軍의 손에 넘어가자 北韓 共産黨은 赤化統一을 앞당기겠다는 野慾으로 速戰速決의 意圖下에 人民軍 遊擊隊를 編成하여 江原道 三陟地區에 上陸시했다.

 이들이 1950年 7月 3日 小川面 縣洞里에 候透하기 始作하었다.
郡內에 駐屯한 慶北警察局 特警隊, 基幹 戰鬪大隊 第5中隊와 奉化警察署 戰鬪隊가 즉시 小川面에 出動하여 徹底한 情報蒐集과 더불어 要所 要所에 警察力을 埋伏시키고 共産軍 유격대를 發見하는데로 集中的인 射擊을 퍼부으므로 共産軍遊擊隊는 蘇聯製의 莫强한 重火器를 所持하였음에도 急襲에 이겨내지 못하고 逃走할 수밖에 없어 一部는 明湖面의 淸凉山을 거쳐 蔚珍方面으로 敗走하고 다른 一部 兵力은 才山面 所在地에 侵入하였다가 日月山을 거쳐 蔚珍地方으로 擊退시킨 戰果를 거두었었다.

 이 戰鬪로 警察被害는 없었으며 共産軍은 相當數가 死傷하였는데 正確하게 把握할수가 없었다.
(2) 北愧 第5師團 先發隊와 羅北塘戰鬪
三陟海邊에 上陸한 人民軍 第5師團 先發隊의 兵力 約 1,300名이 黃池(太白)를 거쳐 上東(寧越郡 上東邑)에 進入한 다음 春陽面을 향해 牛峙里 金井鑛山 쪽으로 行軍하고있다는 情報를 받은 慶北警察局 特警隊에서는 基幹戰鬪大隊의 第5中隊長 柳佑貞 警監으로 하여금 2個小隊兵力을 이끌고 侵入하는 愧儡軍을 沮止하도록 作戰命令을 내렸다.
1950年 7月 7日 午後 6時頃에 牛口치(우구치) 下金井에 到着하여 敵情을 探知한 結果 愧儡軍은 正規軍으로 兵力은 2個大隊에 1,300名으로 推定되는데 大砲와 機關銃, 迫擊砲로 重武裝하고 騎馬兵까지 따르고 있어 “칼빈”小銃을 갖춘 2個大隊의 警察兵力으로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對抗할 수 없다고 判斷을 하고 撤收를 하였다.
愧儡軍은 沮止하는 我軍이 없으므로 西碧과 艾堂里를 거쳐 春陽을 향해 南下를 하고 있었다.

 警察에서는 春陽을 防禦하기 위해 第2小隊長이었던 邊榮根 警衛를 春陽面 宜陽里 雲谷部落의 北쪽에 位置한 속칭 羅北塘(비녀 沼 옆)에서 岩石을 防禦삼아 埋伏을하며 愧儡軍의 進入을 기다리며 銃擊을 準備하고 있었다.
그런데 春陽面 石峴里 “미찌골” 入口에 位置한 “투구봉”에서 우리 警察과 銃擊戰이 展開된 다음 共産軍은 兩面으로 나누어 搜索隊를 2個組로 編成 1個組는 西洞里 春陽中商業高等學校의 뒷山 陵線을, 다른 한 組는 共同墓地 뒷산 稜線을 通해서 들어오고 主力部隊는 道路를 通해 進入하여 오고 있었다.

