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제23대),강원도,도관찰사!!1417년,문량공할아버지!!
1411년
박습(朴習)
졸(卒) : 1418(세종 즉위년)
본관(本貫) : 함양(咸陽)
1400년(정종 2) 좌간의(左諫議)를 거쳐 1409년(태종 9) 우간의(右諫議)를 지냈다.
1411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강원감사를 지내고, 그 이듬해 인녕부윤(仁寧府尹)재직 당시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강원감사 재직시의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을 만들고 패를 지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장(杖)70대에 처하여졌다.
1415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때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1416년 의금부제조로 임명되어 민무질사건(閔無疾事件)과 관련된 이지성(李之誠)을 심문하여 이에 연루된 하륜(河崙)을 국문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같은해 호조참판을 거쳐 1417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어 방간(芳幹) 등을 치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고, 1418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사(兵事)를 상왕(上王:太宗)에게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인하여 사천에 유배되고 이어 참수(斬首)당하였다.
1411년
이종선(李種善)
생(生) : 1368(공민왕 17)
졸(卒) : 1438(세종 20).
본관 한산(韓山)
자(字) : 경부(慶夫)
부(父) : 색(穡)
처부(妻父) : 권근(權近)
1382년(우왕 8)1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정랑을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순창·배천·여흥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서민이 되고 멀리 귀양갔다.
1396년에 병조참의가 되었고, 1409년(태종 9)좌우사간대부가 되었는데, 이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하여 시행되었다.
1411년 명나라의 진련(陳璉)에게 받은 아버지 색의 비명문제로 인하여 동래진으로 귀양갔다.
그뒤 호조참의·대언을 지내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외방으로 나가 강원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로 있다가, 1417년 풍해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구암사와의 노비속공문제로 인하여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1418(세종 즉위년)한성부윤으로 있다가, 다시 인수부윤이 되었고, 1421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23년 진전사(進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4년 다시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나, 진하사 도총제 권희달(權希達)의 문제로 인하여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1426년 함길도관찰사로 있다가 새 감사와의 교체 도중 호부(虎符)인수인계 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다시 이듬해에 선위사(宣慰使)로 황주에 다녀왔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嘉禮色都監提調)가 되어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뽑는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뒤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승진되었고, 1438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廬墓)살이하여 효자로 일컬어졌으며,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1417년
홍여방(洪汝方)
졸(卒) : 1438(세종 20)
본관(本貫): 남양(南陽)
자(字) : 자원(子圓)
호(號) : 연생당(戀生堂) ***戀主亭의오기인듯!
부(父) : 판서 길민(吉旻)
사마시를 거쳐,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원자우동시학(元子右同侍學)이 되고, 예문관검열과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410년 지평이 되고, 1414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해에 동부대언(同副代言)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하였으나 판결을 잘못한 책임으로 한때 면직되었다.
이듬해 복관되어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1417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일시 사직하였다가
곧 순승부윤(順承府尹)이 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예조·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으나,
병조의 아전(衙前)을 불법으로 책문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처음에는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단으로 이배되었다.
1426년에 풀려나서 인순부윤(仁順府尹)·평안감사·한성부윤을 거쳐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진상한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 하여 파직되었다.
1433년 복관되어 전주부윤이 되었고,
1437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본국으로부터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북경에서 돌아올 때는 황제가 칙명을 내려 원유관복(遠遊冠服)을 보내주었다.
귀국 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시와 술을 좋아하며 직언을 잘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1426년
황보인(皇甫仁)
졸(卒) : 1453(단종 1)
본관(本貫): 영천(永川)
자(字) : 사겸(四兼)·춘경(春卿)
호(號) : 지봉(芝峰)
부(父) :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고,
1414년(태종 14)의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좌정언이 되었고, 1420년 좌헌납이 되었으며,
1422년에는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으로서 강원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기근을 규찰한 뒤 귀환하여 곧 장령이 되었다.
1425년 1월 한성소윤(漢城少尹) 재임 중 경상도찰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1428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해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으로 발탁되고 좌부대언을 거쳐 1430년에는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이듬해 강무행행(講武行幸) 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마(人馬)가 살상되자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되었다가 같은해 형조참의로 복직되었으며,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432년 형조좌참판·병조우참판을 역임하였다. 같은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정효전(鄭孝全)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판중추원사 하경복(河敬復), 형조판서 정흠지(鄭欽之), 예문관대제학 정초(鄭招)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찬진(撰進)하였고,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파견되고 같은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兵曹事)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幸)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되어 종성을 수주(愁州)강변으로 이치(移置)하면서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하여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되어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하였다.
1445년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임하고, 144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뒤 1449년 의정부의 직에서 해임된 뒤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하였으며, 같은해에 좌의정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하였으며, 이듬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문종의 국상을 총령하였고, 이듬해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같은해에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奔), 우찬성 이양(李穰),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되었다.
오랫동안 신원(伸寃)이 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 31) 7월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계기로 김종서와 함께 복관(復官)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뒤 1719년 후손이 전조(銓曹:吏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되었고,
1746년(영조 22) 복관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그뒤 1758년에는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端宗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고,
1804년(순조 4) 집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읍의 경남서원(慶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다.
1430년
조수량(趙遂良)
졸(卒) : 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本貫): 양주(楊州)
증조(曾祖): 보승별장(保勝別將) 인필(仁弼)
조(祖) : 서운관정(書雲觀正) 의(誼)
부(父) : 좌참찬 계생(啓生)
외조(外祖): 이적(李迹)
1420년(세종 2)부사로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고, 1429년 예조좌랑으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경상우도에 파견되었으며, 그뒤 장령·집의·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대사헌·충청도관찰사·병조참판·경창부윤(慶昌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계유정난 때에 평안도관찰사로 있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461년
권개(權愷)
졸(卒) : 1468(세조 14)
본관(本貫) : 안동(安東)
조부(祖) : 현(顯)
부(父) : 식
1447년(세종 29)에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하다가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1)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던 날 대궐 안에 입직해 있다가 달려가 협력한 공로로, 세조가 즉위한 뒤 좌익공신(佐翼功臣)3등에 책정되었다.
이듬해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좌사간을 지내고, 1457년(문종 3)지병조사, 이듬해 첨지중추원사, 1461년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지고 경상도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463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14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