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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임금과한양천도와남양군홍길민의주청!!

어풍대08 2012. 3. 2. 20:06

태종시대의 한양천도
 
중분류 역사;
 소분류 조선시대;

 저작자 마포구청;

 유형 역사일반, 시대 조선시대,

 지역, 서울시 마포구 왕자의 난으로 상심한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태조의 차남

 방과(芳果: 정종)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1년 만에 서울에 뭇 까마귀가 모여 울고,

들까치가 와서 집을 짓는 등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므로,

서운관(書雲觀)에서 수신성찰(修身省察)하여 변괴를 해소하며 또 흉방을 피하여

옮겨야 한다는 상서를 하였다. 이에 정종은 종척(宗戚) 및 공신들을 모아 서운관에서 올린 글을 보이며 흉한 방위를 피하여 옮기는 일의 가부를 물었는데 모두들 가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어느 곳으로 옮겨야 할 것인가를 물었는데, 대답하는 말들이 서울에 가까운 주현(州縣)에는 대소 신료와 숙위하는 군사가 의지하여 거처할 곳이 없는데,

 송도에는 궁궐과 군신의 제택(第宅)이 모두 완전하므로 변괴가 보이는 좋지 못한 곳인

 한양을 피하여 일시 도읍을 옮기는 일과 그 옮기는 곳은 옛 궁궐과 관원들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개성으로 가는 일이 쉽게 결정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종 1년(1399) 3월 7일에 한양을 떠나 송도(개성)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 당시 왕자와 종친은 모두 떠나고, 각 관아는 절반으로 나누어

절 반은 새로운 수도 한양에 남고, 나머지 절반은 옛 수도 개성으로 향하였다.

개경으로 옮겨온 지 1년이 채 못 되어 정종 2년(1400) 1월에 다시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방원(芳遠)이 그의 형 방간(芳幹)을 누르고 승리하자

 정종은 그해 11월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조선의 제3대 왕으로 등극한 방원, 즉 태종은 우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들 사이에 개경과 무악이 도읍지로 적합하다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함으로써 한양 천도는 일단 보류되었다.

그러던 중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1개월 지나 개성 수창궁(壽昌宮)에 화재가 나서 모두 타버리자 왕실과 백성들의 인심은 뒤숭숭하여 천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태종 원년(1401) 1월 당시 남양군 홍길민(洪吉旼)은 태종에게 도읍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이자 공물(貢ィ)이 집결하는 중요한 곳입니다. 지난달 태상왕(太上王: 이성계)께서 도읍을 한양에 정하여 궁궐시가 등을 훌륭하게 개설한 지 수년이 못되어 이곳을 떠났기 때문에 새 도읍지가 황폐하여 이를 보는 사람들마다 서글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또한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만 되면 개경과 한양을 왕래하는 폐가 많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효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태상왕의 천도하신 뜻을 받들어 만세무강의 기업(基業)을 정하십시오. 라고 주청하였다.

태종은 이 주청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한양으로 천도하려고 했으나 대신들 중에는 개경을 떠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으므로 천도를 강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는 중에 어느새 세월은 1년이 다시 흘렀다.

그간 태종 3년(1403) 1월과 2월 두 차례에걸쳐 사헌부사간원에서 한양에 두고 있는 종묘와 사직을 개경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고,

그 이듬해 7월에도 이와 같은 주장이 있었다. 태종은 이처럼 천도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시일만 끄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였다.

이에 태종은 6년 전 한양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것은 피방(避方)을 위해서였는데,

여태껏 종묘와 사직을 한양에 두고 도읍을 확정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근래에 와서 천재지변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종묘와 사직이 멀리 한양에 있고 도읍이 정해지지 못해 인심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개경에 살다보니고토(故土)에 친하고 생업이 안정되어 천도하기 어려운 것인즉, 종묘와 사직을 개경으로 옮기는 것이 어떤지 내일까지 의논해서 보고하라. 고 도평의사사에 명하였다.

도평의사사는 태종의 명에 따라 종친들과 원로대신들을 불러 의논한 결과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종묘와 사직을 개경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찬성사(贊成事)로 있던 남재(南在)만은 종묘를 옮기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니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널리 참고하여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밝힌 후에 옮기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라고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때 원로대신 하륜(河崙)이 다시 입궐하여 한양이나 개경은 모두 풍수지리적으로 길하지 못한 곳이니 명당인 무악(毋岳)으로 천도해야 합니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어 직접 무악을 살펴보기로 결정하였다.

태종 4년(1404) 9월 26일, 태종은 종친 및 중신, 풍수지리가 등을 이끌고 개경을 출발하여 무악에 오르고, 또한 신하들과 함께 한양을 돌아보았지만 도읍지를 개경, 무악, 한양으로 정해야 옳다는 신하들의 의견이 맞서서 결정이 나지 않았다.

태종은 궁리 끝에 개경, 한양, 무악 3곳 중 한 곳을 택하는 방법으로 고대 서양에서의 신탁(神託)과 유사한 방법을 택하여 동전(銅錢)으로 점을 치기로 하였다.

10월 6일 태종은 종묘 앞에 도착하여 모인 사람들에게 과인이 개경에 있는 동안 재난이 자주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문의했더니 정승 조준(趙浚)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신도읍지로 가야만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도읍지 한양에도 천재지변이 적지 않게 일어났기 때문에 도읍을 결정하지 못해 인심이 매우 불안하였다. 이제 종묘에 들어가서 어느 곳을 도읍지로 정할 것인가를 조상님께 고하고 점을 쳐서 길한 곳을 도읍지로 삼을 것인데,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절대로 이의를 제기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라 하고 장중한 어조로 다짐을 받았다. 이어서 태종은 대신들과 같이 종묘에 들어가 배례한 후 좌의정 조준, 대사헌 김희선, 지신사 박석명, 사간 조휴, 태종의 사촌 정산군 이천우 등 5명을 거느리고 묘실(廟室) 안으로 들어갔다.

태종은 향을 피운 다음 이천우에게 앞면에 길(吉), 뒷면에 흉(凶)자가 써진 동전 3개를 던져 점괘를 내게 하였다.

태종의 명에 따라 이천우는 소반 위에 동전을 던져 점괘를 냈다.

이때 나온 점괘는 개경과 무악이 길이 1개, 흉이 2개 나오고,

 한양은 길이 2개,흉이 1개 나왔다.

 이처럼 한양이 무악과 개경보다 명당이라는 점괘가 나옴으로써 5년간 논쟁을 벌였던

천도문제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마침내 태종 5년(1405) 10월, 7년간 비어 있던 한양으로 태종이 환도함으로써 조선왕조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1396년에 한성부 행정구역을 5부(五部: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52방(坊)으로 하고, 각 방에는 방명표(芳名標)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때 마포구 지역은 서부 반석방(盤石坊)에 속하였다가

조선 후기에는 신설된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에 속하였다.