1950年 7月 8日 午前 5시경 마침내 主力部隊와의 一大交戰이 展開되고 있었는데 敵의 搜索隊까지 加勢하여 3方面에서 重火器를 利用하여 攻擊해 옴으로서 我軍은 戰意를 잃고 撤收하게 되자 春陽市街地는 敵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 戰鬪에서 共産軍의 死傷者는 數拾名에 이르렀고 警察에서는 特警隊 所屬 邊榮根警衛를 비롯하여 巡警 金炳用, 鄭然必, 徐丙吉, 朴斗夏, 金圭俊, 奉化署所屬의 巡警 權元變, 徐丙圭 等 8名이 戰死한 戰鬪였다.
(3) 春陽市街地의 爆擊과 奪還作戰
1950年 7月 8日 午前 7時를 기해 春陽을 占據한 愧儡軍은 地方의 共産地下 組織인 南勞黨員(일명 빨치산)들과 규합하여 住民들의 私有財産인 소, 돼지, 닭 등을 奪取하여 굶주렸던 배를 채우며 避難을 못 가고 집을 지킨 右翼陣營 人士들의 家族을 殺害하며 春陽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와 같은 實情 아래 春陽을 꼭 奪還코자 하는 作戰計劃으로 7月 10日 유엔軍 爆擊機 1個編隊가 날아와서 6 ․25 開戰이래 처음으로 春陽을 爆擊하여 市街地의 半이 잿더미로 변하였다. 한편 奉化警察署 部隊를 비롯하여 慶北特警隊 第5中隊와 피난 중인 江原道 警察部隊 그리고 國軍部隊가 合同하여 7月 10日과 7月 11日의 2日間 奪還作戰으로 共産軍을 小川方面으로 擊退시키고 7月 12日 마침내 소망하던 春陽을 奪還하기에 이르렀다.
이 奪還作戰으로 爆擊과 銃拏으로 인해 愧儡軍의 死傷者는 150여명에 이르렀고 軍馬가 20餘마리 燒死하였다.

 다행히도 我軍被害는 없었으나 市街地 爆擊으로 住宅을 잃은 戰災民이 數百餘名에 달하는 被害를 입었다.
(4) 第2次 羅北塘 戰鬪
1950年 7月 13日 午後 4시쯤이다. 愧儡軍 후속部隊는 春陽이 奪還된 줄 모르고 自動車와 馬車에 軍需物資를 싣고 意氣양양하게 春陽을 향해 進入해 오고 있다는 情報를받은 奉化警察署 戰鬪小隊와 大韓靑年團 春陽監察隊員이 合同하여 4日前 邊榮根 警衛가 戰死한 羅北塘 要塞에서 埋伏하고 있다가 愧儡軍 支援兵力이 20m 전방 射程距離에 이르자 不時의 銃擊戰을 展開하여 20여명을 射殺하고 迫擊砲를 비롯한 重火器 등 30餘門과 彈藥 數十萬發 그리고 戰略 軍需品을 多數 노획하는 凱歌를 올리며 7月 8日의 패배를 雪辱 하였으며 我軍被害는 없었다.
(5) 無敵의 城 西碧支署 死守
1950年 12月 8日 午後 3時 해가 中天에 있는 白晝에 西碧의 높은 산마루 위에서 蘇聯製 多發銃 소리가 들리자 西碧支署主任 田三樂 警査는 支署의 周圍에 鐵壁같이 쌓은 5個의 “바리게이트”에 警祭官과 義勇警察인 花郎隊員을 緊急히 配置시켰다.
支署 앞 文殊山 기슭에 數千名의 人民軍들이 武裝을 한 채 산을 내려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不過 30分뒤에 이들이 支署周圍 l00m선까지 進入하여 2重 3重으로 支署를 包圍한 다음 치열한 銃擊戰을 加하여 왔다.

 西碧支署에 몰려 온 人民軍은 愧儡軍 第10師團所屬 正規軍으로서 몰려온 兵力은 2.000명 線이 넘었다.
이 北愧軍은 韓國軍과 “유엔”軍의 仁川上陸作戰으로 말미암아 北쪽으로 撤收하려는退路가 차단되어 부득이 江原道와 京畿道에서 다시 南進할 수밖에 없어 江原道와 隣接한 西碧에 들어와 據點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西碧支署의 兵力은 主任 田三樂 警査의 摩下에 正規職 巡警 16名과 義勇警察(花郎隊員) 60名을 包含하여 77名이었는데 낮이었던 關係로 外廓地 里洞에 巡警 出張中인 자를 除外하고 40여명이 待機하고 있었다.
이날은 戰爭은 12月 8日 午後 3時부터 그 翌日인 12月 9日 새벽 4時까지 무려 13時間에 걸친 血戰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西碧支署에는 다행히 그 해 11月末경에 軍部隊가 주둔하다가 移動할 때 使用하다가 남은 實彈 約 60萬發(GMC 트럭 1臺)이 保管中이었는데 이 寶彈을 全量 消耗하였으며 또한 酉碧支署를지키는데 불과40여명의 警察官이 2,000名이 훨씬 넘는 正規軍과 싸우는데 얼마나 善戰故鬪하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支署를 死守하던 40여명의 兵力가운데 戰死者가 14名, 戰傷者가 12名 除外하면 20名이 2,000名과 對峙하는 1당 100으로서 우리 警察戰史 뿐만 아니라 韓國戰史에 본보기로 길이 새겨 두어야 마땅하겠다.
酉碧支署 死守의 血戰에서 勇敢히 戰死한 警察官은 巡警 金基漢, 李漢洙, 金學鎭, 李龍浩, 金泰雲, 李泰敎, 林淳福, 琴敎淵, 金守鎭으로 9名이며 義勇警察(花郎隊員) 5名과 합하여 모두 14名이다.

