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
문중 이야기 | |||
- 임청각. | |||
‘임청각’은 현재 안동 시내의 고가를 대표한다. ‘임청각’은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별당형 정자 건축. 보물 제182호. 이 건물은 1515년(중종 10)에 형조좌랑 이락(『세보』에는 이명이다. 여기 이락은 오기이다.)이 건립한 양반주택의 별당형 정자 건축이다. 정자의 평면은 丁자 모양이며 …… 특히 이 정자의 동쪽에는 조그만 ‘방지’(네모진 연못)가 있고, ‘방지’ 가운데의 둥글게 다듬은 돌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세 개 뚫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정자의 몸채는 정자 서쪽에 있는데, 정승이 세 사람이나 탄생하였다는 ‘영실’(영혼의 방)이 있고, 그 평면은 양택론에서 길형(좋은 형국)으로 말하는 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전통시대에 안동의 현대화를 상징하는 것이 철도였다면, 임청각 종가는 그 현대화의 가장 큰 희생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차길 옆 오막살이라는 노래가 있지만, 기차길 옆 고대 광실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군자정의 동쪽으로는 정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다. 연못 주위는 군자정에서 가장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곳이다. 연못의 물은 깊지 않았고, 바닥에는 뻘이 쌓여 있었지만, 뻘 속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우렁이가 보일 정도로 맑았다. 잔바람이 불어들자 맑은 물의 표면에는 비늘같은 파랑이 일고, 북쪽 한켠에 서 있는 모과나무의 분홍색 꽃잎이 여럿 물 위로 떨어져 조각배처럼 조금씩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임청각 종가의 사당은 텅 비어 있다. 위패는 다 치워지고 빈 마루방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이 집이 상징적인 차원에서도 종가로서의 의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일까? 이제 임청각은 종가가 아니라 빈 집에 불과한 것인가?? 이보다 더 상징적으로 오늘날 종가가 처하고 있는 위상을 증거하여 주는 것이 있을까? 철도길의 기름먹인 침목이 세월에 바래서 만들어내는 것과도 같은 색조가 기왓장에서, 집의 기둥과 서까래에서, 마루의 난간 가로대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채는 안내판에 적혀 있듯이 한자로 用자 형상을 하고 있다. 글씨는 서쪽을 머리로 삼고 동쪽, 그러니까 군자정 쪽을 다리로 삼아 옆으로 누워 있다. 그 앞, 좁은 마당 안에는 화강암 판을 이용하여 井자 모양으로 쌓은 우물이 있다. 우물 속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다. 대대로 이 가문의 사람들이 마셨을 물은 여전히 투명할 정도로 맑은데, 이제는 마셔줄 사람이 이 집에 살지 않는다. 그러니 이 맑은 우물물도 점점 더럽혀져 갈 것이다. 이번에는 안채의 아래쪽 건물들, 그러니까 用자의 첫 번째 내려 그은 선이 시선을 잡아끈다. 고방과 행랑방 등이 일선으로 붙어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건물들은 석축 위에 올라앉아 있다. 석축은 동쪽은 낮고 서쪽은 높다. 석축 위에서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수선과 기둥 사이를 가로지른 횡선이 담담하게 교차한다. 그 담담한 수선과 횡선의 만남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그 벽면의 위쪽에 무수하게 내려뻗은 서까래의 횡선과 곡선들은 또 어떠한가. 서까래와 기둥이야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니 임청각에서만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종묘와 같은 건물이 아닌 다음에야 어디에서 이렇게 긴 한옥 건물의 직선과 만날 수 있을 것이겠는가? 축대 위를 보통 어른의 발걸음을 평상보다 넓게 해서 53보. 어림잡아 40m 정도의 직선이 거기 있는 것이었다. 그 긴 직선 위에서 14개의 기둥과 111개의 서까래가 담담하게 교차하면서 한옥의 미학을 낮은 음조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사람들이 가득 찼을 때는 얼마나 번잡하였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 속에는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그 집이 너무 큰 규모이기 때문인지, 그 속에 사는 사람의 부재는 더욱 커다란 공허감으로 가슴 속을 비집고 든다. 그리고 바로 앞의 철길을 기차가 빼액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기차의 진동 때문에 땅이 조금 흔들렸다. | |||
.이증의안동정착. | |||
원래 고성이씨 일문이 안동에 내려와 살게 된 것은 이증(李增, 1419∼1480)으로부터이다. 이증은 1419년(세종 1) 출생으로, 영산 현감을 거쳤으며, 이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았다. 그는 1480년(성종 11)에 62세로 타계하였다. 배위는 경주이씨인데, 『고성이씨세보』에는 그들 슬하에 5남 1녀가 기재되어 있다. 그는 안동으로 낙향하여 향리의 나이 많고 덕이 높은 12명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어 향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맏집은 청도에 살아요.”라고 귀래정 종가에서 만난 이인형 씨가 말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출생하여 25세에 진사가 되고,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세보』의 이굉에 관한 기록이 있다. 임청각은 귀래정의 아우 이명(李洺)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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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李洺, 생몰미상)의 가족 관계 | |||
이명(李洺)은 자가 호원(浩源)인데, 진사이며, 형조좌랑을 지냈고, 이조참의를 증직으로 받았다. ”라고 이인형은 말하였다. “자는 계임이고, 신묘 생원이다. 예빈시 별제를 지냈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반구정’을 지었다. 호는 ‘반구옹’이다.”라고 『세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용은 字가 사관(士寬)이고, 號가 어은(漁隱)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후릉참봉을 지냈다. 세간의 명리를 뜬구름 같이 여겨 반구정을 지어 놓고 만년을 즐겼다고 한다. 이상룡의 족보상 이름은 상희이다. 자는 만초이고, 호는 석주이다. 1858(철종 9)에 출생하여 서산 김선생(김흥락)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승목은 안동권씨와의 사이에 이상희와 이용희, 이윤희를 낳았다. | |||
- 이상룡(李相龍, 1858~1932) | |||
“1911년 서간도로 망명 후 계원으로, 이어서 이상룡으로 개명하였다. …… 정치제도와 실용지학을 탐구하였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에 은신하면서 병학(군사학)에 몰두하였다. …… 1910년 11월 주진수황만영 등으로부터 신민회의 독립운동 기지 설정계획을 전해 듣고, 1911년 1월 양기탁과 협의한 후, 2월 서간도 회인형 항도천에 도착하였다 …….”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간도(間島)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유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어 교포 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료들의 자치활동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32년 길림성에서 병으로 타계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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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채 동편의 정자 건물 이름이다. | |||
임청각(臨淸閣) | |||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 시를 짓노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에서 따온 것이다. | |||
거국음(去國吟) | |||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지었다. 법흥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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