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의 공신 특별전 (2)]
[조선의 공신 특별전 (2)]
팔사품도병(八賜品圖屛)
명나라에서 이순신에게 내린 여덟가지 의장품을 그린 그림
우리 많은 동문들의 선조님들이 소개되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잘 알지 못하는 南齋로서는
巨林 박정우, 三江 정길태, 東郊堂 유강하 동문의 공신 조상 내용만 간단히 올리니 관심있는
동문들은 7월 15일까지 전시되오니 자녀들과 함께 자랑스러운 전시실 관람하시기를...
[巨林 박정우 동문 16대 선조]
박승임 강화도호부사 교지
(朴承任 江華都護府使 敎旨)
박승임 강화도호부사 교지(朴承任 江華都護府使 敎旨)
위사공신(衛社功臣)이 삭훈된 다음해에인 1578년에 당초 위사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던
박승임(1517~1586)에게 삭훈한 내용 반영하여 통정대부에서 통훈대부로 자급을 강등한 교지.
위사공신은 명종 즉위 직후 발생한 을사사화가 마무리된 후 녹훈한 공신 칭호이다.
선조가 즉위한 이후 위사공신의 위훈성(僞勳性)이 제기되어 1577년(선조10)에 전원 삭훈되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0호, 소수서원시립박물관]
[三江 정길태 동문 13대 선조]
정탁(鄭琢) 호성공신화상(扈聖功臣畵像)
[보물 제487호, 한국국학진흥원(청주정씨 약포선생문중기탁)]
1604년(선조37)에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된 정탁(鄭琢, 1526~1605)의 공신화상이다.
정탁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력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공신화상은 단령에 사모차림을 하고 교의(交椅)에 앉아있으며, 바닥에는 채전(彩氈)을 깔고,
두 발을 돗자리가 깔린 족좌대 위에 팔자형(八字形)으로 올리고 있는 전형적인 17세기 공신도상이다.
화면의 상단 위쪽에는 영조의 어제 찬문이 5대손 정옥(鄭玉)의 글씨로 적혀있다.
[東郊堂 유강하 동문 14대 선조]
류성룡 호성공신교서(柳成龍 扈聖功臣敎書)
1604년(선조37)에 류성룡의 호성공신으로 녹훈하는 왕명서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선조의 호종에 공이 컸으나 오히려 그는 임진왜란 중 자신의 공보다 과를
드러내며 공신녹훈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충훈부에서 공신화상을 그리기 위해 파견한 화사도 돌려 보냈다.
그리하여 류성룡의 화상은 끝내 그리지 못하였다.
류성룡 광국공신교서(柳成龍 光國功臣敎書)
1604년(선조37)에 류성룡을 광국공신으로 녹훈하는 왕명서
1590년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된 류성룡(柳成龍:1542~1607)에게 내린 공신교서.
류성룡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1589년(선조22) 종계변무의 내용이 반영된 [대명회전]을 확인한 선조는 이듬해인 1590년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광국공신을 녹훈했다.
8월 1일 고유제와 회맹제(會盟祭)를 한 뒤 우의정 류성룡에게 광국공신 3등에 녹훈하는 교서와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의 군호를 내렸다.
교서의 글씨는 한호(韓濠, 1543~1605)가 섰다.
[보물 제160-3-1호, 한국국학진흥원(안동 하회 풍산류씨 충효당 기탁]
[충무공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