戰傷者는 巡警 朴台緖, 權泰淳, 朴京達, 李錫柱, 權斗淵, 柳思燮, 權泰甲, 權五圭, 金命鎭, 金長鎭, 池元泰, 韓相圭 等 12名이었다.

 西碧血戰에서의 戰果는 敵財殺 61名이며 未確認된 死傷者數는 300餘名線이 넘을 것으로 推定된다.
8. 共産黨 殘匪 掃蕩作戰
(1) 葛山地區 戰鬪
1950年 12月 2日 午後 2時경 才山面 葛山里 마을 뒷산에 人民軍 敗殘兵 約 4百名이 出現하였다는 住民들의 提報를 받은 奉化警察署에서는 警査 朴泳鎬로 하여금 小隊兵力을 이끌고 나가 討伐하도록 指示하였다.
命令을 받은 一行은 즉시 現地에 到着하여 敵情을 살피고 난 다음 夜陰을 期해 奇襲攻擊과 더불어 約 2時間에 걸친 熾烈한 交戰이 展開되었다.

 我軍의 兵力을 모르는 愧儡軍 敗殘兵들은 奇襲공격에 굴복하고 敗走하였다.

이 戰鬪에서 警察官 1名이 戰死하고 警祭의 戰果는 射殺 3名, 人民軍小銃 3정을 노획하는 戰功을 거두었다.
(2)大峴지구 戰鬪
1951年 3f 2日 午後 3時경 石浦面 承富里에 人民軍 敗殘兵 約 80名이 出現하였다는 住民情報를 받은 大峴支署主任 警査 朴泳鎬는 警察官과 花郎隊員 20名을 이끌고 現地에 出動中 敵에게 發見되어 愧儡軍의 奇襲을 받아 戰果를 거두지 못하였다.
(3) 古善里 桃花洞 戰鬪
1951年 6月 19日 午後 1時경 奉化警察署 殘匪掃蕩遊擊隊장 警査 孫盛萬이 이끌던 25名의 遊擊隊員들이 小川, 春陽 등 本郡의 北部地域에서 殘匪掃蕩 搜索戰을 展開하던中 小川面 古善里 桃花洞에 있는 두리峯에서 愧儡軍 敗殘兵 約 50名을 發見한 뒤 이들을 誘引 約 1時間餘에 걸친 交戰으로 愧儡軍 5名을 射殺하고 小銃 5정과 많은 彈藥과 携帶品을 노획하는 戰果를 거두었다.

 이 戰鬪에서 巡警 沈德用이 戰死한 人命被害를 입었다.
(4) 南勞黨 奉化郡黨 掃蕩
1951年 11月 14日 새벽 6時경 奉化警察署 査察係 特殊工作員들이 才山面 東面里 日月山 기슭에 南勞黨 奉化郡黨이 이곳에 숨어 據點을 確保하고 있음을 探知하고 이 事實을 警察署長에게 報告하였다.

  報告를 받은 警察署長 朴種燮 警監은 警察 精銳隊를 偏性하고 50名을 直接 統率하고 現地에 到着한 뒤 工作員들과의 緊密한 電話交換을 통해 作戰을 開始하고 約 3時間餘에 걸친 熾烈한 交戰 끝에 敵 射殺 9名을 비롯하여 生捕1名, 銃器 3정, 不穩文書와 食糧, 衣類 等 많은 電略物品을 노획하고 奉化郡黨을 完全히 紛碎하는 凱歌를 올렸다.

 이 戰鬪에서 我軍은 負傷者가 한 名도 없는 戰果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